에덴골

사랑하시는 자

거듭난 삶 2012. 2. 4. 19:16
728x90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요한복음 11장 1절-5절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병과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늙고 싶지 않다는 것은 병으로 고통을 당하거나, 그것으로 인해 죽음까지 이르는 것을 극복하고 싶다는 인간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든다는 것에 대한 관심은 곧 질병과 죽음에 대한 관심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 질병과 죽음은 우리만의 관심사이지는 않습니다. 인간과 같이 똑같은 관심을 가지는 분이 계십니다. 누구일까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신 것 중에 어쩌면 반 이상이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의사로 찾아오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똑같이, 아니 어쩌면 질병과 죽음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만 병든 것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도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아플 때 우리만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도 우리의 아픔에 동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돌아보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여기 나사로의 이야기가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혼자 아프지 않습니다. 함께 앓는 사람들이 있어요. 교인들이 아프면 우리도 함께 아픈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아파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혼자 아프지 않습니다. 함께 아픔을 나누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함께 고민해주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성령으로 깊이 탄식하면서 기도해주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질병으로 죽음에 이르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1절 말씀을 보실까요?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누구 이야기입니까?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나사로의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7가지 표적 중 마지막 표적 이야기 입니다. 이 표적 이야기는 긴 11장을 거쳐 12장 전반부까지 연결되어 있을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이 마지막 표적이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이라는 사실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야기의 서론부분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이 사건의 주인공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요, 이 말씀을 보기 전에 먼저 물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 질문입니다.

 

"나는 나사로의 이야기를 정말 나의 이야기로 듣기를 원하는가?"

 

나사로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나사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사로를 알아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의 이 사건을 통해서 나 자신을 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한 병든 자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나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사로가 누구일까요? 1절을 다시 봅니다.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첫 번째입니다. 나사로는 병든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이 전에는 건강했을 것입니다. 아무런 문제없이 살았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병든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병이 들어서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습니다. 다니기조차 어렵습니다. 차려놓은 음식을 먹는 일조차 부담스러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사로라는 사람이 병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가르침이 하나 있습니다. 사실 이 땅에는 병들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 병에 걸려 있는 사람입니다.

 

肉身의 病만 병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분노라는 질병에 걸려 있습니다. 미움의 질병에 사로 잡혀버린 사람입니다. 자존심이라는 엄청난 병에 시달리는 사람입니다. 경쟁심과 실력차이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이루는 병든 자입니다. 돈 떼어먹은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병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병이 들면 우리가 예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실까요?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병이 드니까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병드는 일은 슬픈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도 병원에 입원하면 평소에 자주 읽지 못했던 성경책을 꼭 가지고 가게 되더라구요. 병원 심방을 가면 늘 만나는 경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9:12)."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병을 고쳐 주시는 의사로 오셨습니다. 육신의 병이든 영혼의 병이든 그 병을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필요가 없고,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병에 걸리면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만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하겠지요?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제일 좋은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안 걸리면 좋지요. 그러나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나이가 먹지 않기만 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지요. 점점 쇠약해지면서 병도 따라 오지요. 인생의 운명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을 찾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3절을 다시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람을 예수님께로 보냅니다.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주님 찾으러가는 이것은 엄청난 복(福) 입니다.

 

어느 누가 완벽해서 주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병에 걸리는 것도 은혜라고 말입니다. 왜요? 주님을 만나거든요. 병에 걸리면 주님을 찾게 되거든요. 사업에 실패하면 주님을 찾아 나서거든요. 아무도 연약하지 않으면 좋겠지요. 자존심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없다면야 좋겠지요. 미움과 원망 때문에 신경 쓰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때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에서처럼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병도 은혜고, 때때로 쓰러지는 것도 은혜인 것입니다. 자기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가장 큰 불행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찾지 않는 불행입니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습니다.

여러분, 병든 것이 불만스럽습니까? 사업이 잘 안되는 것이 짜증스럽습니까? 아닙니다. 불만스러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더 가깝게 만나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은혜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마지막 때가 다가오자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베드로 차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강력하게 저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기신다구요? 절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래, 내가 씻지 않아도 되니까 다행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씻길 것이 없다면 좋겠지요. 그러나 만약 씻길 것이 없다면 주님과 우리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연약한 것은 중요한 순간입니다. 이 연약한 순간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오히려 자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여러 연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바울이 연약한 사람이었습니까? 연약하지 않고 강해서 그렇게 엄청난 선교 여행을 다닐 수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에게는 연약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오히려 그 연약한 것을 자랑했습니다. 왜요? 그리스도가 그의 연약함 속에, 즉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안에 자리잡고 들어오시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안에 연약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까?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기회입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연약함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시고 그 분을 확실하게 잡으십시오. 그러면 병든 것이 은혜가 될 것입니다. 쓰러져 낙심된 것들이 축복으로 바뀌어 질 것입니다.

연약함 을 자랑하십시오. 불평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남편과 아내와 자녀의 모자람과 연약함이 자꾸 드러나 보이십니까? 기회입니다. 연약한 것을 통해 주님을 만나십시오. 병든 나사로는 결코 버림받는 것이 아니었읍니다.

나사로는 병든 자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어떤 병든 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소개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누구인지, 누구와 어떤 관계인지까지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기적들이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의 체험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혀 놓지 않은 곳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라고 했지 이름은 적지 않았습니다. 38년 된 앉은뱅이라고만 말했지 그 이름을 알려주지는 않았습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은,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 말씀의 주인공의 이름은 정확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1절과 2절에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형제들 이름까지, 그들의 행적까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조금 독특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감동을 받게 됩니다.

 

"나는 과연 주님에게 정확하게 기억이 되고 있는 인물인가? 나는 정말 예수 믿고 산다고 말하면서도 주님 앞에 無名하게 살고 있지는 않는가?"

이런 질문이 자꾸 나의 마음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 분명한 이름들이 나에게 도전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는 無名하게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주님 앞에서만은 무명하게 살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서만은 유명해지기를 바랍니다. 그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일에는 이름을 날리십시오. 주님을 위한 것에는 여러분의 이름이 주님의 수첩에 명확하게 적혀지게 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섬기는 것에 있어서만은 무명하게 살지 마십시오. 유명해지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지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렇게 고달프게 사셨습니다. 그런데 베다니에 오시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은 예수님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 한국에 오시면 여러분의 집이 주님의 거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머리 두실 곳이 여러분 개개인의 집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억 속에 사라지지 않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기억되어 지십시오. 주님 앞에서 유명해지십시오. 이것이 진짜 복입니다.

 

 두 번째로 나사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3절과 5절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5절입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 그가 바로 나사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해 주시는 사람이 나사로였습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확신하십니까? 주님이 나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감격적으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5-8).

 

여러분, 사랑을 입은 자는 어떻습니까? 언제나 사랑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습니다. 몸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함께 있는 사람이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솔로몬의 아가서에는 이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가서 2장 10절).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든지 함께 가는 사람입니다. 몸이 같이 가지 못하면 마음이 함께 갑니다. 사랑의 향기가 함께 갑니다. 떨어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을 입으셨다면 주님과 함께 가십시오. 주님 말씀하시는 곳에 따라가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사랑받은 나사로의 이야기, 바로 여러분과 나의 사랑의 이야기이어야 합니다.

 

사랑을 입은 자가 함께 다니다가 병들게 된다면 사랑하는 자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그냥 내버려 둘까요? 나을 때가 되면 낫겠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반드시 반응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해졌을 때에도 쓰러지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 사랑을 입은 우리는 반드시 주님의 어떤 조치를 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시는지를 보면서 오늘 우리는 마지막으로 나사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병들어 연약하지만 주님의 사랑을 입은 나사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4절을 보면 나사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예비 된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지금 나사로는 병들었습니다. 병도 웬만한 병이 아니라 심각한 중병입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며칠이 안 되어 죽음을 맞이할 정도로 대단한 병에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이것은 죽을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생긴 병이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거하여 영광을 얻게 할 병이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선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입은 여러분과 내가 병든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과 내가 고통 중에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의 영광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생각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라구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영광을 위해서 예비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냥 생겨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난을 이유 없이 만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에도 다 이유가 분명하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사야서 42:8에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이 말을 다르게 옮기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는 영광을 얻기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그것이 고통이든, 병이든, 부유함이든, 가난함이든 관계하지 않습니다. 그 무엇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영광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비 된 사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연약해도, 비록 배운 것이 많지 않아도, 재물이 많지 않다고 할지라도, 아니 풍성한 재물이 있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놓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人生의 目標입니다. 절대로 흔들릴 수 없는 비전입니다. 여러분과 나의 연약한 병을 통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여러분과 나의 견디기 어려운 갈등을 통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신다구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 확실하게 보여야 나사로의 최종적인 영광을 우리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한 것입니다. 연약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병에서 회복되는 것도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무엇 때문에 존재합니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의 사업이 왜 여러분에게 주어졌습니까? 바로 그 영광, 그것을 위해서 예비 된 것입니다. 이런 비전을 놓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나사로가 누구인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비 된 나사로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에덴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깨우러 가노라  (0) 2012.03.10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0) 2012.03.05
인간의 일  (0) 2012.01.15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0) 2012.01.12
새해을 맞으며  (0) 2012.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