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인간의 일

거듭난 삶 2012. 1. 15.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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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일

 

 

요한복음 9장 1절-7절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目標와 目的意識이 분명하지 않은 삶은 살아도 살아있는 이유가 분명하지 못한 삶입니다. 목적을 분명하게 직시할 줄 알아야 사는 의미와 보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空虛합니다. 자꾸만 헛수고처럼 느껴집니다. 하면 할수록 전신에 퍼져오는 無力感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 어떨 땐 힘들고 지치고 바쁜 생활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사는 목적을 정확하게 아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 主前 3세기경, 점점 더 영토를 확장해 나가던 로마 군대가 장화 모양을 한 이탈리아 半島 전체를 정복하기 위해 반드시 싸워야 하는 상대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南部 이탈리아의 헬라 植民地 중 가장 강력한 타렌툼이라는 都市國家였습니다. 그러나 타렌툼은 자신의 힘으로는 로마와 싸우기가 힘겹다고 판단하고, 그리스(헬라) 본토의 에페이로스 왕인 비로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비로스왕은 제 2의 알렉산더 대왕이 되겠다는 野心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타렌툼의 도움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드디어 주전 280년 로마와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로마의 騎馬隊는 비로스가 이탈리아 전쟁터에 끌고 온 코끼리 부대를 보고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도망하기에 바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비로스 왕이 비록 첫 번 전투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그 전투에서 비로스 군대도 로마 군대로 인해 엄청난 손해를 입었고, 비로스 왕 자신도 負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로마군을 상대로 계속해서 싸운다는 것은 승산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사절단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절단 대표가 키네아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雄辯家 데모스테네스의 제자입니다. 그가 비로스 왕과 이런 대화를 한적이 있었습니다.

 

"대왕이시여, 로마인과 싸워 이기신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비로스 왕이 대답합니다.

"이탈리아 전체를 차지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기름진 땅 시실리아를 정복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내 친 걸음에 리비아와 카르타고도 손아귀에 넣고 말 것이다." 그 말을 들은 키네아스가 말을 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마케도니아를 탈환하고 그리스 전체를 지배하시겠지요. 그러나 그 다음에는 무슨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비로스 왕이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 땅을 다 차지하면 내 야심은 다 이루어진 셈이니 무척 여유가 있을테지. 그때는 매일 잔치를 열고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과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나게 될 것이다."

그 때 키네아스는 매우 중요한 지적을 하나 합니다.

 

"대왕님, 잔치를 열고 즐거운 한담을 하면서 지내실 생각이시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가능한 일인 줄 압니다. 그런데 왜 굳이 많은 사람의 피를 흘리고 또 모험을 해 가면서까지 그와 같은 하찮은 것을 차지하려 하십니까?"

 

여러분, 비로스 왕에게 삶의 분명한 목적이나 피를 적시는 전투에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죽음을 무릅쓴 전투를 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는 목적이 분명합니까?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는 목적이 분명합니까? 아니 때때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을 만나면서도 내가 가진 분명한 삶의 목적 때문에 고통이 고통스럽지 않게 느껴지십니까? 내가 왜 이 땅에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왜 이 세상에서 이렇게 애쓰면서 살아가야 합니까? 목적을 확인하십시오. 목표를 정확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어느 동네를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지나시다가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과 함께 가던 제자들도 그 사람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태어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이었습니다. 불행의 극치를 경험한, 아니 지금도 그 불행과 아픔을 안고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처럼 말입니다. 그 소경을 주님께서 바라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한 소경,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어버린 한 사람을 두고 바라보는 두 가지의 視覺에 대한 이야기로 먼저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바라보는 시각이 하나이고, 그리고 제자들의 시각 두 가지가 對照되어 있는 것입니다.

 

먼저 제자들의 시각입니다. 2절을 보십니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본 순간 제자들의 입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저 사람이 소경된 것이 누구 죄 때문일까?" 너무나 궁금해져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참 대단한 질문이지요?

 

지금 한 사람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앞을 보지 못하는 괴로움으로 떨고 있는데, 제자들은 그 소경이 가진 엄청난 아픔에 대해서 관심과 애정을 보인 것이 아니라, 그가 소경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에 저렇게 되었는지, 누구의 잘못인지를 밝혀보고 싶은 충동에 더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시각이었습니다. 충격적인 시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죄를 지적하고 싶은 마음, 나 자신이 죄에 물들어 살면서도, 죄의 탑을 끊임없이 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자꾸만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해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일까요?

 

왜 그런 엄청난 아픔을 내 자신에게는 잘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 모두는 죄는 지적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결하기 위해서 있다고 말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그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제자들의 삶과 흡사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죄를 짓고도 아닌 척하고, 내 자신은 남을 비방하고도 그렇지 않은 듯하게 살아가면서, 왜 그렇게 남의 죄만 보면 신이 나서 앞장서서 밝혀보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어느 詩人은 이렇게 노래했던 것일까요?

 

"눈먼 새는 일생에 단 한 번 눈을 뜨고 죽는다는데

백조는 일생에 단 한 번 아름다운 소리로 울다 죽는다는데

가시나무새는 가시에 가슴을 찔리면서

일생에 단 한 번 울다 죽는다는데

일생에 단 한번 번식하는 게도 있다는데

일생에 단 한 번도 날지 않는 새도 있다는데

오직 사람만이 변신의 명수라네"

 

-천양희의 詩 "단 한 번" 全文.

 

 

왜 그렇습니까? 왜 그렇게 우리는 변신의 명수로 살면서 남의 죄를 지적하기에 발 빠르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이 태어난 참된 목적을 정확하게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 살아도, 아니 어쩌면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 고통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을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시각이었습니다. 목적을 모르는 사람의 시각입니다.

 

그 엉뚱하고 실망스런 질문에 예수님께서 그 소경을 바라보는 시각을 알려주시는 말씀이 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예수님의 시각에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똑같이 소경된 그 사람을 바라보았는데 예수님은 그 사람의 소경된 것을 죄의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죄나, 부모가 지은 죄의 이야기를 주님은 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시각은 제자들의 시각과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소경을 "보신지라"고 말했을 때 그 보았다는 말의 뜻은

"관심을 가진다, 돌봐준다, 염려해준다, 아픔을 공유한다(interest, care, concern, and compassion)"입니다.

 

예수님은 그 소경을 그냥 바라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눈여겨보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 소경을 바라보신 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목적, 그 생명이 비록 누가 보아도 불행해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생명이 주어진 목적이 무엇인지를 주님은 알려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시각입니다. 다시 한번 3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유와 목적이 보이십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 이유,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그 고통스러운 소경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분 내키는 대로 그냥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렇게나 빚어놓으시지 않았습니다. 목적없이, 사용의 분명한 용도가 없이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만들 때는 다 소용이 있습니다. 그 토기의 목적이 분명히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토기장이이십니다. 목적을 분명히 가지고 우리를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役事를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목적 입니다. 그 목적을 예수님은 소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놀라운 기적을 위해 우리 인생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서울에, 수원에, 평창에, 필리핀에, 미국 땅에 있는 것이고,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죄를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고통 속에 빠트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과 시련 속에 빠뜨리신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우리를 그 시련 속에 있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죄의 문제로 삶을 쳐다보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은 죄를 지적하고 죄를 드러내고 그래서 그 사람의 인생에 완전한 어두움을 던져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5절의 말씀대로 빛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光明한 빛을 던져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그곳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부모를 원망하라고 우리를 고통 중에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려준 유산이 없기 때문에, 제대로 교육시켜 주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를 경멸하라고 우리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어려움도 "한번 당해보라"고 내리신 고난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녀가 엄청난 가정의 가시처럼 보이는 것도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고난 등이 왜 주어진 것일까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가장 확실하게, 가장 명백하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모든 삶의 순간에서 하나님의 이러한 놀라운 목적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목적만이 우리를 굳건하게 세워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고백할 수만 있다면, 나의 쓰라린 아픔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만 있다면 우리 삶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목적을 일찍 깨달은 사람일수록 축복된 일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떤 삶의 태도가 필요할까요? 먼저 4절을 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 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하는 태도는 때가 낮일 때, 다시 말하면 기회가 우리에게 있을 때, 기회의 순간순간에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언제가 낮입니까? 낮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이 언제입니까? 그리고 또 여러분에게 밤은 언제입니까?

 

사실 우리 인생에는 밤과 낮이 순간순간 교차됩니다. 죄를 바라보면서 유혹받는다면 그 순간은 밤입니다. 남을 비방하고 욕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그 때는 밤입니다. 남을 미워하면서 원망하고 있다면 그때는 일할 수 있는 낮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낮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순간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기회를 만드십시오. 낮의 기회를 사십시오.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말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기회를 산다(purchase)" 그런 뜻입니다. 기회가 생기는 대로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낮일 때 최선을 다하십시다. 젊었다면 그 젊음의 때에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 가십시오. 지금 나이가 꾀 들었다면 이 순간에 하실 수 있는 주님의 사역을 이루십시오. 바로 이 순간을 낮으로 만드십시오.

 

여러분, 지금 소경은 처음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난 바로 그 순간이 소경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 보여주는 낮의 순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여러분, 주님을 만나십니까? 하루 중 언제 주님을 만나고 계십니까? 그때가 하나님의 일을 드러낼 수 있는 순간입니다. 일터입니까? 가정입니까?

 

낮일 때 하나님의 사역을 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을 낮의 순간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는 낮으로 만들어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밤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낮에 일하십시오.

 

그런데 오늘 4절 말씀에는 우리를 향한 놀라운 영광의 진리 한 가지가 더 담겨 있습니다. 4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누가 해야 한다구요?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여러분과 이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역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예수님의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사업을 함께 즉 동업을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동등한 사역을 이루어 가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우리 인생은 시시한 인생이 아닙니다. 때때로 너무 자주 변신을 한다 하더라도, 너무 자주 넘어져서 부끄러운 존재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동역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mission을 주님과 함께 이루어 가는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아무도 무시하거나 경멸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지체가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지식이 없고, 부유하지 못하고, 어쩌면 금방이라도 그 사람에게서 죄를 끄집어 낼 수 있다고 하게 되더라도 그 사람이 예수님의 아름다운 동역자가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소경된 사람에게서 죄를 지적해 보려고 했던 예수님의 보시기에는 실망스러운 제자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들은 그런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소경이 되지 않았다고 자랑하고 싶어 했던 교만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보내신 이의 일을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이고 영광입니다. 여러분과 우리가 비록 작은 존재이지만 주님의 아름다운 동역자로 모두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주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는 때때로 이 땅에서 그리 존중받지 못하고 사는 듯하게 보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역자, 그 사람은 분명히 아름다운 칭찬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의 영광을 바라보며 낮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놀라운 영광의 사역, 동역자의 사역을 무슨 능력으로, 무슨 힘으로 이룰 수 있을까요?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드디어 주님께서 그 소경을 낫게 하십니다. 침으로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소경이 그 말을 듣고 실로암 못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씻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읍니까? 밝은 세상을 보게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처럼 연약한 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동역자로 아름다운 사역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서 씻으라"고 명령하신 그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적이 생기는 것입니다. 동역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를 기억하십니까? 어머니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시키는 그대로, 명령하는 그대로 행했더니 전보다 더 좋고 맛있는 포도주가 넘쳐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을 바라보면서 달려갈 때, 주님의 동역자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할 때 그 에너지와 힘의 공급은 다른 곳에서 오지 않습니다. 오직 한 군데뿐입니다. 그 분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소경처럼

 

"이에 가서 씻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밝은 눈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을 향한 아름다운 목적이 있습니다. 고난이 우리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동역자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역을 이루는 능력은 주님 명령이라면 소경처럼 그대로 행하고 순종할 때 변화되는 엄청난 축복들로 이어질 것입니다. 어두운 눈이 밝은 눈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이라도 하나님의 목적을,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고 말 것입니다. 이런 축복들이 여러분들에게 넘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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