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내가 깨우러 가노라

거듭난 삶 2012. 3. 10.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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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한 11장6절-16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 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하신대 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Apple Computer會社의 共同 창시자인 Steve Jobs는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그의 생존시에 얘기하나를 소개합니다.

 

그의 회사가 급속하게 성장하려면 총체적인 통솔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경험이 풍부한 중역을 고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펩시콜라에서 최고 중역으로 일하고 있는 John Scully라는 인물을 스카웃하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그를 說得하여 잠시 식사를 나누었지만 여전히 John Scully는 쉽게 승낙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Central公園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건물 꼭대기로 올라가서 애플사에 가담시키려는 최후의 노력을 시도했습니다. 마침내 애플 회사의 Steve Jobs가 John Scully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검은 설탕물이나 팔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소, 아니면 세계를 바꾸어 놓을 기회를 잡고 싶소?"

 

이 말을 들은 Scully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는 Apple社로 決定을 내립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세계를 바꾸는 일보다 더 소중한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 생명을 완전히 바꿔서 새로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의 삶다운 삶에 인생을 걸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그렇게 설탕물 파는 것 같은 인생만 살다 여생을 마치겠습니까?

 

비전을 가지십시오. 신앙인의 삶다운 삶을 사는 것을 여러분의 비전으로 삼으십시오. 비전 없는 인생은 영광이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도 그냥 지나쳐 버리지 마십시오. 비전을 가지고 말씀이 원하는 삶에 도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냥 또 듣는 한 편의 설교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말씀 때문에 힘을 얻는 아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나사로의 두 번째 이야기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나사로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죽을 病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들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물러 계셨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렇습니까? 지금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렇게 반응하실 수가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런 엉뚱한 사건을 만날 때 우리의 신앙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위기를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내가 지금 엄청난 고난의 시련에 휩싸여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꼼짝도 않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위기의 상황입니다. 생각하기 싫은 시련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와 마리아 마르다 삼남매를 사랑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자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도 어떻게 태연히 이틀 동안 더 머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들 생각으로는 정말 사랑하신다면 당장, 즉각적으로 행동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루도 아니고 이틀이나 더 머무를 수 있는 것입니까?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바로 나와 여러분의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예수님의 행동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헌신하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언제나 자신의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열어놓고 살아가려고 하는 신앙인의 삶에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이러한 위기가 닥쳐온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정말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는 것일까, 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녀라고 부르시는 것이 진짜일까, 내가 정말 계속해서 예수님의 길을 걸어

가도 손해를 보지는 않을 것인가 아니 정말 계속 믿고 살아도 되는걸까? 하고 당연히 이런 질문들을 가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7절을 보십시다. 또 엉뚱한 이야기 하나가 더 덧붙여져 있습니다.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하시니"

 

여러분, 지금 방금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대지역을 벗어났습니다. 살기(殺氣)가 등등했던 장소를 막 빠져 나온 것이었습니다. 제자들도 이제 겨우 안도의 한 숨을 쉬고 있는 터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또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 것입니다.

 

"유대로 다시 가자!"

 

이번에는 제자들의 원성까지 들리기 시작합니다.

 

"아니 예수님, 방금 유대인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쩌자고 다시 그 곳으로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까?"

 

도대체 예수님의 방법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자신들의 스승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나사로의 병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이틀을 더 머무신 것도 이해가 안 될 뿐만 아니라, 돌을 들어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유대지방으로 또 다시 되돌아가야겠다는 말씀도 전혀 납득이 되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의 논리는 정확한 분석입니다. 틀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이야기가 엉뚱한 것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엉뚱한 일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이해하고 싶어도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크리스천 子女 養育 지도자이며 의사인 ‘로스 캠벨’이라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50회 생신을 맞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마음으로 생일 선물로 입맞춤을 50번 해 드리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생일이 되어서 아버지에게 kiss선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한 번 두 번 받다가 열 번이 넘어가자 그만 지쳐서

 

"됐어, 됐다구!" 하면서 아들을 떼밀어 냈습니다.

그러자 그 아들은 너무나 당황하고 실망한 나머지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가 자전거를 타고 급하게 道路로 나가다가 그만 달려오던 자동차에 부딪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이 여러분의 생활에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이런 엉뚱한 두 가지 일을 통해 주님은 우리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고 싶은 것일까요? 혹시라도 어떤 중대한 目的이 있지는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모두 그것을 찾아서 은혜받고 승리하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9절과 10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지금 제자들은 그들의 위험이 유대인과 유대 지역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유대인들을 피해가기만 하면, 그리고 그 지역만 빠져 나오면 위험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열 두 시가 아니냐?"

 

이 말은 지금 시간이 낮 12時라는 말이 아닙니다. 밝은 낮 시간이 12 時間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낮 시간(밝은 시간)으로 다니기만 하면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만일 누구든지 밝은 시간에 다니기만 한다면 걸려 넘어지는 위험한 일은 만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빛이 없는 어둠 속을 다니면 정말 위험한 순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유대로 돌아가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진짜 위험은 어두움 가운데 다니는 것이라고 되돌려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진짜 위기(危機)가 무엇인지를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에게 진짜 위기란 무엇입니까? 지금 목숨을 잃을 만큼 위태로운 상태 마치 돌을 들어 치려는 유대인들에게 둘러 싸여 있거나, 사업이 금방 빚더미에 올라 파산의 순간에 다다랐거나, 들어오는 돈은 없는데 지불해야 할 청구서는 산더미처럼 쌓이는 그런 순간이 위기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진짜 위기는 빛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빛을 잃고 어둠 속을 다니는 것이 진짜 위기라는 말입니다. 빛이신 예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진짜 위기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이 바로 어두움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두움 속의 삶이 결국 우리를 넘어뜨리게 되는 실족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없이 사는 것이 진짜 넘어지는 것이며 실패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 없이 사는 것, 빛이신 예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사는 것, 이것이 진짜 위험이고, 위기이고 시련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갑자기 엉뚱한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갑자기 엉뚱한 말씀을 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 자신의 공생애를 마무리하는 이때에 제자들에게 반드시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보이는 제자들은 아직도 자기들 생각 위주로 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 없이, 빛이신 예수님께서 가르쳐 준 교훈이나 생각들은 조금도 안중에 없이, 자신들의 생각과 고집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수님의 생각보다 더 앞서 달리는 자기의 생각으로만 사는 삶은, 결국 위험한 위기의 순간을 만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신앙인의 위기는 예수를 자기 뒤에, 자기 생각 뒤에 따라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주제는 사실 제자들의 위기에 처한 연약한 믿음을 새롭게 세워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이야기입니다. 나사로 사건을 통해 제자들의 믿음의 단계를 높여주고 더 나아가 성숙하게 만드시고자하는 예수님의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셨지만 정말 유대로 가시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들어 치려는 유대인을 피하여서 가신 곳은 요단 강 저편(東편) 베레아 지역입니다. 그곳으로 가셨다가 요단강 다시 이편(西편)에 있는 베다니에서 나사로 소식을 들었습니다. 유대 지역은 베다니 아래 지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만일 유대 지역으로 가시려면 배를 타고 死海를 건너지 않는 한, 반드시 베다니를 먼저 들러야 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에게 먼저 유대로 가자고 말씀하셨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음을 알아 차려야 합니다. 아직까지 제자들은 진짜 신앙인으로 사는 것, 진짜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기 위해서

 

"유대로 다시 가자!"는 엉뚱한 듯이 보이는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유대로 다시 가자는 말씀만 듣고도 제자들의 흔들리는 믿음의 허점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다가 엉뚱한 일을 만나면 그 엉뚱한 일에는 분명히 주님의 의도가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엉뚱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일이 엉뚱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도면밀(周到綿密)한 계획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제자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예수를 믿고 산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빛 가운데 다니지 않을 때는 실족할 수밖에 없음"을 다시 알아듣게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 사건에서 "유대로 다시 가자!"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끼어 있었던 이유는 나사로 이야기와 전혀 관계없는 것 같지만 이 이야기는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나사로의 소식을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곧장 조치를 취하신 것이 아니라 이틀을 더 그 장소에 그냥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러자 아마도 제자들 사이에서는 여러 가지 이상한 이야기가 돌았을 것입니다.

"왜 가시지 않는 거지?" "무엇 때문이지?" "보잘것없는 身分의 사람이니까 나사로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닐까?" 등 등.....

 

각자 자기들의 생각에만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틀을 더 머무르시는 예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이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뜻대로 예수님께서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만을 자꾸 크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의 생각은 신앙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고 있는 것임을 주님께서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 이야기를 던지신 것입니다.

 

‘위험’ 이야기를 하면서 빛 가운데 걸어가지 않는 것, 예수 없이 자기 뜻만 강조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진짜 위험한 것임을 확인시켜 주면서 제자들의 신앙을 점검하고 싶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나사로의 이야기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서의 문제의 포인트는 내 생각이 먼저냐, 아니면 예수님의 생각이 먼저냐의 문제입니다.

 

내가 내 뜻을 먼저 이루려고 하느냐, 아니면 예수님의 뜻을 먼저 이루고 싶으냐가 신앙생활의 관건입니다.

 

다시 본문의 말씀대로 하자면

 

"빛이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빛이신 예수님의 해결 방식을 따르지 않고도 충분히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느냐, 아니면 빛이

신 예수님의 길을 내가 걷기로 결정하느냐"가

 

신앙의 진정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자, 11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여러분, 예수님이 "잠자는 나사로를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신 후 제자들의 반응을 또 한번 살펴보십시다. 12절입니다.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무슨 말입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나사로는 잠들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죽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예수님은 죽음을 잠잔다고 말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잠은 무슨 잠입니까? 이미 죽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무슨 뒤늦게 잠잔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래요, 정말 잠을 잔다면 깨어나겠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계속적인 신앙의 위기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를 자기 의견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사고방식(思考方式)과 해결방식(解決方式)이 예수님보다 앞서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빛이신 예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위기입니다.

 

여러분, 만일 예수님께서

 

"잠자는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말씀하실 때 만일

 

"잠잔다" 는 예수님의 말씀이 죽음을 이야기한 것인지 아니면 진짜 자는 잠을 가리키는 말인지 잘 모르겠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습니까?

 

그냥 "주님과 함께 우리도 가자"라고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거기에 자신의 장황한 설명이 뒤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그렇지를 못합니다. 자기 생각만을 계속해서 말합니다.

"주님, 정말 죽지 않고 잠들어 있기만 하다면야 살아 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주님도 아시다시피 지금 나사로는 이미 죽지 않았습니까? 죽었는데

어떻게, 왜 자꾸 살아있어서 그냥 잠자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하시는 방식이나 생각은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생각만 앞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은 그 분을 잠잠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앞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행동하실 때까지 오히려 가만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동하시면 우리는 뒤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에도 나의 이야기는 가능한 대로 줄이는 것입니다. 내가 뒤에 가면 됩니다. 고요히 주님의 말씀 앞에 엎드리고 있으면 됩니다. 귀를 잘 기울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갈 길이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의 기자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 도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 도다."(시편 62편 1, 5절).

 

그런데 우리는 도대체 잠잠하지를 못합니다. 나의 사설이 깁니다. 내 이야기와 내 생각이 예수님보다 앞서 가야 속이 시원합니다. 내가 참지를 못하는 거예요.

 

이틀을 더 머무르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고, 다시 유대로 돌아가시겠다는 것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내 생각에 맞지 않으면 예수님을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예수님께 맞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내 생각 안에 끌어들여 맞추어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위기입니다. 신앙인의 위기는 주님의 생각보다 내 생각이 앞서 갈 때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사로의 사건이 우리에게 살아있는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5절입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하신대."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지금까지 대화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제자들이 지금 믿음의 위기를 겪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앞서 가는 것이, 예수님 없이도 충분히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위기이거든요.

 

그런데 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위기를 맞이한 제자들을 얼마나 배려하고 계신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지금 제자들의 이러한 상태의 믿음으로 죽어있는 나사로 사건의 현장인 베다니로 간다면 예수님의 기적조차 믿지 못할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 죽음의 현장에 계시지 않은 것을 기뻐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제자들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을 확실하게 세워놓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베다니 현장에 있지 않은 것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나사로는 이미 죽어버렸음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니까 이미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다니에서 요단 동편까지 오는 길은 약 하루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소식을 들으시고 이틀을 머무신 뒤 베다니로 가셨다면 전갈을 받은 뒤 최소한 3일 이상은 지난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자마자 어쩌면 나사로는 죽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의 현장에 있지 않은 것이 기쁘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확실히 제자들이 알아야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주님의 능력을 그들이 분명하게 확신하게 될 것이기 때문 아니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제자들 자신들조차 딴 소리를 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아직 죽지 않은 자를 주님이 살려 놓은 것이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지금 그들의 신앙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자들 믿음이 이 상태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위해서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의 현장에 있지 않은 것을 기뻐하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죽어버린 나사로를 완벽한 생명으로 바꾸시는 주님의 능력을 제자들이 직접 보아야 지금 위기에 있는 제자들의 믿음이 올바르게 세워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직 죽지 않은 자를 주님이 살려 놓은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는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 한 마디만으로도 가능합니다. 구태여 요단강을 건너서 베다니로 가지 않아도 역사는 벌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15절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왜 가자고 하셨을까요? 이것도 바로 위기에 놓인 제자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말씀 한 마디로 먼 이곳에서 베다니의 나사로를 살려 놓으면 제자들이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아니라 전혀 믿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딴 사람이 고친 것일지도 모른다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거기 있지 않은 것을 기뻐하시고도,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베다니로 가셔야만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지금 신앙의 위기에 있지는 않습니까?

제자들의 믿음을 세워놓으시려는 예수님의 배려를 기대하십시오. 나사로 사건을 통해 새로운 믿음의 단계에 올라서도록 도우시는 주님을 만나십시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는 엄청난 위로를 발견합니다. 위기에 있는 제자들의 믿음을 보시고도 주님은 한 번도 꾸짖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모자라는 믿음을 전혀 나무라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잘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이 세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위기는 언제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위기는 거의 대부분 주님의 생각보다 내 생각이 앞서 갈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주님의 생각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생각을 물어 보십시오. 말씀 앞에 내 생각을 굴복시켜 보십시오. 그리고 단순하게 그 분의 음성을 먼저 들으십시오. 복잡한 해석을 달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시면 그렇게 하십시오.

 

"나사로가 잠잔다"고 말씀하시면 의심하지 말고 그런 줄로 믿으십시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의 위기가 극복될 것입니다. 나사로 사건의 이 두 번째 이야기는 신앙인들의 생활 속에서 닥칠 수 있는 위기와 극복에 대해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제자들에게 아름답게 설명하시고 가르치셔서 위기를 극복하게 하시는 주님이 여러분들 삶의 중심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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