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마리아의 香油 事件

거듭난 삶 2012. 4. 4.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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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아의 香油 事件



요한복음 12장 1절-3절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막 14:3-9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분 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 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 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미국의 CEO나 사회 저명인사들은 명함에

‘나는 ○○국회의원입니다’

‘나는 ○○회사의 회장입니다’라고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즘은 권위주의 사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인사들이 즐겨쓰는 네임카드가있는데, 사회봉사 직분을 쓴다고 합니다.

‘국제기아를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어떤 어떤 헌신을 하고 있습니다’

‘○○이란 사회단체에서 무슨무슨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등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NGO나 사회단체 등과 같은 곳에서 자원 봉사하는 사람들이 각광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할 때 기쁨으로 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헌신은 풍족하게 해야 합니다.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 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출36:5)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풍족한 헌신을 해야 합니다. 구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위대한 꿈을 가지고 풍성한 헌신을 하면 하나님께서 믿음대로 응답해주십니다.


현대의 유대인들은 유월절 축제를 가정에서 지킵니다. 그리고 유월절 축제를 무교절과 함께 묶어서 드리며, 예루살렘을 제외한 곳에서는 희생의 양도 잡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월절 밤에 축제의 시간을 보내면서 각 가정은 출애굽 이야기를 읽습니다. 옛날 그 출애굽 당시의 조상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적어 놓은 책이 있는데 이름을 유월절 "학가다"라고 합니다.


그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자손 대대로 이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마치 애굽에서 나온 것처럼 느끼고

(In each generation, every person is obliged to feel as though he or she personally came out of Egypt.)" 생각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는 것이지요. 그 옛날 선조들의 이야기이지만 각자가 개인적으로 그 사건의 主人公인 것처럼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의 사건은 자신의 것으로 느끼고 생각하지 않으면 죽은 사건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옛날에 벌써 끝나버린 사건, 이제는 그래서 별로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단순한 역사적인 사건 일뿐, 그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마리아의 香油 事件』을 여러분들 각자 자신들의 개인적인 향유 사건으로 대처해서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 속의 사건을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 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직접 이 사건의 주인공들이 되십시오. 그렇게 생각하면서 본문의 사건 속으로 함께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유월절 엿새 전이 되었습니다. 이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맞으시는 유월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유월절 절기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사건 약 일주일 전에 발생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가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아는 동네입니다.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기적의 사건의 현장이 된 동네입니다. 베다니의 생명의 기적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입니다. 그 베다니에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2절에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벌어졌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그 분이 어떤 분이십니까? 나사로를 살리신 분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가 베풀어 진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려 구원하신 일을 감사하는 잔치였던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데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건져 살리시는 구원의 사건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은 사실, 바로 내가 살아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살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살리심을 입은 나사로가 바로 우리 자신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의 삯인 사망에서 살아날 수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건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위해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만일 잔치가 벌어진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을 감사하는 잔치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에는 사실 예수님을 위한 잔치 자리가 언제나 준비되어야 하고 잔치가 벌어져야 합니다.


잔치가 한참 무르익어 갔습니다. 마르다는 여전히 봉사하기에 바쁩니다. 나사로는 예수님 곁에 앉아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잔치가 무르익어 가는 순간에 마리아가 나타납니다. 영원히 잊지 못할 한 사건의 주인공으로 마리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3절에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잔치가 무르익어 가는 순간에 마리아가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고귀하고 깨끗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습니다. 그리고는 긴 머리를 풀어헤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꿇어 엎드려서 예수님의 발을 닦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향기가 집안에 서서히 퍼져갑니다. 상상만 해도 참 멋이 있는 장면입니다.


마리아의 향유를 붓는 이 행동은 신앙인들에게 헌신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헌신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 매우 강력하고 분명한 그림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마리아의 향유 사건을 통해, 헌신하면서 사는 신앙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배우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헌신이 없는 부부 생활은 불편함이 많습니다. 서로에게 헌신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없는 부부의 삶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미국인의 보통사람들은 결혼을 하기 전에 동거 생활을 매우 자연스럽게 용납합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살아봐야 어떤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 봐야 평생을 함께 살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이유입니다. 미국뿐 아니라 구라파의 대부분 국가에서도 이 풍습은 마찬가지 인 것 같습니다.


저들은 한국의 중매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깜짝 놀라면서 함께 살아 보지도 않고 어떻게 평생 함께 살 수 있을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고 결혼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굉장히 合理的인 것 같지요? 그런데요, 한 기독교 신문의 통계를 보니까 미국인들의 결혼 전 동거인들이 결혼하지 않는 비율이 58%정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 보니까 맞지 않아서 결혼하지 않는 비율이 약 60%나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기자가 이것은 미국인들이 가정에 대한 獻身度에 문제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 신앙도 어떻게 헌신하느냐에 있습니다. 헌신 없이 신앙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헌신하는 일없이 신앙의 깊이는 생겨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의 헌신이 어떤가를 발견하고 나의 신앙의 獻身度는 어느 정도인지를 측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 제일 먼저 마리아의 헌신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3절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여러분, 헌신이라는 것은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헌신이라는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을 위해 포기할 줄 아는 것, 이것이 헌신입니다. 지극히 비싼 향유는 아마도 마리아가 가장 아끼고 있는 물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값의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대대로 가보(家寶)로 내려온 것일 가능성도 많습니다. 값으로 따진다해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 정도가 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한 사람의 일 년 연봉(年俸)에 해당하는 정도입니다.


헌신이라는 것은 하찮은 것, 없어도 별로 지장이 없는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 교회 오는 것에 헌신이 담겨 있을까요? 시간은 많은데 별로 할 일이 없어서 교회에 와서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없는 중에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와서 드릴 때 헌신의 깊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없어도 별로 지장이 없는 것으로 드리는 것을 헌신이라고 마리아는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드렸다고 평가하신 적이 있습니다.


소중하고 어쩌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드렸기 때문에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좋은 것은 나를 위해 골라 놓고, 별로 쓸모없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는 헌신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 제사장의 아들인 홉니비느하스의 불량함이었습니다. 제물로 제단에 바쳐진 소, 양들의 부위들을 갈고리로 자신이 먼저 건져냅니다. 원래 제사장들에게는 가슴 부위와 우편 뒷다리가 지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건져내고 난 다음에 남은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헌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가지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분명히 바쳤습니다. 바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서도 비슷한 예를 보게됩니다)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부위는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부위의 기름인데 이것은 동물 중에 가장 좋은 부분으로 여겨졌습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제사였습니다.


귀중한 것을 선택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주님을 위해 정돈하고 주님께 드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남는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리는 이것이 아름다운 향내가 나는 헌신입니다.



두 번째 헌신의 모습은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순전한 나드 한 근을 바쳤다는 말이 두 번째 헌신의 내용입니다. 순전하다는 말은 「깨끗한, 순수한, 섞이지 않은, 혼합되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헌신이라는 것은 나누어지지 않은 한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드린 것은 한 마음의 향유였습니다.

헌신이라는 것은 주님께만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헌신의 마음이 갈라지지 않고 한 곳으로 향하여 드려질 때 헌신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주님 외에 다른 것에 내 마음이 빼앗기지 않는 것을 헌신이라고 말합니다.


"팡세"라는 作品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블레즈 파스칼은 39세의 나이로 이 땅의 생을 마친 사람입니다. 함께 友情을 나누던 로이네르 공작(公爵) 등과 지내면서 파스칼은 상류 사교계의 즐거움에 젖어 들게 됩니다. 그러다가 1654년 31세가 되던 해에 사교계의 삶에 회의를 느끼면서 그의 신앙적인 삶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상류 사회의 안락과 쾌락의 삶에서 빠져 나오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해 11월 23일 파스칼은 영적인 깊은 체험을 합니다. 그날 받은 영적인 감흥으로 그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상류 사회와의 교제는 계속되었지만 더 이상 두 개의 가치를 쫓아다니지 않게 된 것입니다.


신앙의 삶이 시작 된지 2-3년이 지나면서 그는 기독교 변증론에 대한 저작을 10년 정도에 마칠 大作品의 집필을 시작합니다. 조금씩 생각나는 것들을 기록(2년 정도의 생각노트가 그가 죽은 후 팡세라는 이름으로 출판됩니다)을 하면서 저작을 준비하다가 1659년 심각한 질병에 걸려 그는 1662년 39세의 젊은 나이에 죽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질병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질병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Priere pour demander a Dieu le bon usage des maladies)" 라는 글을 씁니다.

그 글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건강이나 나의 질병, 나의 삶과 나의 죽음 이 모든 것을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둘째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회를 위해서 사용하소서."


파스칼은 신앙의 삶의 헌신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막 시작된 신실한 믿음의 삶에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엄청난 고통을 주시느냐고 항의할 수 도 있었겠지만, 죽음에 이를 만큼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을 겪었지만 그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한, 그 분의 구원사역을 위해서, 그리고 주님의 교회를 위한 생각만 한 것입니다.


헌신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두 개의 가치를 더 이상 쫓아다니지 않습니다. 순전합니다. 혼합되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 한 분께만 드리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 헌신입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순전한 향유가 주는 헌신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리아의 그 가장 소중한 향유, 순전한 향유를 예수님의 어디에 부었습니까?


발입니다. 다른 곳이 아닌 발입니다. 유대인들의 발은 맨발이나 다름없습니다. 샌들만 신고 다니면서 흙먼지로 더렵혀진 발이예요. 그런 발을 씻기 위해 마리아는 그렇게 소중한 향유를 부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좌-악 부으면 얼마나 멋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이면 더렵혀진 발이었을까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먼지 묻은 발에는 물만 있어도 되지 않았겠습니까? 어쩌면 물수건이면 족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구태여 값비싼 향유를 발 씻는 일에 사용한 것일까요?



여기에 세 번째 헌신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헌신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께는 발에 부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그런 마음의 고백이 있을 때 그것을 진짜 헌신이라고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헌신하면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것을 바쳐도, 아무리 많은 것을 드려도, 아무리 소중한 것을 바친다고 할지라도 주님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고

말할 수 없다면, 헌신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향유의 헌신은 헌신하면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의 발에 붓는 것조차 나에게는 지극한 영광입니다. 아니 주님의 발에 붓는 것조차 감당할 수 없습니다."


혹시 우리는 나의 것을 주님께 바치면서 이것이 대단한 것이라고 느낀다면 마리아의 향유 헌신의 수준에는 아직 턱도 없이 못 미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것은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주님의 발에 겨우 부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들의 헌신이 마리아의 헌신을 닮기를 바랍니다. 귀한 것, 많은 것을 바치면서도


"주님 너무 부족합니다."


이런 고백이 담기면 정말 하늘에 쌓는 보화가 될 것입니다.


이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다음 장면은 더 아름답고 멋진 장면입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마리아가 자신의 머리털로 향유 묻은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여인이 길게 묶은 머리를 풀어헤칩니다. 그리고 발을 닦기 시작합니다. 머리와 발...,


이것은 「내 존재의 가장 귀중한 머리일 찌라도 그것은 주님의 발에도 못 미칩니다.」고 하는 고백의 의미도 포함되어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멋진 대조가 아닙니까? 여인이 머리를 풀고 몸을 숙여 발을 닦는다는 것, 너무나 강력한 메시지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긴 머리라 하더라도 머리로 발을 닦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몸을 굽혀야 합니다. 무릎을 꿇고 자신의 몸을 굽혀야만 발을 닦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헌신이 무엇일까요? 우리를 굽히는 것입니다.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허리를 숙이지 않고는 헌신의 학교에서 배울 수가 없습니다.


내 자신의 전부를 숙이지 않고는 헌신의 깊은 우물의 물은 길어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뻣뻣하고 거들먹하게 서 있는 헌신, 내가 헌신하면서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그런 헌신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헌신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굽혀 주님께로 다가가지 않으면 아름다운 헌신은 없습니다. 바칠수록 우리는 굽혀야 합니다. 머리를 숙여 발을 닦아야 합니다.


자, 이런 마리아의 헌신이 이루어지자 그 마지막이 어떻게 되었다고 말합니까?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이런 헌신이 있어야 냄새가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향유 냄새가 나는 가정이 되고 사회와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향수가 풍기는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런 헌신이 있어야 진짜 우리 가정을 바꾸는 향유 내음, 진짜 우리 교회의 영적인 흐름을 아름답게 흐를 수 있도록 만드는 향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마리아의 향유 내음이 있습니까? 우리들의 가정과 교회에 마리아의 이 향기로 가득 차게 되는 은혜가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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