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해현·문화부 차장
시인 김지하와 소설가 황석영은 70년대 이후 한국문학에서 진보진영을 대표하고, 일산 신도시에 함께 산다. 하지만 문단의 '양대 구라'로 통하는 두 사람이 평소 일산에서 살갑게 따로 회동한 적은 없는데, 최근 오래간만에 한목소리를 냈다.
이명박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방문에 동행한 황석영이 "MB정부는 실용중도"라고 했다가 운동권에서 변절자라는 욕을 먹자, 김지하가 "작가의 입에서 족쇄를 풀어라"며 변호하고 나섰다. 김지하는 한 인터넷 논객으로부터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라고 조롱당했다.
침묵하라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황석영은 블로그에 자신의 발언을 해명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 다음 날 후배 문인들과 저녁식사를 한 황석영은 "지하 형이 고맙다"고 말했다. "나는 그동안 부잣집 막내아들처럼 사랑만 받고 살았다. 이제 욕도 먹으면서 살아야지"라며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황석영의 한반도와 유라시아 연합 구상에 앞서 김지하는 몇 해 전 유라시아 여행을 통해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상징하는 상생의 공간으로서 고조선 시대의 '신시(神市)' 정신이 중앙아시아 국가의 시장에 아직도 남아있다고 감탄한 적이 있다. 지난 95년 김지하는 교도소에 수감 중인 황석영을 찾아가 90분 동안 '동아시아 문화론'을 놓고 대담을 벌였다. 황석영이 "요즘 우리의 민담과 전설에 등장하는 도깨비에 관해 연구 중"이라고 하자 김지하는 "원래 동북아의 원류는 유교가 괴력난신이라고 했던 도깨비와 같은 오랑캐문화와 풍류도(風流道)"라고 설파했다.
그 이후 김지하는 생명사상과 후천개벽사상을 더 다듬고 한국의 전통사상을 21세기의 새로운 사상으로 재창조하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황석영은 출옥 이후 10여 권의 책을 펴내는 저력을 과시하면서 "감옥 갔다 와서 성실해졌다. 대한민국 교도행정의 승리"라고 했다.
현재 황석영은 서울 강남이 70년대 이후 한국형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개발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소설 '강남형성사'(가제)를 구상 중이다. 그는 블로그에 글을 발표한 다음 날 후배들과 만난 자리에서 계급을 보는 문학의 시야 확대를 강조했다. 그는 "전태일이 있다면 그를 고용했던 사장의 이야기는 왜 아무도 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몇 해 전 TV에서 강남에 살고 있는 그 사장을 찾아내 당시 전태일 분신에 대해 물어봤더니,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던 사장이 '그때 애들한테 좀더 잘해줄걸'이라며 눈물을 흘리더라. 문학이 이런 이야기도 담아야 한다."
김지하는 최근 신작 시집 '못난 시들'을 펴내면서 촛불 시위를 폭력 시위로 변질시킨 좌파 운동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산문집 '촛불, 횃불, 숯불'도 함께 냈다. 운동권이 순진한 청소년들의 촛불을 '제 고기 구워먹는 숯불'로 이용했고, '화적떼가 들던 횃불'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김지하와 황석영은 70년대 민중문학의 최전선에 섰지만, 이제 민중문학이란 말 자체가 사라진 지 오래됐다. 그런데도 두 사람을 '변절자' '미친놈'이라고 규탄하는 세력이 있다.
그들은 오늘의 상황을 민주주의의 후퇴로 규정하고 정권타도를 선동한다. 70년대 민중문학의 거장들이 21세기의 변화에 맞는 문학적 갱신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지만, 아직도 70년대식 사고방식으로 진보를 외치는 '수구' 세력은 우리 사회의 혼란과 분열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른바 진보 내 '수구' 세력은 예술가의 발언 자유마저 억압하는 퇴행증세도 보인다.
최근 황석영은 젊은 시절에 읽었던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집 '결혼·여름'을 기억 속에서 되살린다고 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오직 내 몸 전체로 살고 내 마음 전체로 증언하면 된다. 예술 작품은 그 뒤에 올 것이다. 거기에 바로 자유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