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한복음 6장 60절-71절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동물들은 자신의 배고픔이나 적으로부터의 공격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TV에서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방영된 것은 The Cheetah Family였습니다. 치타는 맹수들 중에서는 몸집이 좀 작은 편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자나 호랑이들은 주로 커다란 들소나 얼룩말 등 몸집이 큰 것을 공격하는데 비해서 치타는 주로 몸집이 작은 새끼들을 공격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날은 치타가 어린 영양(gazelle)을 공격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치타가 새끼 영양을 공격하는 것을 보니까 50야드(시정거리)까지는 살금살금 눈치 채지 못하게 다가갑니다. 그리고는 사정거리가 되자 전 속력으로 질주하는데 속도가 약 시속 72마일이나 된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그렇게 빨리 공격해오는 치타를 순간적으로 느낀 어린 영양이 도망을 가기 시작하는데 얼마나 빠르게 대처하는지도 놀랄 정도였습니다.
시속 72마일로 달리는 치타에게 어린 영양은 모두 다 잡힐 것 같았는데 어떤 경우는 그렇게 빠른 치타가 어린 영양을 잡지 못하고 놓치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동물들에게서 발견한 것은 자신이 배가 부르면 자기의 먹이 꺼리를 눈앞에 두고도 전혀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냥 함께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배가 고파지면 맹수로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배가 고플 때에만 매우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어떤 것에 민감합니까?
사람들은 영적인 동물입니다. 아무리 다른 점을 강조한다고 해도 우리 인간이 가진 영적인 요소가 다른 동물들과 가장 분명하게 구별되는 요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것은 우리들이 영적인 문제에는 왠지 어둡다는 사실입니다.
민감하지를 못합니다. 영적이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동물과 같이 눈빛이 달라질 만큼 빠르지만 영적인 것에는 둔감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떡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 때부터 예수님의 관심은 영원한 배부름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육신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만이 예수님의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관심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주께서 강조를 하셨어도 선뜻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60절을 보면 제자중의 여러 사람들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 사용된 어렵다(스클레로스)는 말은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수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관심이 영적인 것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금 당장 떡을 먹고 배부르게 되는 것이 그들의 관심이었습니다.
영원한 배부름은 그들이 바라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현주소입니다.
지금 당장 먹을 것이 넉넉하고 육신의 배가 부르다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느냐는 그들의 반응이 바로 오늘 날, 우리들의 반응일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말을 수없이 반복해서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순전하게 순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생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말씀에 단순하게 순복하지 않고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관심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리고 관심에 따라 아는 것과 배우는 것이 달라집니다.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떤 골프장이 좋은지, 어떤 골프채가 좋은지에 민감합니다.
이목사와 같이 골동품 수집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여행 중이라도 중고, 고물상품을 판매하는 지역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를 못합니다. 그런 고장을 가게되면 그곳에서의 특징적 골동품들에 대해서 흥미를 갖고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그들의 관심거리를 서로 이야기하면 재빠르게 반응을 합니다. 이해가 빨리 됩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관심 밖의 일이면 아무리 이야기해도 빨리 납득이 가지를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영적인 떡, 생명의 떡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지속적이었습니다.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강조하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따르는 무리들의 반응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들을 수용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렵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을 쓰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61절 후반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이 땅의 떡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먹을 것을 던져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먹고 배부른 것만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마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63절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참으로 우리가 산다는 것은 영의 문제입니다.
절대로 육의 문제로는 정말 사는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 육신을 가지고는 아무리 잘 살아도 이백년 삼백년을 살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인생의 전부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잘 살면 되지 그 이상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면서 이 땅의 삶에만 집중합니다. 그러면서 큰 소리를 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사는 것만으로 마지막이라면 우리가 동물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동물처럼 배부르게 먹고 살고, 모자라면 맹수처럼 연약한 것들을 공격하면서 살면 될 것이지 고민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인생은 그런 것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인 보장을 해주거나, 육신적인 배부름을 만족시켜주는 곳만으로 전락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곳입니다.
아니 생명을 경험하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떡 때문에 찾아옵니다.
불치의 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가르치고 교훈하는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려주는데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결론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살펴보십시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 나와야 영생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6장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이 결론은 드디어 우리를 결단의 순간으로 몰고 갑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옛날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경험했던 하나님께서 매일 내려 주시던 만나의 사건으로 재현될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을 무리들이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정했습니다. 66절에,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어떻게 결정했습니까?
따르던 무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물러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떡 때문에 교회를 찾아옵니다.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교회를 찾습니다.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서 교회를 찾아옵니다.
물론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시작하는 신앙의 발걸음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의 시작인 오병이어의 사건도 바로 육신의 떡의 문제에 관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떡의 문제로 끝날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결론입니다.
떡 때문에 시작한 발걸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발걸음이 거기서 머물러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육신을 배부르게 하는 떡의 문제는 영원토록 살게 하는 떡의 문제로 발전해야 합니다.
살리는 것은 육이 아닙니다. 살리는 것은 육신의 배부름이 아니라 영혼의 배부름이라는 점을 놓친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헛것입니다.
청계천 판자촌에서 빈민 교회의 사역을 하였고 그리고 지금은 그들을 데리고 경기도 남양만에서 사역하시는 김진홍 목사님의 빈민들을 위한 목회사역의 경험 중 결론으로 말하기를
‘떡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몹시도 가난했던 그들에게 돈을 주고, 먹을 것을 주고, 일할 수 있도록 리어커를 사주어도 사람은 바꾸어놓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떡 없이도 안 되지만, 떡만 가지고는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떡만 가지고 된다면 돈의 문제일 것입니다. 돈만 있으면, 무한정의 데나리온만 있으면 무제한으로 떡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떡과 돈의 문제로 영원한 생명을 살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배고픔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생각들을 합니다. 돈이 없어서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 문제가 아닙니다. 영생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눅 16: 19-31에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어느 트럭 운전사의 마지막 편지"라는 글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알래스카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화물을 운송하는 한 트럭 운전자가 알래스카에서는 죽음의 산이라고 불리는 Steamboat Mountain을 넘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절벽이 도로 옆에 도사리고 있는 산이었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운전자가 심한 폭설로 인해 절벽 아래로 떨어졌고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살아있는 몇 시간 동안의 상황을 기록한 편지입니다.
이렇게 시작됩니다.
『 "사랑하는 아내에게.
어떤 남자도 이런 편지를 쓰고 싶진 않을 것이요. 그래도 나는 지금까지 수없이 잊어버리고 하지 못한 말들을 이제나마 할 수 있으니 참으로 행운아라고 할 수 있소.
당신을 사랑하오.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오.
당신은 내가 당신보다 트럭을 더 사랑한다고 날 놀리곤 했소.
내가 트럭과 더 많은 시간을 동거하며 지낸다고 말이오....
친구들과 앉아서 커피를 마실 때도 나는 언제나 내 트럭, 내 장비, 내가 내는 할부금 등에 관해서 말했소.
비록 당신이 나와 함께 조수석에 타고 있진 않았지만 당신이 나의 영원한 동업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소...
이제 나는 당신이 나를 위해 포기한 모든 것들을 생각하오.
옷, 휴가, 파티, 친구들과의 모임...
당신은 한 번도 불평을 하지 않았고 난 그런 당신에게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없소...
나는 지금 그동안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숱한 기념일들과 생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소.
내가 길 위에 있었기 때문에 당신 혼자서 가야만 했던 아이들의 학교 학예회와 아이들 하키 경기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소.
내가 어디쯤에 있고 일들은 잘 되고 있을까를 생각하면 당신 혼자서 보낸 그 숱한 외로운 밤들에 대해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소.
당신에게 매번 전화를 걸어 단순히 목소리를 듣고 안부를 물을까 생각했지만 무슨 이유들 때문에 난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었소...
당신은 지금 수백 킬로 떨어진 곳에 지금 있지만 당신이 이곳에 나와 함께 있음을 느낄 수 있소.
난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있고, 당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소.
하지만 나는 마지막 달리기를 혼자 끝마쳐야 하는 것이 겁이 나오.
아이들에게 내가 세상의 누구보다도 사랑한다고 전해 주시오.
시간이 다 되었다는 것을 느껴요.
당신을 사랑하오.
당신 혼자서 살아갈 날들이 걱정되요.
내가 이 생에서 어떤 것보다 더 많이 당신을 사랑했음을 항상 기억해주시오.
난 단지 그걸 말하는 것을 잊고 있었을 뿐이오.
당신을 사랑하는 빌." 』
돈보다도 중요한 것들은 너무 많습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떡, 양식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놓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그렇습니다. 떡만 가지고는 살 수 없습니다. 밥만 먹어서는 살 수 없습니다.
물론 밥도 먹어야지요, 그래야 살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결론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을 놓치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참된 의미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많은 사람들이 물러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구절입니다. 자꾸만 나 자신에게도 맴도는 말씀입니다.
여러분과 내가 바로 이런 무리에 속하지는 않으십니까?
육신의 배부름이 만족되지 않으면 물러가 버리고 마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내 외로움의 문제가 충족되지 않으면 떠나가 버립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상처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혹시 우리들은 수년동안 고통스럽게 투병해야 하는 아픔과, 기도의 문을 열자마자 내어 놓는 자녀와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더 이상 주님과 함께 다니기를 포기하지는 않으셨습니까?
바로 이런 고통의 순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67절입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주님이 지금 여러분에게 물으십니다.
“아무게 ◯◯◯야, 너도 가겠느냐?”
더 이상 목마름과 배부름의 문제가 이제 눈앞에 나타날 가능성이 없어진 이 자리를 이제 완전히 떠나겠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엄숙한 질문입니다. 우리에게 자꾸만 맴도는 질문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한 것과 동일한 고백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베드로는 너무도 정확하게 깨달았습니다.
떡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혹 또 다시 배고픔의 문제가 제기된다 하더라도
"영생의 말씀"이 당신께 있지 않느냐는 되물음, 그렇기에 어찌 주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갈 수 있겠냐는 엄청난 고백을 베드로가 한 것입니다.
너무도 부러운 그리고 신뢰할 만한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떡의 문제에만 매달려 있을 때가 많습니다. 떡의 문제 때문에 영생의 말씀의 문제를 놓쳐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고백하기를 원합니까?
"주님, 떡이 아니어도 영원하신 생명의 말씀이 주님께 있기에 우리는 주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다니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모두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백도 아닙니다.
이것은 엄청난 고백입니다. 그리고 엄청난 은혜의 산물입니다.
많이 듣고 배운다고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까?
덜 배워서 그렇습니까?
욕심 때문에 죄를 짓습니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지르는 죄악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배우고 익힌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12제자중의 한 사람인 가롯 유다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덜 받아서 예수님을 떠났습니까?
예수님의 교훈이 부족해서 주님을 팔기로 결정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배움으로 말하자면 그보다 더 명석하게 배운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베드로 같은 고백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것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배웠다고 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많다고 더 잘 고백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배우지 못했어도, 그저 투박한 어부출신이어도 그렇게 정확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이리까?”
잘 배운 것이 자랑이 아닙니다.
잘 난 것도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뿐만 아닙니다. 못 배운 것이 부끄러움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 사랑을 더 잘 고백하는 것이 자랑입니다. 더 큰 기쁨입니다. 더 영광입니다.
장애자 신앙인 송명희씨의 신앙 글을 들어보십시오.
『 나의 앞에 계신 주님
나의 눈동자에 주 있게 하소서.
나의 머리 위에 계신 주님
나의 머리들어 주 바라보게 하소서.
나의 좌우 옆에 계신 주님
나와 동행하시는 주 알게 하소서.
나의 뒤에 계신 주님
나를 안으시며 보호하시는 주 의지하게 하소서.』
여러분, 세상에는 육신만 배부르게 하는 떡이 없어지면 주님으로부터 물러가서 다시는 함께 다니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눈 뜰 수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앞에 계신 주님, 내 비록 주님을 잘 바라볼 수는 없어도 나의 눈동자에 주님 있게 해 주옵소서."
제대로 걸어 다니지 못하는 사람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를 안으시며 보호하시는 주님, 내가 걷지 못하기 때문에 안아주시는 주님, 내가 주님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육신의 떡은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배부르게 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육적인 것들은 무익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육신의 떡 때문에 주님께로 향한 발걸음이 처음 시작되었다고 해도 그것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베드로의 고백으로까지 나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당신도 이런 고백을 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과 함께 다니십시오. 더욱 폭 넓은 신앙의 교류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시편 1 :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에덴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덕을 세우는 성도 (0) | 2016.05.22 |
---|---|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0) | 2016.05.08 |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0) | 2016.04.24 |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0) | 2016.04.10 |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0) | 2016.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