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거듭난 삶 2016. 5. 8.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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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7:11-17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관에 손을 대시니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 하더라.

 

 

서론

 

청년은 젊다는 말입니다. 젊으니까 청년입니다. 따라서 청년은 젊다는 것만으로도 천재적입니다.

 

정말 젊음은 싱싱한 꽃이요 그윽한 향기요 달콤한 열매입니다. 힘이요 능력이요 자랑이요 훈장입니다.

 

그래서 시인 "바이런" "젊음의 시절은 영광의 시절이다"라고 했고

"괴테"(Goethe) "젊음은 생명의 빛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소개된 청년에게는 생명이 없으니 죽었다는 말입니다.

죽은 청년에게서 바랄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생명이 없는 청년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도 없고 믿을 만한 것도 없습니다. 소망은 산산이 부서졌고 만사가 끝장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나인이라는 조그만 마을을 지나가시다가 장래 행렬과 마주 치셨습니다.

 

으레 그렇듯이 장례 행렬은 구슬프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특히 장례 행렬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옷은 풀어져 내리고 맨발로 애곡하며 뒤따르는 여인 때문에 더욱 예수님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나인성 동네 근처에는 공동묘지가 있어서 장례 행렬은 그리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으니 슬퍼하는 여인의 모습은 너무도 애처로웠습니다.

 

과부의 외아들이 죽은 것임을 확인한 예수님께서는 관에 가까이 오셔서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어 우렁찬 목소리로 명령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과부의 아들이 관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말도 하였습니다. 죽은 시체가 살아난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내용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주님이 계신 곳에는 슬픔이 물러납니다.

나인성 성문 밖에 장례식 행렬이 지나갑니다.

상여군의 만가(挽歌) 소리와 함께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고 묵묵히 북망산을 향해 올라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동정하지 않을 없는 비참한 광경입니다. 더구나 죽어서는 사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외아들이었고 어미는 과부였으며 외아들은 젊은 청년으로서 명을 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100 천수를 다하고 죽어도 인간의 죽음은 슬픔을 주는데 꽃봉오리가 피워보지도 못하고 죽어갔으니 사회와 국가에 슬픔이 아니었겠습니까?

 

과부는 이제 독자(獨子) 죽었으니 앞으로 누구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목놓아 통곡하는 과부 어머니의 울음이 산천을 울렸습니다.

 

죽은 아들을 실어 떠메고 나인성 밖을 나와 공동묘지로 가는 상여 옆에서

 

과부는 서러움에 흐느끼며 염치도 체면도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여체를 부여잡고 끌려가면서 자식의 죽음 앞에 몸부림치며 울었습니다.

 

광경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을 향하여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부드러우며 사랑스러운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오늘 시간, 우리들도 주님의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음성을 듣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외아들을 잃어버린 과부의 심정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심령이 죄로 말미암아 마비되고 송장이 되어 북망산(北邙山) 향하여 가고 있음을 생각하여 울어보자는 말입니다.

안타까운 몸부림과 울부짖음을 통하여서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있을 것이며 울지 말라고 하시는 위로를 주실 믿어 봅시다.

 

상여는 멈추었습니다. 북망산으로 가는 죽어버린 송장을 향해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청년아 일어나라! 하시며 죽었다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셨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건의 교훈은 슬픈 과부에게도 주님이 오시면 슬픔이 위로가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분만 맞아 모시기만 하면 어디든지 기쁨이요 축복과 기적이 나타나서 비극에서 환희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주님을 맞아 모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가정, 심령에,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2. 청년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땅위에 계실 죽었던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하나는 나사로( 11:43),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었고,

그리고 본문 나인 동네 과부의 아들이었습니다.

 

한데 이들 모두가 청년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들 청년을 살리신 것은 청년은 죽어서는 아니 되고 일어나야 함을 교훈해 주고 계십니다.

 

 

1) 병든 청년이 일어나야합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가의 33 병자( 5:5-8) 향하여 일어나라! 하셨습니다.

 

가버나움의 중풍병자( 2:1-12)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인성 과부의 독자 청년도 관속에서 이적의 축복을 만날 있었습니다.

 

생각하면 인생은 근본적으로 병자 인생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 말입니다( 3:10).

 

때문에 이사야도 인생은 누구나 만신창이 되었다( 1:5-6)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손은 치유하시는 능력의 손입니다.

특별히 심령이 병든 청년을 향하여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잠든 청년이 일어나야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지 않고 잠든 제자들을 향하여 일어나라" 하셨습니다( 26:36-46).

 

이사야도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51:17)라고 했고,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60:1) 했습니다.

 

사단이 활동하는 시간은 인생이 졸고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3) 지성(知性)으로 일어나라

 

물론 아는 것이 힘입니다. 그것은 청년의 장점이요 기백이요 능력이 됩니다.

 

바울도 일어나 발로 서라( 26:16) 했습니다.

 

그러나 지성의 빛깔은 항상 회색입니다. 그것은 결코 만능이 아닙니다. 휴지장이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아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12:1),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 1:7)이요 너의 보배( 33:6)임을 알아야 것입니다.

 

 

4) 의지(意志) 일어나라

 

젊은이는 감정을 자랑합니다. 물론 이것이 있어야 () 읊습니다. 애가(哀歌) 부르고 예술을 엮습니다.

 

그러나 하루에도 열두 변하는 것이 인정(人情)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감정은 속이고 배반하고 미워하고 토라지기가 일쑤입니다.

 

때문에 젊은이는 의지를 자랑합니다. 물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의지에 비하여 강철 의지, 오뚝이 의지, 젊은 독수리 의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작심삼일(作心三日)입니다. 의지는 강철도 못되고 무쇠도 못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젊은이가 ( 40:31) 얻을 있습니다.

 

5) 신앙(信仰)으로 일어나라

 

인생은 괴로움이다 말한 석가모니의 철리(哲理) 심오합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너무 어두워서 정이 쏠리질 않습니다.

 

"마호멛" 너무도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칼과 피의 예언자입니다. 때문에 같이 살기는 무섭습니다.

 

"프랜시스" 성자요 시인입니다. 그러나 그는 종종 신경질을 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그는 영원히 다정하신 친구가 되시는 것입니다.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3. 청년은 자기 어미를 울리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효자가 누구냐 하면 부모보다 일찍 죽는 자입니다(물론 예수님 같은 경우는 다르지만).

 

그런데 성경에도 그런 불효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1)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애비를 울렸고(삼하 15:30),

부친의 후궁들을 간통했고(삼하 16:22), 결국 상수리나무에 매달려 죽었습니다(삼하 18:9).

 

다윗은 울면서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좋을뻔 하였다(삼하 18:33) 하였습니다.

(2) 아담의 아들 가인이 동생을 죽이는 살인을 했습니다( 4:8).

 

(3)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애곡하였습니다.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울었습니다( 37:33-36).

 

본문으로 돌아가서 독자가 생명을 잃었을 어미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가 남편이 없으니 슬픔이 더욱 컸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과부의 괴로움과 슬픔을 같은 마음으로 느끼시며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여인에 대해 연민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히려 사람들보다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에 일어난 죽음의 사실을 보고 슬퍼하지만 주님께서는 죄로 인해 죽음의 올무에 걸려 있는 비극적인 인간의 본질적 아픔을 보시고 아파하셨던 것입니다.

눈앞에 벌어진 죽음 속에는 영벌에 처해져 지옥 불에 던져지는 인간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에 기간 동안 인간들의 아픔에 함께 고통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이적을 베푸시는 있어서 백성들의 불쌍한 처지에 대한 연민이 직접적인 동기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14:14 15:32 20:34).

 

주님께서는 굶주려 고통받는 백성들에 대한 연민으로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푸셨고, 병들어 고생하는 불쌍한 사람들에게도 이적을 베풀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같은 의미에서 울부짖는 여인을 보시고 그의 아들을 살려 주신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자녀의 구원을 위해 기도합니까?

눈물을 보여 줍니까?

 

자녀들이 주님께로 돌아와 영이 살고 구원을 얻게 것입니다.

 

 

4. 주님의 자체의 동정심을 있습니다.

 

주님은 청년이 죽은 것에 대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1) 육신의 질병에 대한 동정심입니다.

 

주님은 문둥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보고 민망히(불쌍히) 여겼습니다( 1:41). 또한 소경을 보실 불쌍히 여겼습니다( 20:32-34).

귀신에게 자식을 빼앗겨 버린 아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고( 9:22),

그리고 무리들이 허기와 굶주림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고( 14:14; 15:32), 주님은 또한 부채를 짊어지고 죽음의 경지를 만난 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18:21-35).

이와 같이 주님은 때로 인간들의 동태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실 때에는 형편 따라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2) 생명적인 동정입니다.

나인성 과부가 만난 비극적 참상을 주님은 직접 목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죽음이란 원수 앞에 보옥(寶玉)같은 아들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녀는 공동묘지로 운반되고 있는 아들의 시체가 담긴 상여를 붙잡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죽음이란 실존의 괴물 앞에 인생의 허무를 통감하면서 비통해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했습니다(13).

 

이는 생명적인 동정입니다. 차원적인 동정입니다. 죽음이란 정체를 바로 인식한 자만이 가지는 동정입니다.

 

주님은 자식을 죽음에게 빼앗긴 나인성 과부의 마음에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아들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힘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생명이 불쌍히 여김(동정)으로 불타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침내 주님의 동정은 죽은 청년을 향하여 부활을 호출하고 말았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느니 일어나라.( 7-13-14)

 

결과는 엄청난 생명의 환희가 오고 말았습니다.

청년은 일어나 앉았고 말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청년을 어머니에게 되돌려 주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건물은 크게 짓고 문화 기구를 설비하고 많은 사업을 전개함도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 좋은 바쁘고 귀중한 일은 불쌍히 여기는 예수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향하여 불쌍히 여기는 예수의 가슴을 가지는 일입니다.

이것은 언제 어디서 누구나 있는 일입니다.

 

문둥이에게 치유를,

소경에게 빛을,

가난한 자에게 구제를,

목마른 자에게 물을,

배고픈 사람에게 사랑의 따뜻한 조각의 빵을 공급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같은 일을 하기를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5. 예수님은 생과 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의 일생에 있어 가장 기쁘고 참된 의미의 삶을 맛볼 있었던 사건은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변화되었던 것처럼,

예수님과의 만남은 곧바로 인생의 지침을 돌려놓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는 한마디의 간청도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과의 만남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만남은 분명 새로운 삶에의 의미를 부여해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통해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 수고가 무엇인지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르짖는 수양이나 도덕이나 윤리 등은 모두 결국은 죽은 청년을 위해 관의 뚜껑을 만드는 수고 뿐이었습니다.

 

소년 감화원, 소년원, 교도소 모든 법들은 죽은 송장을 치우기 위해 상여를 준비하는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청년아 일어나라고 외쳐도 헛수고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사하고 도대체 우리 인간이 언제 조그만 벌레 마리라도 만들어 일이 있습니까?

살려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나무 잎사귀 장이나 머리카락 가닥을 만들어 있습니까?

 

인간의 인지가 극도로 발달해도 죽은 생명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이제 죽은 나인성 과부의 독자 청년을 살리는 방법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본질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생명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접촉하기 전에는 결코 죽은 생명이 살지 못합니다.

 

썩은 냄새가 나는 청년을 위해 이리 나오라 외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접촉하지 아니하면 결코 생명이 다시 살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청년을 살리는 길은 청년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우리의 일은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접근하도록 매어 놓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외치시는 청년아 일어나라는 음성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6. 부활의 종교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급보를 받고 주님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회당장의 딸이 죽고 후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상 예수님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고 체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회당장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집은 통곡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장면을 보신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헌화하며 우느냐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고 자에게 이르시기를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였습니다. 소녀는 일어나서 걷게 되었습니다.

 

나인성에 살던 외로운 과부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죽음 앞에 슬퍼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청년아 일어나라 하시니 살아났습니다. 청년은 다시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이는 놀라운 부활인 것입니다.

 

죽은 이미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 도착하신 주님을 보십시오. 그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불렸습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배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11:17-44).

 

신비한 부활 기운이 베다니를 흥분케 하고 말았습니다.

나사로는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래야 주님을 만나고 베다니를 즐겁게 있기 때문입니다.

 

욥바 동리에 선행과 구제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던 다비다(드로가)라는 여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죽음을 만났을 그의 사랑을 받았던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였습니다. 저들은 사도 베드로에게 일을 고하고 청했습니다.

 

베드로는 다락방에서 사람을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기를

 

"다비다야 일어나라" 했습니다. 이에 죽었던 다비다가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9:36-43).

 

다비다는 살아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녀의 선행이 계속되겠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송장, 누워 있는 사람, 묻힌 사람, 썩는 사람을 향하여 일어나라! 명령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종교입니다. 살았으나 죽은 자가 부활해야 합니다( 3:36; 18:20; 딤전 5:6).

 

 

7. 청년은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아깝게 청년이 죽었습니다.

우리의 청년시절은 한번 지나가고 끝납니다. 이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6:13) 말하셨습니다.

 

청년은 일어서야 합니다. 꿈이 있어야 합니다. 일해야 합니다.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15절에 죽었던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고 했습니다.

 

16절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간증이 나옵니다.

 

나인성의 어느 과부의 아들의 죽음이 나인성을 온통 슬픔을 도시로 만들었으나,

죽었던 청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능력 있는 사람으로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모든 나인성을 기쁨과 승리의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다시 살아나서 성도와 교회와 기쁨을 있는 축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을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내가 살면 내영이 살고 전체가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영이 죽고 전체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나인성 청년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여러분들께서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청년기는 인생의 시발점이지 결코 종착점이 아닙니다.

청년은 인생의 비완성품이지 완성품이 결코 아닙니다.

 

"나폴레옹" 젊은 청소년 시절에 세계 제일, 천하 제일을 목표로 부단히 노력했다고 합니다.

 

"카리온 프랜시스 자비엘" 청년 자기가 반드시 세계 일등의 학자가 되어 보겠다고 노력했습니다.

 

"에디슨" 천재란 1% 영감과 99% 땀의 노력으로 된다 하며 청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청년은 귀합니다.

청년이 죽자 주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어머니는 슬퍼하였습니다. 나인성이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 청년의 죽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아니하시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인아 울지 말라 청년아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명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음성을 들어 모두 깨어 일어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결론

 

주님이 이르시기 전의 나인성은 비극이었습니다. 하나 주님이 오시고 후에는 환희의 마을이 되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죽었다가 살아난 청년의 어머니는 누구도 그의 비감(悲感) 해결할 수가 없으나 주님은 그에게 비통함을 해결해 주시었습니다.

 

성도들이여! 우리도 주님을 영접합시다.

그러면 나의 소원들이 이루 놀랍게 변화되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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