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말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거듭난 삶 2016. 9. 9.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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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째 제자들

 

: [ 1:35-42]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십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1:35]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요한의 증거 바로 뒤에 이어지는 본절 이하에서는 예수와 제자들 간의 대면이 소개된다.

 

예수의 제자들은 주로 침례 요한의 증거를 토대로 예수를 따랐던 자들이다.

 

저자 사도 요한은 침례 요한이 예수를 증거했던 사건과 예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는 사건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어 계속되는 일련의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부분에서는 침례 요한의 예비 진술에 관해 다루고(19-34)

둘째 부분에서는 예수와 제자들과의 초기 만남에 관해 다루었으며(35-51)

셋째 부분에서는 예수의 능력을 보여주고 동시에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준 이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 (2:1-11).

 

자기 제자 사람 - 여기서 사람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다(40).

 

그러면 익명의 제자는 누구인가?

19-34절의 생생한 필치로 미루어 ,

그는 당시 침례 요한의 제자로서 침례 요한과 사두개인들과의 논쟁과 침례 요한의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 증언을 목격한 자였음이 분명하다.

 

또한 본서가 사도 요한의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기에 인색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익명의 제자는 바로 사도 요한 자신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침례 요한의 주요 메시지가 하나님의 어린양을 증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의 () 관심은 예수께 집중되었을 것이다.

 

 

 

[ 1: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바로 하루 전의 증언을 반복함으로써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침례 요한은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확인시킨다. 제자들 역시 어제 일어났던 제반 상황과 요한의 증언을 상기했을 것이다.

 

요한이 그의 제자에게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한 것은 그들을 예수에게로 보내고자 함이었다.

 

이는 그리스도 앞에서 겸손해진 침례 요한의 신앙자세를 나타낸다.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 1:37]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 '듣고'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는 뜻이다.

 

( 4:24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받으리니;

 

요일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그리스도의 말씀(복음) 듣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임이며, 구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러한 '들음' 수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까지 내포하고 있다.

 

(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따라서 요한의 제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듣고 말에 순종하여 예수를 따랐다는 뜻이다.

 

예수를 좇거늘 - 말씀을 들음은 순종을 동반했다.

 

'좇거늘' 원래 지적, 종교적, 도덕적인 입장을 받아들이고 추종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용어는 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1: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8:19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19:27-28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6: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리스도를 '좇음'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전적인 헌신을 동반한다.

 

따라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구원 뿐만 아니라

 

(8:12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고난에 까지도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본문에서,

 

침례 요한의 제자들은 잠정적인 탐색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예수와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결단의 주사위를 던진 것이다.

 

특히 우리는 장면에서 진리의 실체이신 예수께로 자신의 제자들을 흔쾌히 인도하는 침례 요한의 거인적(巨人的) 면모를 엿볼 있다.

 

 

 

[ 1:38] 예수께서 돌이켜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무엇을 구하느냐 - 여기에서 '구하느냐' '찾아 다니다', '구하다'라는 뜻이며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 구해야 것을 의미하는 동사로서,

 

( 17: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구원에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 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일백 마리가 있는데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9:10 인자의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따라서 예수의 질문은 '너희가 궁극적으로 찾아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이다.

 

이는 요한의 제자가 예수를 따르는 동기를 확고히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본서에서 예수의 말씀으로서는 최초로 나오는 문장은 죄악 세상이 참으로 구해야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궁극적인 가치와 숨겨진 보화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아버지께로 좇아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것이라).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의 소중함을 깨닫는 자들은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보화를 것이다.

 

(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팔아 밭을 샀느니라).

 

랍비여 - '랍비' '나의 존경하는 '이란 뜻을 지닌 아람어이다.

 

초기 유대교에서 부터 용어는

 

(1)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상급자를 지칭하거나

(2) 제자들이 선생을 칭할때 사용되었다.

 

그후 B.C. 2세기경부터 용어는 제자들이 선생을 공손히 부를 때에만 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용어는 복음서에만 나온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서기관들을 비난하기 위해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반해서

 

( 23: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나 유다가 예수를 부르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 9: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11: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14:45 이에 와서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본문에서 칭호는 침례 요한의 제자들의 단호한 결단과 아울러 그들의 영적 제한성(制限性) 함께 시사한다.

 

(1) 먼저 칭호는 그들이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어디든지 따르겠노라고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참조 : (37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2) 그러나 그들은 아직 예수의 신분이나 행하고자 하시는 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이다.

 

바로 앞에서 사람은 침례 요한으로부터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29)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34)이시라는 말을 들었지만,

 

진정 그들의 마음속에 신앙 고백적 차원의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에 스승을 일컫는 정중한 어투인 '랍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계시오니이까 - 헬라어 '푸 메네이스' 문구는 '랍비'라는 호칭과 함께 사용되었던 유대인의 관용적 표현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 교사들에게 대화를 요청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제자의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며 또한 겸손하게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번역하면 - '번역하다', '해석하다'라는 뜻의 용어는 그리이스의 신들 중에서 변론(辯論) 전령(傳令) 신인 '헤르메스'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또는 신약성경은 같은 의미인 '메데르메뉴오'라는 표현도 사용하며, 개역 성경에서는 용어를 모두 '번역하면' 또는 '번역한즉'이라고 옮겼다.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에 1( 1:23),

마가복음에 3( 5:41;15:22, 34),

요한복음에 4(본절, 41, 42;9:7),

사도행전에 3( 4:36;9:36;13:8),

히브리서에 1( 7:2)쓰였다.

 

이러한 표현이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유는 예수 당시 이스라엘에서 사용된 히브리적 용어나 아람어를 헬라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함이었다.

 

특히 저자 사도 요한은 당시의 상황을 현장감 있게 재현하기 위하여 아람어를 사용했으며, 용어들이 헬라인들에게 이해될 있도록 번역을 첨부한 것이다.

 

 

 

[ 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십시쯤 되었더라

 

보라 - 여기서 '오라' 말은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오라는 초청의 말씀이며,

'보라' 말은 제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보게 것을 확정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자들을 향한 초대(超待) 구원의 보장(寶藏)이다.

 

' 보라' 표현은 랍비들이 사용했던 권위있는 초청 표현 형식으로서,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표현과 서로 상응한다.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당시의 표현 어법을 재현하며,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과 그들을 초청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 ' 보라' 표현이 명령형과 미래중간태 직설법으로 표현된 반해

 

'가서...보고' 동사 모두 부정 과거형을 사용함으로써, 제자들이 예수를 따른 것이 실제의 사실임을 명시한다.

 

또한 본문은 ' 보라' 예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표현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계신 ' 예수께서 가족과 함께 거처하시던 갈릴리 나사렛이 아니라,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신 베다니 근처의 어느 장소였을 것이다.

 

이처럼 구체적 장소를 명시하지 않고 단순히 '계신 ' 뜻하는 헬라어 관용구로써 예수의 거처를 처리해 버린 것은 그들이 추구해야 것이 어느 거처나 장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 자신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려는 저자 요한의 의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가 시쯤 되었더라 - 내용은 부가적 기록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시각이 명시되어 있는 것은 만남이 역사적(歷史的) 사실임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 ' 유대 시간법을 따라 오후 시라는 견해도 있으나,

 

(1) 본서의 저자가 바로 현장을 목격한 사도 요한이라는 점과

(2) 본서가 에베소에서 헬라인들을 위하여 기록된 ,

(3) '번역하면'(38)이란 표현이 신약성경 중에서 본서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등 고려한다면 로마식 표기법을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예수를 만난 시간은 오전 10시에 해당한다. 시간은

 

(1) 예수 그리스도와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만난 시점으로 추정됨과 아울러

(2)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 '공동체' 탄생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Westcott).

 

 

 

[ 1: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 - 안드레가 시몬 베드로의 형제라는 말로 지칭된 것은 주로 예수의 공생애 초기,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였다.

 

(1: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6:8 제자 하나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형제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0: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그러나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떠난 이후로 안드레는 베드로와 결부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지칭되었다.

 

(12: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13:3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

 

1: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거기 있어).

 

한편 안드레가 베드로의 형제로 묘사된 것은 당시 베드로가 예루살렘 12사도의 수반(首班)으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초대 교인들이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동시에 표현은 사도 요한이 공관 복음서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상 희미해져가는 안드레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안드레가 사도 요한과 함께 예수의 제자였으며, 자발적인 최초의 복음 전도자였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사도 요한은 소상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 이름 정확하게 옮기면

 

'우리가(찾던) 메시야를 발견했다'(We have found the Messiah; KJV) 된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그토록 기다리던 대망의 메시야를 만나고서 놀라운 소식을 시몬에게 곧장 전하였던 것이다.

 

'우리' 구체적으로 안드레와 사도 요한 사람을 가리키는 듯하며,

이는 재판정에서 증인의 최소 구성 인원인 2인을 상기시킨다.

 

( 19:15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증인의 입으로나 증인의 입으로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사람의 동시적 증언(testimony) 이를 듣는 시몬에게도 놀랍고도 확실한 소식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스도 - '기름을 붓다', '기름을 바르다'라는 뜻의 헬라어 '크리오'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종교적, 정치적 의미보다는 일상생활의 편의나 용도를 위함이었다.

 

그러나 근동에서는 '기름' 붓는 ' 정치적인 혹은 종교적인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특히 구약에서는 ,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써 그들이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대표자이며 책임자임을 명백히 하였다.

 

( 29:7-9 관유를 가져다가 머리에 부어 바르고

8)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히고

9) 아론과 아들들에게 띠를 띠우며 관을 씌워서 제사장의 직분을 그들에게 맡겨 영원한 규례가 되게 하라 너는 이같이 아론과 아들들에게 위임하여 거룩하게 할지니라;

 

삼상 10:1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기업의 지도자를 삼지 아니하셨느냐;

 

16:13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왕상 19:15-16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그런데 왕정 후기로 내려 오면서 '기름 부음을 받은 ' '메시야'임을 의미하게 되었다.

 

( 61:1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9:24 백성과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바벧론 유수(幽囚) 이후에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이민족들의 침략하에 시달렸으며,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할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사상이 점점 고조되었다.

 

특히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주(屬州) 전락되고, 에돔 족속인 헤롯 왕가가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장악하여 무자비한 권력을 행사하자 메시야 사상은 급진적 혁명 운동을 위한 신앙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된 메시야 사상은 결국 성전 파괴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초래한 요인이 되었다.

 

신약성경은 예수를 '그리스도' 칭한다.

이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에서 명백히 제시되었으며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이 되었다.

 

(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그리고 고백은 예수께서 구약의 완성자요 언약의 중보자(the Mediator)라는 신앙에 기인한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란 '기름부음 받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지칭했듯이,

 

예수는 가지 직분을 몸에 지니시고 죄에 빠진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도들의 머리가 되신다.

 

 

 

[ 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보시고 가라사대 - 예수께서 베드로의 성격이나 사람됨을 통찰하셨음을 시사한다. 예수와 베드로의 만남은 비록 단시간 이었음에도 직접적이고도 진지한 만남이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 여기에서 '시몬'(Simon) '게바'(Cephas) 서로 대조를 이룬다.

 

'시몬'이란 베드로의 다른 이름으로서 이는 예수께서 베드로의 자연적 성품을 꿰뚫고 계심을 나타낸다.

 

'요한의 아들'이란 표현에서 예수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자녀' 되기 전에 상태를 암시한다고 있다.

 

'시몬' '시므온'(쉬메온)이라고도 불리었다.

 

( 15: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그렇다면 '시몬' 이란 구약의 12지파 시므온 지파의 조상인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LXX) 동일한 명칭이다.

 

시므온이 과격하고 성미가 급한 인물이었듯이

 

( 34:25-31 제삼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할 때에 야곱의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 중에 성을 엄습하여 모든 남자를 죽이고

26) 칼로 하몰과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 오고

27) 야곱의 여러 아들이 시체있는 성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누이를 더럽힌 연고라

28)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성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29)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고 속의 물건을 노략한지라

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사람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집이 멸망하리라

31) 그들이 가로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가하니이까).

 

변화되기 이전의 시몬 베드로도 충동적이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

 

(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종의 이름은 말고라,

 

25-27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제자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26) 대제사장의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가로되 네가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 이에 베드로가 부인하니 닭이 울더라;

 

26:31-35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8:32-33 드러내놓고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14:27-3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22:31-33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

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이러한 시몬의 성격을 간파하신 예수는 시몬이 장차 '게바' 불리울 것을 예언하신다.

 

'게바' '반석'이란 뜻의 아람어로서 '하나님의 자녀' 후의 베드로의 성격을 반영한다.

 

'게바'라는 이름은 베드로가 교회를 위한 사도적인 터전을 구축(構築) 여러 요긴한 반석 중의 하나가 사실을 상기케 한다.

 

예수 공생애의 마지막 주간 중에 베드로는 예수를 차례나 거듭 부인하는 나약함을 보였고,

 

( 26: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2:11에서도 우리는 베드로의 흔들리는 모습과 오히려 사도 바울의 견고한 반석같은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게 된다.

 

( 2: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그러나 그는 모든 인간적 약점들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극복하고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감당하였다.

 

( 1:15-25 모인 무리의 수가 일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때에 베드로가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 사람이 본래 우리 가운데 참예하여 직무의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 (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 나온지라

19)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방언에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일렀으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침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 저희가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되어

25) 봉사와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후에 베드로에게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 고백으로 인해 '베드로'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부여되었다.

 

( 16:16-19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니라

18)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는 '야곱'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 되었던 것처럼(32:24-30),

 

요한의 자녀' 시몬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아들' 게바(베드로) 되었음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