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그레이드 위한 난상토론
◆ 먹고살기 바쁜데… 경제문제로 최근 이혼 늘어 일 하고싶어도 허드렛일뿐
◆ 가르쳐주고 싶은데… 동남아시아 문화·음식… 아이와 함께 갈 학원 없어
◆ 색안경 벗어줬으면… 사회 냉대 때문에 위축 아빠가 나설 수 있게 해야
지난 3일 서울 중구 태평로 조선일보 편집국에 모인 다문화가정의 한국인 아빠와 외국 출신 엄마, 교육 실무자들은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글로벌 인재로 기르려면 정부와 지역사회가 지금보다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했다.좌담에는 1988년 결혼해 중·고생 아들 셋을 둔 마시코 사치코(48·일본)씨와 2002년 결혼해 딸 하나를 둔 농루치 프롬물(35·태국)씨가 외국 출신 엄마를 대표해서 나왔다.
결혼 3년차부터 8년차까지 한국인 남편도 세 사람 나왔다. 2001년 태국인 부인을 맞아 남매를 둔 김태훈(37·용접기술자)씨, 2005년 베트남인 부인과 결혼해 아들을 둔 신동민(45·중소기업 부장)씨, 2006년 캄보디아인 부인을 맞아 아들을 둔 김성배(46·중소기업 대리)씨 등이다.
다문화가정 자녀 45명이 다니는 서울 보광초등학교의 최인숙(49) 교사, 다문화가정 자녀 지원 프로그램을 활발하게 펼쳐온 무지개청소년센터 이창호(43) 부소장도 함께했다.
- ▲ 다문화가정의 아버지와 어머니, 다문화 교육 전문가 등 7명이 서울 조선일보사에서 난상토론을 벌인 뒤 손을 모아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왼쪽부터 이창호 무지개청소년센터 부소장, 최인숙 보광초등학교 교사, 프롬물씨, 김성배씨, 마시코 사치코씨, 신동민씨, 김태훈씨./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엄마 때문에 말이 늦는다고요?"
프롬물=한국 사람들이 '엄마가 외국 사람이라서 아이가 말이 늦는다'고 해서 속상할 때가 많다. 엄마 입장에서는 아이가 한국어와 태국어를 같이 배웠으면 좋겠다. 엄마는 물론 외갓집 식구들이랑도 속 깊은 얘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하니까. 음식도 한식뿐 아니라 돔양꿍(향신료와 새우를 넣은 국물요리) 같은 태국 전통 요리를 많이 먹이고 싶다. 엄마 혼자 가르치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아이가 태국어를 배울 수 있는 학원이나 강좌가 생기면 좋겠다.
마시코=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훨씬 어려워진다. 초등학교 시절과 중·고생 시절은 다르다. 중·고등학교에서 선생님이 공개적으로 '오늘은 다문화 교육이 있으니까 누구, 어디로 가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아이는 남들과 다른 '왕따'가 될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은 일본어 잘한다고 절대 학교에서 표 내지 않는다. 이런 점을 섬세하게 신경 써야 한다.
프롬물=구청이나 여러 사회단체에서 결혼 이민자들을 위해 한국 음식과 문화를 가르쳐주는 건 좋다. 그런데 우리만 일방적으로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게 아니라 한국 사람들에게 우리 문화와 언어를 가르쳐줄 기회도 점차 많아졌으면 좋겠다.
◆"아빠들을 위한 프로그램 많이 나왔으면"
김태훈=아빠들도 고민이 많다. 다문화가정 남편들은 부인과 15~20살씩 나이 차가 나는 경우가 많다. 자연히 '아이는 쑥쑥 자라는데 과연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는 곧 쉰이 되는데 아이는 겨우 초등학생이니까 아버지들이 '내가 늙고 힘이 없어서 우리 애가 다른 애들보다 뒤떨어지지 않을까'하는 위기의식이 생기는 것이다.
신동민=내 경우만 해도 아들(3)이 대학 갈 나이가 되면 나는 환갑이 된다. 아이가 아버지의 도움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시기에 나는 노년에 접어드는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돈을 못 벌거나 판단력이 흐려져 가장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 과연 아내가 책임지고 아이를 대학에 보낼 수 있을지 고민이다. 이런 집이 한두 집이 아닐 텐데….
김성배=한국 남편을 위한 프로그램이 많이 나왔지만 앞으로 더욱 다양해져야 한다. 외국 출신 부인의 한국 정착을 돕는 프로그램, 자녀들이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도록 돕는 프로그램과 함께 남편의 역할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프로그램도 많아지면 좋겠다.
◆"외국 출신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자리 많아졌으면"
이창호=전체 다문화가정의 53%가 최저 생계비 이하로 살아간다. 우리 사회가 다문화가정에 관심을 갖는 건 좋지만 자칫 부모들 개개인에게 이중의 부담을 지우는 일이 될 수 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사람한테 충분한 지원도 없이 "아빠 엄마 하기에 달렸다" "가정이 화목해야 한다"고 지나치게 강조하면 오히려 가정에 갈등이 생길 수 있다.
김태훈=요즘 다문화가정의 이혼율이 높아졌다. 경제적인 문제 탓이 크다. 다문화가정은 살림이 넉넉지 않은 집이 많다. 부인들이 이른바 '3D'업종 일자리를 구해서 한푼이라도 벌려고 아등바등 애쓴다.
프롬물=우리 집도 아이가 있어서 남편 혼자 버는 걸로는 생활비가 부족하다. 그런데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 식당, 공장은 물론 비닐하우스 일도 해봤다. '태국에서도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는데…' 하고 우울해지기도 했다. 지금은 집에서 전자부품 조립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하루 1만~2만원이라도 벌고 있다.
마시코=필리핀에서 온 엄마들은 영어 강사로 일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식당 허드렛일 정도밖에 구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결혼 이민 여성들이 고향에서 가져온 자격증을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인정해주면 안정적인 일자리가 훨씬 많아져서 경제적 자립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빠들이 앞장서서 엄마의 말과 문화 존중해야"
최인숙=다문화가정이라는 것을 숨기고 싶어하는 아버지들이 생각보다 많다. 아이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아이 학교생활에 관심이 갖고 평소 어머니 나라를 존중하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부심을 갖는다.
마시코=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나는 다문화가정이라는 말이 보편화되기 훨씬 전에 시집을 와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아이들이 엄마의 나라를 존중하게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이 두 나라 언어를 떳떳하게 구사할 수 있도록 학교와 지역사회부터 마음을 열어야 한다.
김성배=얼마 전에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50일간 처가에 머물다 왔다. 지금은 아이도 '쭙립수어(안녕하세요)' 정도의 캄보디아 말은 한다. 한국 말부터 배워야 하겠지만 앞으로 캄보디아 말도 가르치고 싶다. 두 나라 사이를 오가는 민간 외교관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 집 형편이 나아지지 않으면 아이 교육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정부가 중학생 이상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한데 모아서 태국어·베트남어·일본어 등을 집중 교육해주면 어학 인재로 키울 수 있지 않을까.
김태훈=나는 일부러라도 아내 나라 식으로도 살아보려고 애쓴다. 태국 국왕탄신일(12월 5일·아버지 날), 왕비탄신일(8월 12일·어머니 날), 쏭끄란(설·4월 13일) 등을 꼬박꼬박 챙긴다. 또 온 가족이 태국 전통 의상을 입고 사진 찍어서 처가에 보내주기도 한다. 이처럼 생활 작은 곳부터 남편들이 앞장서야 아이들이 어머니 나라에 친근감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맞춤식 학습·생활 지도 프로그램 많아져야
최인숙=다문화가정 아이들의 학업 성취도에도 신경 써야 한다.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사회나 국어 과목에서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집에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한자나 형용사를 배울 기회가 적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이창호=실제로 학업 성취도가 떨어지는 학생들이 꽤 있다. 학교 선생님들이 남아서 가르치는 것으로 이 문제를 전부 해결하기는 어렵다. 최근 우리 센터에서 대학생들이 다문화가정 학생들과 일대일로 만나서 고민도 나누고 공부도 도와주는 '멘토-멘티'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맞춤식 학습·생활 지도를 해야 한다.
신동민=지금까지도 사회와 정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모두가 조금만 더 다문화가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면 좋겠다. 공무원들이 다문화가정 구성원 모두를 위한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