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승리
(계 7:5-17) 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이 땅위에 사는 날 동안 우리는 분명히 많은 어려움과 환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좌절도 있을 것이고 절망하는 순간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듯이 승리할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어 어떤 축구팀이 자신들이 하는 내일 경기가 이긴다는 사실을 미리 알 수만 있다면
그들은 아무리 어려운 상대가 내일 경기할 대상일지라도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경기에 임할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듯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성서는 마지막 날에 되어질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우리가 승리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게 된다고 기록된 사실입니다.
즉 이것은 우리가 낙담하여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승리는 보장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 실
말씀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신학의 굴레를 벗기고 그 분이 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1. 모든 천사들이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양하는데 그 찬양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계 7: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아멘으로 응답한 후에 7가지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돌리고 있다.
첫째, 찬송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데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와 구속과 섭리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송축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시기 때문에 여광을 그분께 돌려야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우리 삶의 최고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 지혜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지혜의 근원이 되시며 진리의 근거가 되시는 분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혜는
그분의 권능으로부터 연유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저을 우리들은 마음에 늘 새겨야 한다.
넷째, 감사를 드리고 있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참사랑에 감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섯째, 존귀를 돌리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들의 모든 것을 받으시는 존귀의 대상이시다.
여섯째, 능력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하나님의 권능은 무한하시며 당신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구상은 결코 짧지 않으시며 이러한 하나님의 권능은 인간을 사랑하는데 사용되어지고 있다.
일곱째, 힘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하나님은 무한한 힘을 소유하고 계신 분으로서 그 안에 모든 악의 세력과 사단의 권세를 물리칠 힘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말하기도 하는 것으로서 우리들은 반드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2.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던 모든 사람들에게 어린양 되신 주님은 어떤 보장을 해 주십니까?
(계 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우리는 고통이 완전히 끝나는 것은 어떤 정권의 변화나 환경의 개선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나 보호하시는 사역으로 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3.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반드시 구원 받으며 영원한 승리를 얻게 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은 놀라운 것이다.
만왕의 왕이신 주께서 친히 죽음으로 값을 치루었다면 그 가치는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어린 한 생명조차도 천하 만물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 우리를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고난을 이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 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대신 이기시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의 사랑할 만한 대상으로 있으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넉넉한 이김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등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동안 직접 경험하는 어려움 들이다.
그것들은 몸으로 견디고 피하고 싸워야 하는 것들이다.
비록 세상에서 몸으로 경험하고 당하게 되는 어려움들이야 한 번 해 볼만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들은 나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그 분은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그 분의 사랑 안에서 감히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위협과 환난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확신할 만한 것이다.
그 사랑의 힘을 이길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우리는 다만 그 사랑의 힘을 믿고 평안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
그럴수록 그 사랑은 힘을 더해 가는 것을 경험하게 하신다.
4.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하늘에 사는 천국시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습니까?
(엡 2:4-6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미국의 남북 전쟁이 한창일 때 한 농부가 윗도리는 북군의 군복을, 바지는 남군의 군복을 입었답니다.
상황에 따라 한 쪽 편으로 가장(假裝)하면 안전하리라고 계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 남군과 북군의 격전이 벌어졌을 때, 그는 가운데서 양쪽 군의 사격을 받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소속이 불분명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땅에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소속은 하늘이요 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고전 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하늘의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랑스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바울이었지만, 그의 진짜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천명하였습니다.
소속을 분명히 합시다. 색깔을 분명히 합시다.
나는 기독교인인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인가?
대충 자신을 감추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나의 예수 믿는 모습이 분명하고 생활이 진실할진대, 그들은 우정을 넘어 "존경"의 시선까지 갖는 것을 잊지 맙시다.
5.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당당히 나갈 수 있는 힘은 무엇 때문에 생깁니까?
(엡 3:11-12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1940년 무더운 여름 어느 주일 아침 시미즈 형사가 이끄는 경찰대가 평양 산정현교회로 밀어닥쳤습니다.
주기철 목사님 앞으로 다가선 시미즈 형사가 “오늘부터 설교를 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주 목사님은
“나는 설교권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소. 하나님이 못하게 하면 안 하겠소만, 경찰서에서 설교를 하라 마라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오”라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 후 그는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결국 순교의 잔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며,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6. 당신의 삶은 승리한 자의 삶입니까?
아니면 패배자 혹은 의심하는 자의 삶입니까?
어떤 신학교의 교수가 학생들에게 일러주기를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니오"하고 거절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 신학생에게 있어서는 희랍어를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신학생이 신약성서의 원전을 공부하려면 희랍어에 능통하지 않고는 도저히 안 될 일이니까
그 어려운 말을 배우는 것이 꼭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긴요한 것은 세속의 유혹을 단연 물리칠 만한 도덕적 용기라는 뜻일 것입니다.
"아니오"할 때 "아니오"하는 것이 도덕생활의 기초입니다.
명예나 권력을 추구하는 것도 물리치기 어려운 마귀의 시험입니다.
높은 자리를 탐내거나 마음대로 남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을 향해
"노오"하지 못한다면 정직하고 평화스런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장차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을 제자들에게 밝혔을 때,
제자들 중에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그러시면 안됩니다"고 애원하다시피 말렸습니다.
인정으로 말하자면 너무나 당연하고 또 공감이 가는 진실한 호소입니다.
사랑과 존경하는 스승이 머지않아 죽음의 길을 택하여 간다는 말을 듣고도 아무런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베드로를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구나.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구나!"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유혹을 향해
"노오"할 수 있는 길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담의 변명 (0) | 2017.08.28 |
---|---|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0) | 2017.08.27 |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0) | 2017.08.25 |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0) | 2017.08.24 |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0) | 2017.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