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5일장 풍경

거듭난 삶 2009. 9. 2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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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자지껄 5일장 나들이 [중앙일보]

 

2009.09.24

200년도 넘은 5일장인 강원도 동해시 북평장의 정경은 그저 소박하다. 길바닥 위에 텃밭에서 거둔 열무·파·호박 한 움큼을 늘어놓은 게 장터란다.

 

#1 하늘은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고 들판은 누렇게 익어 출렁입니다. 명절 대목을 지척에 두고 5일장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백화점이나 마트에선 살 수 없는 인심이 거기에 있을 거라고 기대해서입니다.

우리나라엔 상설시장 말고도 657개의 5일장이 있답니다. 닷새 간격으로 장이 서니 하루에 70개가 넘는 장이 열린다는 얘기입니다.

하나 시끌벅적하고 흙 냄새 풍기는 옛 시골 장터의 풍경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도는 장돌뱅이는 맥이 끊겼고, 오전에만 반짝 열리고 점심 때 일찌감치 파장하는 장도 여럿입니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맺어주던 화개장도 사라졌고, 싸전으로 유명했던 경남 고성 배둔장도 썰렁하기만 합니다. 관광 상품이 된 몇몇 5일장의 풍경은, 화려하긴 해도 되레 안쓰러웠습니다.

#2 이른 아침 전남 장흥장에 갔습니다. 할머니들이 좌판을 벌여놓고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옥수수 몇 대, 깻잎 몇 장, 마늘 몇 됫박, 도라지 몇 포기, 들기름 두어 병…, 할머니들이 이른 아침부터 이고 지고 온 물건이 소쿠리에 소담히 담아져 있었습니다. 열무배추 쌓아놓고 계신 할머니에게 수작을 걸었습니다.

“장사 안 하셔요?” “왜 안 하겄소. 좀 사실라고?” “그냥, 할머니가 워낙 고우셔서.” “젊은이가 아침부터 주책인 게 봬. 열무 좋아. 텃밭에서 뽑아온 거랑께.” “벌써 많이 파셨네. 일찍 나오셨나 봐요.” “새벽 4시에 나왔제. 그래야 목 좋은 데 자리 펴고 앉제.” “할머니 손 좀 펴보셔요.” “늙은이 손은 왜?” “고우셔서….”

할머니가 두 손을 펴 배추 위에 올려놨습니다. 시커멓게 단 손등에 주름이 자글자글 앉아 있었습니다. 손등 곳곳이 터서 상처가 나 있었고, 손톱 밑에 흙 때가 까맣게 끼어 있었습니다. “할매 올해 몇 되셨소.” “일흔넷 묵었제.”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십니다. 어금니가 없어 할머니의 웃음이 더 가슴에 남습니다.

#3 팔도 장터를 헤매고 다닌 긴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 책상 앞에 앉으니, 옛 시집이 눈에 들어옵니다. 누렇게 바랜 시집을 펼치니 밑줄 그은 연필 자국마저 희미합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시인 신경림, ‘파장’ 부분)

연필을 들어 마지막 행을 이렇게 고쳐 봅니다. 모두 한결같이 엄니 같은 얼굴들…. 5일장에 다녀왔습니다. 어머니의 추억을 한아름 사 왔습니다.

장흥·정선·동해·성남=손민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추억 한 소쿠리, 인심 한 보따리 덤으로 얻었습니다

장돌뱅이 모양, 5일장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지역도 다르고, 장이 서는 날도 다르고, 장에 모이는 사람도 다르지만 푸근한 우리네 인심은 다르지 않았다. 그중 특색 있는 5일장 네 곳을 소개한다.


글=손민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사람보다 소가 더 많은 곳 장흥 토요시장

강원도 북평장이 열리는 날 장터 구경나온 시골 아지매들.
전남 장흥이 한우로 유명한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장흥엔 사람보다 소가 더 많다. 장흥 인구가 4만3000여 명인데 한우는 4만6000여 마리다. 한우가 사람보다 더 많은 지방단체는 장흥이 유일하다. 다음으로 장흥 한우의 품질. 1등급 비율(63.8%)이 전국 평균(55.9%)보다 훨씬 높다.

2005년 장흥군은 전통의 5일장을 개편해 매주 토요일 토요시장을 열었다. 한우를 이용한 관광 수익을 노린 전략이다. 유통망을 엄격히 관리해 품질을 유지하고, 전국 평균보다 20~30% 싼 가격으로 공급한다. 이로써 장흥 토요시장은 주말관광 시장의 성공 모델로 거듭난다. 지난해 장흥이 한우로 번 소득(연간 1800억원)은 쌀(800억원)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장흥이 한우로 유명한 셋째 이유다.

강원도 정선 토박이임을 표시하는 ‘신토불이 상인’ 조끼를 입은 할머니 상인.
장흥 토요시장은 옛 5일장 풍경을 재현해 놓았다. 대표적인 게 2007년 개시한 할머니 장터다. 65세 이상 할머니 165명이 토요일마다 텃밭에서 일군 채소를 이고 장터로 나온다. 장흥군은 이들 할머니에게 월 2만원씩 드린다. 할머니들은 소일도 하고 용돈도 벌고, 관광객은 옛 장터의 훈훈한 기억을 되새긴다. 전문 상인의 횡포를 방지한 일석삼조의 묘책이다. 오전 11시부터 중앙광장에서 열리는 각설이 공연도 볼 만하다.

장 정보=토요일이 아니어도 토요시장 한우 판매장은 영업을 계속한다. 13개 판매장의 가격이 같다. 전통의 장흥 5일장(2·7장)도 규모는 줄었지만 여전히 열린다. 장날과 토요일이 겹치는 날이면 장흥 전체가 들썩거린다. 최근 장흥군은 잘 팔리지 않는 한우 부위를 가공한 육포를 개발했다. 50g 한 봉지에 5000원. 육포도 한우가 낫다.

관광명소 된 산골장터 강원 정선장

토속 음식을 파는 강원도 정선장의 상인들이 객을 부르고 있다.
언제부턴가 5일장 하면 정선 5일장이었다. 하나 정선장은 오래됐거나 크게 서는 장이 아니다. 정선장의 현재 명성은 되레 관광 마케팅의 성공에서 찾아야 한다. 정선장은 깊은 산골에서 나는 풍부한 산물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한 대표적 사례다.

정선장은 각종 산나물과 약초가 주로 모이는 5일장으로 1966년 개장했다. 처음엔 동네 주민의 물물교환 장터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하나 정선에 관광객이 밀려들면서 주변의 아우라지가 관광지로 개발되고 옛 철길에 ‘레일바이크’가 다니면서 정선장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급기야 ‘아리아리 정선열차’란 정선 5일장 기차여행 상품이 나왔고, 이 열차는 현재 코레일의 테마관광 열차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다.

강원도 북평장에 물건 팔러 나온 할머니들이 막걸리 한 잔 기울이며 안주를 나누고 있다.
정선장은 관광객을 위한 편의시설이 잘돼 있다. 골목 모퉁이마다 해설사가 배치돼 있고, 시장 복판 광장에선 정선아리랑 공연과 음식 체험 등 여러 행사가 장터의 흥을 돋운다. ‘신토불이’라고 쓰인 조끼를 입은 할머니 빼고는 다 외지 상인이라지만, 그래도 토속 음식이 많아 입은 즐겁다. 곤드레나물밥·콧등치기국수·올챙이국수·메밀부꾸미 등 강원도 토속 음식을 맛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장 정보=‘아리아리 정선열차’는 매일 운행하지만 정선장은 2·7장이다. 정선장은 열차와 관련한 상품이 많다. 폐로 7.2㎞ 구간을 달리는 철로 자전거 레일바이크는 여전히 인기고, 코레일이 열차를 이용한 당일 여정의 정선 테마관광 상품을 여럿 운영하고 있다. 요금 2만9000~5만6000원. 1544-7786.

200년 묵어 푸근한 맛 동해 북평장

강원도 북평장에 곡식을 팔러 나온 할머니가 콩에서 돌을 고르고 있다.
강원도 북평장 터 한 모퉁이엔 호박 한 개와 엿기름·고춧가루만 가지고 나온 상인의 난전이 있다.
먼저 지도에서 강원도 동해시 북평동을 찾아보자. 동해안을 종단하는 7번 국도가 지나가고 태백에서 38번 국도가, 정선에서 42번 국도가 북평에서 만난다. 그래서 북평엔 예부터 큰 장이 섰다. 북평장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 정조 연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소 200년은 묵은 장이란 얘기다.

북평장은 영동 지방 최대 장터다. 하여 종합시장의 면모가 여태 남아 있다. 동해에서 건진 수산물도 있고, 백두대간 자락에서 거둔 산물도 있다. 좀약부터 농기구까지 완비한 잡화상도 크고, 이불·그릇전도 제법 규모가 된다. 가깝게는 임계·정선·옥계·통리에서 몰려오고, 멀리서는 경북·충북에서도 장꾼이 내려온다.

추석 대목을 앞둔 북평장은 건어물로 가득했다. 대구·명태·민어·오징어·가자미·가오리 등속이 바짝 말려진 상태로 매달려 있고, 생물 문어도 많이 나와 있었다. 영동에선 차례상이나 제사상에 꼭 오르는 물건이다. 북평장 어물전은 예부터 간이 정확하기로 이름이 났다.

북평장은 아직 관광장터로 개발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되바라지지 않아 푸근하다. 대신 요란한 공연 따위는 없다. 아마도 옛 모습을 아직 잃지 않은, 정말 몇 안 되는 전통 5일장일 것이다.

장 정보=북평장은 3·8장이다. 평소엔 장터라고 짐작하기 힘든 길거리가 장날이 되면 난전으로 빼곡하다. 옛날엔 북평장에 우시장도 섰던 까닭에 국밥집이 아직도 몇 군데 남아 있다. 42년 전통의 두꺼비집(033-521-5283)에서 소머리국밥(6000원)을 먹었다. 국물을 오래 우려내 개운했다.

주말엔 20만 명 북적북적 성남 모란시장

경기도 성남시 모란시장은 전국 최고 규모를 자랑한다. 대원천 하류를 복개한 주차장 1만㎡가 장날이 되면 알록달록 천막으로 꽉 들어찬다. 평일 장날이면 평균 10여만 명, 주말에 장날이 겹치면 평균 20여만 명이 모란시장을 찾는다. 상인 수만 1500명이 넘는다. 개고기 시장으로 워낙 악명이 자자해 여름마다 홍역을 치르기도 하지만, 모란시장을 찾는 발길은 멈출 기색이 없다.

모란장은 62년께 시작됐다. 당시 이 지역의 군수였던 김창숙이 5일장을 열면서 제 고향인 평양의 명물 모란봉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주차장 부지로 장을 옮긴 건 90년 9월의 일이다.

별별 볼거리로 장은 온종일 흥청댄다. 각설이 공연단이 질펀한 만담을 늘어놓고, 엿장수 가위질 소리가 쨍쨍 울려 퍼진다. 야바위 판도 벌어지고, 약장수가 핏대 세워 기적의 효험을 외친다. 좌판에선 흑염소·지네·자라·뱀도 판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올라온 약초와 과일, 잡화가 넘쳐난다.

하나 모란장의 대표 풍경은 역시 별의별 먹거리 판이다. 소주 한 병 값으로 5000원만 내면 돼지고기 부속 안주가 공짜다. 껍질과 온갖 내장을 즉석에서 구워 연방 내온다. 파장이 가까워 오면 술판에선 꼭 멱살잡이가 벌어진다.

장 정보=모란장의 최대 장점은 편리한 교통이다. 지하철 8호선 모란역 5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모란시장이다. 장이 열리는 4일과 9일 지하철 승객이 평소 두 배로 뛴단다.

전남 장흥 토요시장에서 만난 각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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