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거듭난 삶 2019. 4. 12.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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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로마 방문 계획 2

 

: [ 15:25-27]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 15: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

 

바울은 23절에 사용한 역접을 나타내는 접속사 '그러나 이제는'(뉘니 ) 반복 사용하여 서바나 선교 계획의 중간 경유지로서 로마를 바로 가야하지만 도중에 예루살렘을 거쳐 가지 않으면 것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그렇게 가기를 소원하였던 로마 교회의 방문을 뒤로 미룬

먼저 예루살렘을 방문하지 않으면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교회의 () 교회로서 교회 지도자들 사도들이 있는

교회이지만 지금은 핍박과 어려움 중에 있는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위급한 교회를 모든 교회가 협력하여 도와줄 의무가 있었다.

이것은 모교회에 대해 이방 교회가 지녀야 당연한 태도이며 그들이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염두에 두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도들과

기타 이방 교회의 성도들과의 화합과 일치였다.

 

예루살렘 이외의 모든 교회는 대부분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대 기독교들과 이방인 기독교 개종자 사이에는 적지 않은 충돌과 마찰이 있었는데

유대 기독교 신자들은 이방인 기독교 개종자들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 가운데서 일부는 이방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구약의 규례들을 따를 것을 강요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러한 형편에서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의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예루살렘과

이방 교회 간의 관계가 극복되어 견고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리라 생각했었다.

 

이전에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교인들을 돌보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하여 바나바와 함께 수리아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로부터

헌금을 거두어서 도와준 적이 있었다.

 

( 11: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그리고 바울은 2:10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줄 것을 이방인 교회에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바울의 로마 교회의 방문이 다시 한번 불가피하게 지체되었고,

이와 같은 사정을 로마 교회에 알림으로 그들로 하여금 양해를 구하고 있으며

또한 그의 이러한 모범을 따르도록 독려하고 있다(John Calvin).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이러한 구제의 행동을

'성도를 섬기는 '(디아코논 토이스 하기오이스)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성도를 섬기는 '이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루살렘의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해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이방인 성도들이 모금한 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일을 뜻한다.

 

*참조 : (고후 8-9).

 

여기서 우리는 사역자 바울이 일을 진행시키는 우선 순위를 배우게 된다.

 

사도가 그토록 보기를 사모했던 로마 교회의 교인들과 만나게 되는

개인적인 기쁨보다는 우선적으로 어려운 성도들을 도와주고 그들이 다른 성도들과

서로 사랑 가운데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의식을 갖게 하는 일에

무엇보다도 먼저 힘쓰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 15: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지고 헌금은 고린도, 갈라디아, 마게도냐

많은 이방인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힘껏 헌금한 것이었다.

 

(고전 16:1-3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일 첫날에 너희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 참조 : (고후 8, 9)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그런데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만 언급한 것은 바울이 서신을

아가야에 있었고 최근에 마게도니아를 지나왔기 때문이다.

 

( 18:12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재판 자리로 데리고 와서;

 

20:1-2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2)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이것은 서신이 고린도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아가야는 헬라 명칭 '아카이아' 고린도의 수도였다.

그들은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 헌금을 억지로 하거나

마지 못해서 하지 않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사랑의 선물을 바울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에 보냈다.

 

(고후 9:5-15 이러므로 내가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6) 이것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마음에 정한 대로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9) 기록한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11)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12)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13)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14)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15) 말할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위에서 '얼마를 동정' 헬라어는 '코이노니안 티나'인데

'코이노니안' 일반적으로 '교제', '친교' 의미이다.

 

문장을 직역하면 '얼마의 친교' 세웠다는 말로 번역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코이노니안' '친교' 해석하기 보다는

'헌금'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할 듯하다.

 

이는 마케도니아와 아카야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얼마를 기부하였음이니라. (한글킹제임스번역)

 

 

[ 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 바울은 여기서 이방인 교회의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구제 헌금의 성격을 '자원하는 심령과 의무'라는 관점에서 규정하고 있다.

 

'빚진 '라고 번역된 헬라어 '오페일레타이' '오페일로'('빚지다') 목적 소유격으로

'의무를 가진 '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서는 '손해를 사람에게 아직 보상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바울은 용어를 1:14 8:12에서도 사용하고 있는데,

자신을 가리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빚진 '라고 고백하고 있다.

 

(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내가 빚진 자라;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것이 아니니라)

 

이러한 고백은 의미심장한 것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무한한 은혜에 대한

채무자적인 자신의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복음의 빚진 자로서 사랑의 봉사와 복음 증거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바울의 이와 같은 태도는 이방인들 또한 유대인들에게 가져야 태도이다.

이방인은 유대인에게 복음의 빚진 자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빚진 자인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신령한'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이스'

'영적인', '성령에 부합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로부터

이방 세계로 전파된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나셨으며 복음의 일차적인 대상 또한 유대인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예루살렘 교회가 그들의 영적 축복 복음을 이방인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아직도 사단의 권세 아래,

죄악의 어두움 속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E.F. Harrison).

 

그런데 지금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유대 기독교 신자들로부터 시작된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되었다.

 

( 10;

 

11:19-22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20)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15:40-41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따라서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에게 빚진 자들이 것이다.

 

''(오페일로) 상업적 빚의 의미가 아니라

은혜를 크게 입은 자에 대해 느끼는 의미로서 부채감(負債感)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방인 신자들이 그들의 '육신의 '( 토이스 사르키코이스),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복음의 은혜를 갚는 것은 마땅히 해야 당연한 일인 것이다.

 

육신의 - 단어는 육신의 죄악된 면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육신의 일상생활에 속한 필요한 것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부유한 이방인 성도들이 물질로써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을 섬기는 것을 의미함.(Robert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