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거듭난 삶 2019. 4. 15. 00:38
728x90

 

바울의 로마 방문 계획 4

 

: [ 15:30-33] 형제들아 내가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1)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 15: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형제들아 내가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

 

본문을 한글킹제임스는

 

형제들아,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라고 있다.

 

'말미암아'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일반적으로 수단, 매개, 동인(動因) 나타내는 전치사로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을 매개로 하여 권유를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형제들아~권하노니'라고 부드럽고 정중한 태도로 부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함축적으로 자신의 부탁을 보다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다(J. Murray).

 

'성령의 사랑'

'성령이 지니고 있는 사랑', '성령이 성도에게 부어 주시는 사랑' 의미한다(E.F. Harrison).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말이 위엄과 권위로써 권하는 성격이 있다면

반면에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말은 사랑에 호소하는 부드러운 권고적 성격이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 말미암고 ~ 말미암아 권하노니' 표현은

사도 자신의 권위나 주관이 전혀 없이 오직 크신 삼위 하나님이

이유와 근거와 내용이 되고 목표가 됨을 강력히 시사해준다.

 

그만큼 심각하고 강력한 부탁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연합된 로마의 성도들이

자신의 사역에 기도로 적극 동참해 것을 호소하는 것이다.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 바울은 그에게 닥칠 위험으로 그의 선교 계획에 지장이 초래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그는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처방책

 

"너희 중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18:19) 말씀에 따라

 

합심하여 기도하면 모든 문제를 선히 해결해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고후 1: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나와 힘을 같이하여'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쉬나고니사스다이 모이'

'죽을 힘을 다하다'라는 일사각오(一死覺悟)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말은 신약에서 본절에서만 사용되었는데 뜻은

운동 경기에서 팀에 소속된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처럼

마음과 영혼을 바쳐서 힘을 다하여 기도하라는 뜻이다(Lenski).

 

또한 이것은 기도가 내포하고 있는 씨름을 암시하고 있다.

기도는 끈질기고 열심히 내는 것이어야 하며 마치 투쟁(鬪爭)과도 같은 것이다. (John Murray).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수단이며

성령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이다.

 

(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물론 이때 힘써서 하는 기도는 자기 욕심의 응답을 위해 간구하는 기도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을 알아 뜻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구하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며

무조건 무엇이든지 기도만 하면 이루어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전례없는 강력한 기도의 요청은 현재 사도 바울이 처해 있는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있는 절박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 15:31-32]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 바울이 로마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기도 부탁을 데에는 가지 주요 목적이 있었다.

 

본문이 한가지이다.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헬라어로 '아포 아페이둔톤 유다이아'인데 여기서 '아포'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나타낸다(Ridderbos).

 

그리고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이란 복음에 대적하는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말인데,

그들은 단순히 예루살렘이나 팔레스틴의 남부에서 아니라 유대 지역에서 바울을 대적하고 있었음을 있다(Ernst Kasemann).

 

그는 이전에도 그들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 9:29-30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지금도 여전히 그를 대적하는 열기가 식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을 가게 경우

 

'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아니라, 곳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고 있어야만 했다'( 21:13).

 

이런 상황 때문에 바울은 더욱 간절하게 로마 성도들에게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고

대적하는 자들로부터 화를 입지 않게 해달라고 구체적으로 기도를 부탁하고 있다.

 

'구원을 받게 하고' 번역된 헬라어 '뤼스도' 바울의 이런 심정을 반영해 주는 말이다.

 

바울은 '자기의 생명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20:24)

고백하였지만

 

유대 불신자들의 살인적 음모에 대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무모하게 내어 맡기거나

또는 자기의 생명을 구하고자 비겁하게 타협할 없었다.

 

이유는 오직 복음의 증진을 위한 그의 뜨거운 열정 때문이었다(John Murray).

 

그는 결코 불신자들의 무모한 살인적 음모에 희생당하므로

복음 전도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를 위하여 기도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 본문은 바울이 로마 성도들에게 기도 부탁을 중요 목적 중의 다른 가지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이 그들을 위해 마련한 이방 교회의 구제 헌금을 감사함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방 교회의 사랑의 선물이 예루살렘 유대인 성도들의 고통을 덜어주기에

아주 적절한 시기에 제공되고 있지만 그들이 이방인 교회의 헌금 받기를 거부하거나

형식적인 감사로밖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염려하고 있었다(E.F. Harrison).

 

이유는

 

첫째,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합당한 자녀가 있다는 사실이 인정되었지만,

 

( 15:19-29 그러므로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21) 이는 예로부터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교회가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3)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25) 사람을 택하여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26) [25절과 같음]

27)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 성령과 우리는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알았노니

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 안의 바리새적인 유대인 성도들은 바울과 이방인 교회들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 15: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둘째,

바울의 이방인에 대한 선교 사역과 그의 활동에 관한 잘못된 거짓 소문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반적으로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 21:20-21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수만 명이 있으니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을 예감하고 예루살렘 교회 방문시 이러한 문제들로 인한

갈등의 소지가 없도록 로마의 성도들에게 미리 기도를 간절히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과 그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 15: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

 

한글 개역 성경에는 헬라어 성경에 있는 ''('이제는')라는 접속사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을 넣어 해석하면 지금까지 말한 15 전체의 결론이 맺어짐과 동시에 로마 교인들을 향해 부탁했던 내용들의 간절성이 한층 살아난다.

 

한편 혹자는 본절에 '아멘'(Amen) 있는 것을 이유로 들어 대목이 서신의 끝이고

16장은 다른 곳에서 삽입된 독립된 서신이라고 주장한다(Kasemann).

 

그러나 본절의 아멘은 기도의 끝에 따라오는 당시의 전통적인 축복 양식의 표현으로서 바울 사도가 지금까지 로마 교인들에게 부탁하고 그들을 위해 축복한 내용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내용에 대한 중요성 그것들이 그대로 성취될 줄을 믿는 믿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사본상에서 보더라도 본장에 뒤이어 16장이 계속되고 있다.

 

한편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 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

바울의 다른 서신서에서도 축도 중에 자주 언급되고 있다.

 

(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고후 13: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4: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후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이것은 유대교적 표현으로서 바울이 '평화'(에이레네) 하나님과 함께 관련지어서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기본적으로 성도의 평강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임을 있다. (John Murray).

 

평강의 본래적인 의미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이 보증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로서 영혼의 평온한 내적 상태, 항상 만족한 상태를 가리킨다(Hodge).

 

바울이야말로 이러한 참된 평화를 간절히 바랬고

그의 모든 독자(讀者)들이 평화를 누리게 되길 소원했다.

 

바울은 로마에 가기 도중에 방문할 예루살렘에서의 많은 충돌과 고난을 예상했기에

평화를 갈구했고,

 

( 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또한 로마의 성도들에게도 영적인 일치와 기쁨의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참된 평화가 있어야만 했음을 것이다.

 

그런데 평화를 주실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 뿐이었다.

 

왜냐하면 평화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해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함으로써 주어지는 모든 축복이

로마 교회 안에 충만하게 나타나기를 바라는 사역자의 심정을 보여준 것이다(J. Murr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