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요한복음의 가치

거듭난 삶 2019. 4. 26.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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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가치

 

 

요한복음은 이름대로 사도 요한의 저작(著作)이라는 교회의 전설은

이제 많은 정직하고 박학한 학자의 부인하는 바로 되었다.

 

그러면 때문에,

글의 가치가 감소되었는가 하면, 결코 그러하지는 않다.

 

책의 가치는, 저자가 누구냐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작자 미상'이라는 야마또 우다(와까) 중에,

많은 명음수구(a famous poem)있음은, 우리들이 아는 바이다.

 

성서 중에 있어서도, 저자가 불명이면서 저작의 위대한 것은 책이나 있다.

 

우리는 욥기의 저자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하지만 칼라일(983) 책에 대하여 말했다.

 

'이는 사람의 손으로 쓰인 최대의 서이다'라고.

 

우리들은 이사야서의 40 이하가 누구의 작인지 모른다.

하지만 예언중의 최대예언은 저자불명의 이른바 이사야서의 후반부에 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히브리서가 누구의 붓으로 것인지를 모른다.

그것이 바울의 작이 아닌 것은 일찍부터 알려져 있다.

하지만, 글이, 신약성서 ,

로마서와 아울러 쌍벽의 위관 있음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바이다.

 

저자에 의해 저작의 가치를 정하는 것은 속인의 하는 일이다.

저작의 가치는 그것 자신의 가치로서 정해야 것이다.

 

반드시 사도 요한이 썼다고 해서 귀한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 그것이 귀중한 작이기 까닭에 귀한 것이다.

 

우리들은 저자가 누구인지를 묻기 전에,

먼저 성실로서 저작 그것을 읽어야 것이다.

요한복음 그것이 자신에 관계되는 최상의 신임장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요한적 기원을 의심하는 자라해도 최상의 가치를 의심치 않는다.

 

그들은 말한다.

 

'저자는 불명이다. 그러나 저술을 자는 무명의 위인이다'라고.

 

카임(본서 113역주) 같은 ,

요한설의 효장 (veteran general)인데도 불구하고,

책의 선과 미와 우를 칭양하여 마지않는다.

 

나는 정직한 학자 중에 이때껏 사람도

'요한복음은 하찮은 ()이다'라는 사람 있음을 들은 없다.

 

어떠한 점에서 보아도 요한복음은 위저(位著)이다.

성실로서 글을 연구할 ,

위대, 장미, 심원에 놀라지 않는 자는 없는 것이다.

 

자신으로서는, 나는 동군(사도 요한) 일병졸로서 자임하는 자이다.

나는 요한복음을 사도 요한의 작으로 보는 외에 기원을 설명할 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교회가 저를 사도 요한의 작이라고 부르짖음으로서,

자기에 대하여 중상을 입히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나의 보는 바로서 하면, 요한복음만큼 심령적인 () 성서 중에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물세례를 가르치지 않는다.

 

3 5절에 '물과 '이라고 있는 물이라는 문자는 제거해야 것이라고 한다(브르킷드 The Gospel History and Its Transmission 226페이지 참조).

 

요한복음이 전하는 만찬식은 의식이 아니라 보통의 만찬이다.

요한복음은, 바로 저작시대에 있어서 보통의 만찬이다.

 

요한복음은, 바로 저작시대에 있어서 보통 교회에 있어서 이미 행해진

이른 '이대예전' 미신과 폐해를 교정하기 위해 집필된 () 듯이 보인다.

 

요한복음에 의거하여, 나는 무교회주의를 주장하기에 어렵지 않다.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의 저작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교회의 이익은 아니다.

그렇지만, 만약 요한복음이 사도 요한의 작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는가?

 

그것은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사도 이외, 사도 죽고서부터 70 혹은 100 후에,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아마도 교회의 밖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장 요해(요해) 위대한 크리스천이 있었음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있을 없는 일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장 요해한 자가, 그의 직제자에 한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도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 보아도 있는 것이다.

 

바울은 아마도 육에 있어서는 예수를 일이 없었지만도,

주의 12제자 보다 월등하게 보다 깊이 또는,

밝히 그의 성격과 사명을 알았던 것이다.

 

사도 이외, 교회 이외의 신자로서, 그들 보다 심령적인 구주를

나사렛의 예수에게 있어서 발견한 있다 해서, 결코 이상히 여길 못되는 것이다.

 

'생명을 주는 것은 성령이시다. 육은 유익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은 이는 영이요, 생명이다'(6:63 참조) 라는 말을 전한 요한복음 저자는,

 

반드시 육에 있어서 예수께 접한 사람이랄 필요는 없다.

저자는 바울처럼, 육에 있어서 예수의 교훈에 참여할 없었기 때문에,

도리어 깊이 예수의 내적 생명에 접하여,

영을 받은 아닌가?

 

그리고 교회는 그러한 저작이 자기 이외에서 나온 것을 보고 불안해 견디지 못하여

마침내 이에 붙임에 '요한복음'으로서, 이를 사도 요한의 노년의 작이라고 소개하고,

그리하여 자기의 권능을 유지하려 시도한 아닌가?

 

그리고 슬퍼해야 일로는 교회는 이래 회이고 이에 유사한 것을 감행했던 것이다.

 

이단은 누를 있는 한은 이를 눌러버리려 하고,

그리고 마침내 억압하기 어려운 것을 보면 이를 용납하여 자기에게

동화시켜 버리려고 하는 것은, 교회가 자기 이외의 것의 공적에 대하여

취해 상투수단이다.

 

사도시대에 있어서도,

이른바 '요한복음' 저자 같은 이가,

사도보다도 월등하게 깊이 그리스도를 요해한 신자가 교회 외에 있음을 듣고,

오인은 예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없는 지상자의 심려에 놀라지 않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안다.

만약 바우르, 카임, 홀츠만(이상 본서 114)등의 지설이 진리이고

 

'요한복음' 사도 요한의 저작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 가치는 이것 때문에 높여지는 일은 있어도,

결코 감소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엄밀한 연구를 도외시하고 오인의 경향에() 따르려고 한다면,

오인도 서군에 가담하여 요한복음 비요한설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오인은 보다 깊이 극시적(dramatic poetry) 흥미를

비요한설 중에 인정하지 않을 없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주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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