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요한복음의 교훈 2

거듭난 삶 2019. 4. 28.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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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교훈 2

 

 

잔치를 맡은 자를 비롯하여, 내객 일동, 다만 포도주의 좋은 맛을 맛본데 그치고,

어떻게 해서 되었는지, 어떠한 의미가 중에 담겨져 있는지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교와 훈계가 따르지 않는 기적에 대하여 세상의 사람들은 아무런 반대도 시도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만약 이것 이상으로 자기를 나타내지 않으셨더라면, 그는 사회의 총아로서 계시면서, 십자가의 고배를 맛보는 없이 그의 일생을 마쳤을 것이리라.

예수는 1 예루살렘의 성도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청결하시어,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아들의 권능을 나타내셨다.

 

(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그리고 그의 방약무인의 행위에 대하여 몹시 놀람(great surprise) 불평의 소리는 오르지 않을 없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함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무슨 표징을 보여주랴?'(2:18) ,

 

유대인은 예수에 대항하여 말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서 이것을 하는가'(마태복음 21:23)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예수와 유대인과의 사이에 최초의 충돌이 있었던 것이다.

충돌은 빈정대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천둥이 멀리서 울려와 폭우의 습내를 고해주듯, 여기서 비로소 예수에 대하여 오른 빈정대는 소리는 드디어 반대의 벽력이 되어 그의 두상에 임할 바였다.

 

예수는 끈으로서 채찍을 만들어, 하나님의 성전에서 매승(a sinful priest), 거짓 예언자의 무리를 쫓아내심으로서 이에 비로소 은밀한 적을 만드셨다.

 

유대교회의 교직들은 이래로 의심의 눈으로서 그를 보기에 이르렀다.

 

예수는 정략으로서는 일을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는 일을 하지 않을 없었다. 그는 적을 만들지 않을 없었다. 그러므로 교직의 불흥을 무릅쓰고 대담하게 일을 행하셨다.

 

이로서 예수에 대하여 불평의 소리가 올랐다.

그에 대한 불신의 징조가 나타났다.

 

그러나 불신과 동시에 신앙이 나타났다.

유대의 관원으로 니고데모라는 이가, 밤에 은밀한 예수를 찾아와, 그에 대한 깊은 존경의 뜻을 표시했다.

 

니고데모에게 일어난 신앙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끝까지 공공연하게 예수를 그의 구주로서 우러러 앙신하지 않았다.

 

(요한복음 19: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근쯤 가지고 온지라).

 

그러나 약하다 해도 신앙은 신앙이었다. 그의 동료가 모두 예수를 배척한 때에, 그는 홀로 서서 위해 변호했다.

 

성전 곽청의 용행에 의해, 예수는 적으나마 일인의 신자를 만드셨다.

유대교 전체의 앙심을 구를 얻음, 실로 어려운 일이다.

백인천인의 적을 만들지 않고서는, 일인의 친구를 얻을 수는 없다.

 

예루살렘의 성도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청결케 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유대교회의 불흥을 사고, 동시에 또한 사람의 경모자를 얻으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권능의 자현은 불신의 발단을 일으킴과 동시에 신앙의 맹아(sprout) 재촉했다.

 

요한복음 3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세상의 예수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해석해야 것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깨끗이 하고, 부패를 제거하여, 심중 은근히 유대교회전체의 환영을 예기하셨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의 예상에 어긋났다. 국민신앙의 부인 교회는, 그에 대하여, 은밀한, 더구나 깊은 반대를 표했다.

 

그리고 성도의 시민은 그에 대하여 반대를 표시하지 않으며 전연 냉담했다.

 

'그가 자기 나라에 왔으나, 백성은 이를 받아들이지(영접하지) 않았다'(1:11) 것이다.

 

그는 실망하셨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선민 사이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사람의 니고데모를 제외하고는, 예루살렘 전부는, (예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반대 아니면 냉담했다. 상태를 그는

'아들을 믿는 자는 한없는 생명을 얻고, 아들에 따르지 않는 자는 생명을 없다. 하나님의 노하심이 위에 있을 것이다'(3:36) 라는 일언을 남기고,

 

일단 예루살렘을 떠나셨다.

 

그리고 가서 북방 갈릴리에 이르려 하시고, 전도의 실망과 여로의 피곤에 의해, 도중 야곱의 우물 곁에 앉으신 때에, 여기서 뜻밖에도, 생각하지도 않은 곳에서, 생각하지도 않은 사람 사이에 참된 신앙의 표현을 목격하시어, 매우 기뻐하시고 위로 받으셨던 것이다.

 

그가 만난 것은, 유대인이 언제나 비하하여 마지않았던 사마리아인이었다.

 

더구나 부인이었다. 부인도 부인, 5인의 남편을 가졌다는 음부였다.

소행은 혐오할만하고, 죄는 지적 또는 힐책할 만했다.

 

하지만 그녀의 영혼에 귀히 여길 신앙의 씨가 있었다.

그녀는 유대교회의 교직들과 달리, 구원될만한 영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여기서 자신의 피로와 기갈을 잊으시고, 부인, 더구나 이방 사마리아의 부인, 그것도 간음의 여인에 향하여, 그가 일찍이 행한 바의 가장 고원한 설교를 하셨던 것이다.

 

장소는 사마리아의 수가의 마을, 야곱의 우물가,

교사는 하나님의 아들,

청중은 다만 사람, 이방의 부인, 그것도 음부,

제목은 하나님과 그에게 가까이 하는 ,

 

'대저 하나님은 영이시매, 예배하는 자도 영과 참으로서 이를 예배할 것이다'(4:24) 라고.

 

여기서 예수 자신에 의해 이방전도의 초막이 행해진 것이다.

그리고 초수는 부인, 그것도 타락한 부인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선민에 실망한 예수는, 여기서 있는 부인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되는 능력을 부여하기에 족함의 신앙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것을 보고 기뻐하여 마지않아, 그는 일신의 기갈을 잊고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너희가 알지 못하는 음식물이 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따라, 일을 이루는 , 이는 음식물이다'(4:32-34) 라고.

 

그의 만족 가히 알만하다.

여기 이스라엘의 스승인 니고데모보다 나은 신앙이 있었다.

그는 (니고데모), 아리마대의 요셉과 한가지로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밀히 예수를 믿는데 그쳤지만도,

 

그녀는 숨김없이 그를 믿고, 가서 그녀의 마을에 이르러, 촌민을 불러 그에게로 데리고 와서, 그의 교도에 참여케 했다.

 

'그녀의 증거한 말로 인하여, 마을의 사마리아 사람 다수가 예수를 믿었다'(4:39) 있다.

여기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선민과 이방인,

의인과 죄인과의 좋은 대조가 있다.

 

예수의 성전곽청에 처하여 다만 사람 니고데모를 제외한 외에는,

선민 그를 그로서 영접한 없음에 대하여,

 

이방의 사마리아는 기꺼이 그를 영접하고,

그에게 청종하여,

그의 구원에 참여하려 했다.

 

예수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자임하는 유대인에게 영접되지 못하고,

이방의 사마리아인에게 영접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머물 없었지만, 수가 백성의 간청 따라 2일간, 그들 사이에 유하셨다.

 

예수의 자현의 결과는 그렇듯이 하여 나타났다.

 

선민의 냉우,

이방인의 환영,

교사의 반신,

죄인의 독신.

 

'그가 자기 나라에 왔으나, 백성이 이를 영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영접하여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능력을 주어, 이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

 

사마리아인의 무학도 부인의 과거의 오예도,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자녀)됨의 능력을 받기 위한 장애(obstacle) 되지 않았다.

 

그들은 신앙으로써 선민이 참여하지 못하는 능력의 부여에 참여할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자현에 처하여 세상은 진정으로 심판되었다.

 

선민은 도리어 버려지고, 이방인은 도리어 선택되었다. 이에 있어서인가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하나님이시라 하리라'(호세아서 2:23 한글개역) 예언자의 말이 사실로 되어 나타난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자현은 세상의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시는 때에,

신자는 도리어 불신자로서 나타나고,

불신자는 도리어 신자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2 전의 유다와 사마리아에 있어서 그러했다.

오늘의 영국과 미국과 일본과, 기타 모든 이른바 그리스도교국 또는 군자국에 있어서 그러하다.

 

할렐루야, 아멘, 주여, 오시옵소서이다.

자현 1회는 그렇게 하여 끝났다.

 

예수는 다시 나아가 자기를 세상에 나타내 보이셨다.

그는 유대인의 어떤 축제 때에(아마도 부림절에서 구출된 기념제였으리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양문 근처인 베데스다 못에서, 38년간 앓던 자를 고치셨다(5).

 

이는 전회보다 승한 그의 영광의 표현이었다.

채찍으로서 성전을 청결히 하신 것은 아니다.

은혜로서, 고치기 어려운 환자를 고치신 것이다.

 

그는 지금 권위로서 선민에게 임하지 않았다. 은혜로서 임하셨다.

그는 심중에 은근히 생각하신 것이리라. 이제야 말로 국민은 사명을 알아, 나를 믿고 나를 영접하리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언제나 의심의 눈으로서 그를 감시한 유대인들은, 그가 행하신 은혜를 찬양하지 않고, 그가 안식일에 고치신 것을 오히려, 율법위반 죄로서 그를 책했다.

'여기 유대인, 예수를 비난하여 그를 죽이려 꾀했다. 그것은 그가 일을 행한 안식일이었음으로라'(5:16) 있다.

 

치유의 은혜에는 주목치 않고, 교칙위반의 죄로 그를 따랐다.

그들의 불명(stupidity)이야말로 실로 놀랍기만 것이다.

더구나 이는 교직에 있는 신분으로 백성의 지도로서 자임하는 승려계급이 하나님 사람에 대하여 취하는 수단이다.

 

사람의 구원은 그들이 조금도 개의하는바 아니다.

교칙의 엄수, 교권의 유지, 그들의 종교라는 것은 주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리새파의 교사들은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신 것을 보고,

고통이 제거된 것을 기뻐하지 않고서, 그들이 만든 교칙이 깨뜨려진 것을 노했던 것이다.

 

세상에 무자비한 이로서 실은 교직같은 이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그들의 목적이 아니다.

사원이다.

교회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사람은, 교회유지, 교세확장의 기계인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을 구했다고 해서 그들의 성찬을 얻을 수는 없다.

아니, 교회 본위인 그들에게 있어서는, 교회를 떠나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악사(惡事)이다.

 

그들은 그러한 행위에 대하여 부인의 소리를 올리지 않을 없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목전에 있어서 그들의 면허를 얻는 없이, 은혜의 역사가 행해진 것이다.

 

사랑의 발의로 나온 예수의 기적은, 교직의 입장을 무너뜨리려는 커다란 타격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바리새파들의 교사들이 예수를 죽이려고까지 노한 이유는, 그의 행위로서 교권침해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감각에 있어서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그들 앞에 커다란 재판인이 섰던 것이다. 그의 행위 그것이 분명히 그들을 재판했던 것이다.

 

예수는 영광을 나타내사, 그를 믿는 병자는 치유되고, 그를 믿지 않는 유대인은 심판되었던 것이다.

 

 

내촌감삼의 (191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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