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요한복음의 교훈

거듭난 삶 2019. 4. 27.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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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교훈

 

반드시 사랑 일방적인 글이 아니다.

요한복음은 누구의 저작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가르쳐 주는 글인지는 명백하다.

이는 학자의 설명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누구에게도 이해(해득)되는 것이다. 저자와 시대와의 문제는 이것을 뒤로 돌려도 좋다.

 

우리가 먼저 제일로 구해야 것은,

그것이 분명히 전해주는 바의 교훈이다.

 

요한복음은 어떠한 진리를 우리에게 전하려 하는가, 우리들은 먼저 첫째로 일에 착수해야 것이다.

요한복음은 무엇을 교시해주는 가의 물음에 대하여, 보통 주어지는 대답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가르쳐 주신다'는데 있다.

 

사도 바울은 엄숙한 사람으로서, 사람의 구원을 신앙에 있어서 구한데 반하여,

 

사도 요한은 인정 많은 사람으로서, 특히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랑을 말했다는 것은, 우리들이 보통 청문되는 바이다.

 

그러나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사랑을 말하고, 사도 요한도 신앙을 역설했던 것이다.

바울이 말한 하나님은 요한이 말한 하나님에 못하지 않은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다.

 

'찬송하리로다, 우리들의 하나님, 우리들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자비의 아버지, 모든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고린도후서1:3) 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보다도 자비(인정) 많으신 하나님을 소개하는 말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이 사랑의 찬미가이고, 누가복음 15장에 있어서의 방탕자식의 비유가 사랑의 하나님을 전하는 사실은 누구나가 아는 바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말은 요한서신(요한복음 아니다)에서만 있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실은, 신약성서 전체가 전하는 바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신앙을 고조한데 대하여 요한은 사랑을 역설했다고 해도 또한 커다란 잘못이 아니다.

 

'()' 요한복음에 있어서의 가장 현저한 말이다.

 

'그를 받고(영접하고),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능력(특권) 주어 이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셨도다'(요한복음 1:12) 처음에 있다.

 

그리고 나중에 있어서 나타나신 목적을 진술하여 말하고 있다.

 

' () 것은, 너희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게 하고, 이를 믿고 이름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라'(요한복음 20:31).

요한복음은 신으로서 시작하여 신으로서 끝나고 있다.

 

기록한 예수의 기적이라는 것은, 모두 사람에게 신을 일으키려 함에서였다.

 

만약 신이라는 문자의 사용된 도수에서 말한다면, 요한복음이야말로 특히 신앙의 서라고 말해야 것이다.

 

그리고 요한서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다'(요한15:4)라고 하여,

 

저자가 결코 신앙을 경히 여긴 사람이 아닌 것을 있는 것이다.

 

바울은 신앙의 사도이고 요한은 사랑의 사도였다고 하는 것은,

바울, 요한 사람 모두를 오해하는데서 생기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이 결코 안가한 사랑을 말하는 () 아니라는 것은 이것을 일독하여 보아 분명하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전도가, 이른바 '성전의 청결'로서 시작한 것은 주의해야 사실이다.

 

'예수,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에서 , ,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바꾸어주는(환전) 장수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그들 , 소를 성전에서 쫒아내시고, 바꾸어주는 장수의 돈을 흩어버리고, 상을 쓰러뜨렸다. 비둘기파는 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가지고 가라,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요한복음 2:13-16)

 

이는 결코 상냥하기만 예수를 전하는 말은 아니다.

두려워해야 예수를 전하는 것이다.

 

실로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전해지는 예수는 아주 위권 있는 엄격한 사람이시다.

 

'그가, 눈물을 흘리셨다' 문자는 있으나,

그가 유대인의 불신을 분히 여기셨다는 말씀은 거의 전편에 걸쳐 차고 넘쳐 있다고 수가 있다.

 

실로 요한복음은 구주로서의 예수를 전함과 동시에 심판 주로서의 그를 전하는 ()이다.

 

불과 연기와 가운데 빛나는 사랑의 자광을 전하는 ()이다.

요한복음은 혹은 셋의 귀중한 것을 가르쳐 준다.

 

1 하나님의 아들의 자현이시다.

2, 세상의 이에 대한 태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자현에 대한 태도에 둘이 있다.

 

1 불신이다.

2 신앙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전체는 가지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준달 있다.

 

1, 하나님의 아들의 자현

2, 불신과 결과

3, 신앙과 결과

 

처음부터 나중에 이르기까지, 요한복음은, 가지의 중요한 일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상 요한복음의 3대교지라고도 칭해야 ,

이것을 모두의 서문에 있어서 수가 있다.

 

1절부터 14절까지에 있어서 저자는 전편의 요략을 싣고 있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아들은 처음에 우주의 원리(Logos)였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계셔서, 본래부터 하나님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된 빛이었다. 그는 유체를 취해 인류 사이에 거했다. 그에게 실로 성부께서 낳으신 독생자의 영광이 빛나고 있었다.

 

(2) 그런데 세상은 빛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나라에 왔으나, 백성은 그를 받지 않았다.

 

(3) 그러나 세상의 모두가 그를 물리친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소수, 그를 믿고 그를 받는(영접하는) 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은 능력을 주셔서, 이것을 자기 아들로 삼으셨다고.

 

이상이 1 1절에서 14 이르기까지의 요한복음 서문의 대의이다.

 

서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적요(적요; summary)이다. 전편의 축사이다.

 

요한복음의 교시하는 바는 이것이다. 예수는 어떤 이시며, 그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시고, 세상은 어떻게 그를 받아들였는지, 불신의 세상에 소수의 신자가 있다는 , 이는 요한복음이 가르쳐주고자 하는 바이다.

 

저자는 나중에 다시 명백하게 () 목적을 교시하여 말하고 있다.

' () 기록한 것은, 너희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여 이를 믿고 이름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20:31).

 

이와 같이, 요한복음이 가르쳐 주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다. 하지만 간단함과 동시에 심대하다.

 

예수는 인자는 아니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육체를 취하여 사람 사이에 거하신 분이란다. 우주는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고, 만물은 그의 명하심에 따랐다고 한다.

 

사실인가, 기담인가, 역사인가, 설화인가?

만약 사실이고 역사라면 우주에 이것보다도 중대한 문제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과연 사람이 되어 세상에 임하셨을까?

예수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가?

 

문제 중의 문제, 전우주의 최대문제는 이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문제를 포착(capture) 해다가 간단하게 명백하게 대담하게 확신으로서 말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숭고한 글임은, 제목이 숭고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과 영광에 대하여 말한 글이, 끝에 있어서 다음 마디를 싣고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은 이들 외에도 허다하다. 만약 이것을 일일이 기록한다면, , 세상에 실을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21:25) .

 

이는 어떠한 사람에 대해서나 말할 있는 말은 아니다. 어떠한 영웅도, 어떠한 성인도,

 

' 세상에 실을 없다' 생각되는 사적을 남겨 놓은 자는 없다.

 

우주에 오직 , 하나님의 아들 , 요한복음 저자가 나중의 일언을 그대로 생애에 적용하였다 하여 과대한 말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인류의 태도, 이는 문제이다.

 

인류는 정의를 귀히 여긴다고 하나, 과연 그러한가?

인류는 정의의 실현자인 하나님의 아들의 출현에 처하여 이에 대하여 어떠한 태고로 나갔던가?

봉영(welcome)인가, 배척(rejection)인가?

 

문제는 단지 예수 당시의 유대인의 그것은 아니다.

 

() 인류의 그것이다.

 

인류전체에 관계되는 문제이다. 천연성에 관한 문제이다.

 

만약 셰익스피어(Shakespear) 극시(drama) 인정을 깊이 파고드는 까닭에 세계적 저작이라고 한다면,

요한복음은 인류의 연성을 파고드는 까닭에 우주적 저술이랄 수가 있다.

 

'정죄(심판)함을 받은 까닭은 이것이다. , 세상에 왔으나, 사람(인류) 빛을 사랑하지 않고, 도리어 어두움을 사랑했다. 이는 소행이 악함으로이다'(3:1 참조) 라고.

 

예수의 말씀에 의해 인류의 본연성은 천명(clarification)되고, 죄는 단정되었던 것이다.

 

사람은 때부터 하나님 편은 아니다. 적이다.

사람의 성은 악한데 그치지 않는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로서 하면, 절망적으로 악이다.

 

(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한글개역).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자현에 대해 말하여 하나님의 성을 천명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인류의 태도에 대하여 말함으로서 사람의 성을 천명한다.

 

그러므로 () 고원(lofty)하기 그지없는 글임과 동시에 심연 측량할 없는 ()이다.

 

하나님을 사랑의 높으심(지고) 있어서 보여주고, 사람을 죄의 깊은데 있어서 나타내 글이다.

 

저자가 누구인가, 역사적 가치의 정도가 어떠한가 이건, 요한복음이 굉원 절대한 글임을, 경건으로서 이것을 연구하는 누구나가 의심하려 해도 없는 일이다.

요한복음의 이대 요목은, 하나님의 아들의 자현과 이에 대한 세상의 태도이다.

 

그리고 자현은 일시에 행해지지 않았다. 서서히 순서적으로 행해졌다.

 

이에 발전적 진보가 있었다. 예수는 순서적으로 능력과 은혜를 세상에 나타내셨다.

그리고 자현의 정도에 따라, 이에 대한 세상의 태도에도 또한 변화가 있었다.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시면 내실수록, 세상의 그의 대한 반대는 격렬해졌다.

 

소수의 그에 대한 흠모는 심후해졌다. 마치 태양이 온기를 발하면 발할수록 굳어져야 찰흙(점토 clay) 더욱 굳어지고, 부드러워져야 ( wax) 더욱 부드럽게 됨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자현은 단순히 자현으로서 그치지 않았다. 반드시 이에 대한 상당한 세상의 반응이 있었다.

 

어두움은 앞에서 흩어지지 않았다. 반대가 사실이었다.

빛이 증가되면 증가되는 만큼 어두움은 더욱 했다.

진리의 출현은 죄의 세상에 있어서는 반드시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장 명백하게 명시한 것이 요한복음이다.

 

예수는 자기를 세상에 나타내시기 전에, 먼저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어머니와 그를 따른 소수의 제자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그는 갈릴리의 가나에 있어서의 혼연(banquet) 자리에서 물로 포도주 되게 하여, 그가 어떠하신 분임과, 그의 사업이 무엇임을, 그의 근친들에게 보여주셨다.

 

그는 환희의 주시다. 그가 건설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왕의 향연이라는 , 기적이 보여주는 대로이다.

 

(2: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이는 그가 행하신 이적의 처음인 것으로, '그가 영광을 나타내셨도다'라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의 자현의 서막이라고 칭해야 것이다.

물론 자현에 대하여 별로 반대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의 어머니와 제자를 제외하고, 그밖에,

여기서 커다란 대기적이 행해진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내촌감삼의 (1914 9)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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