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요한복음의 교훈 3

거듭난 삶 2019. 4. 29.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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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교훈 3

 

 

예수 자신은 사람을 심판하지 않으신다.

그의 하신 말씀과 그의 행하신 일이, 사람을 심판하여 틀리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현 2 심판으로 끝났다.

 

신앙의 의롭다함을 얻고, 불신은 심판되었다.

하지만 자현의 진보에 따라, 세상의 이에 대한 태도에도 발전이 있었다.

은밀한 불평은 공공연한 반대로 되어 나타났다.

예수를 죽이려는 마음은 이때 이미 그의 교적 중에 생겨났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를 나타내심에 있어서 사람을 구원하고 있음과 동시에 적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이미 2, 예루살렘에 있어서 자기를 국인에게 나타내셨다.

그리고 2회는 2 모두, 자현은 효를 이루지 못했다.

 

유대인에게 신앙은 생겨나지 않았다. 반대로, 국민전체는 반대의 태도에 섰다.

이미 그를 죽이려 하는 징조마저 나타났다.

하나님의 아들은 선사(善事) 민간에게 행하여, 혐오하는 바로 되었다.

 

여기서 인가, 예수는 다시 성도를 떠나 갈릴리의 시골로 물러 가셨다.

그리고 민간 사이에서 일하여, 그들 사이에 참된 신앙을 일으키려 하셨다.

 

그도 역시 도시전도에 실망하여 농촌 전도로 옮기셨던 것이다.

그는 생각하셨던 것이다.

 

도시 인사는 받은 교화로 인하여 도리어 그를 받을 없고, 교법사의 감화에서 질박(simplicity) 시골 인사야말로 도리어 신앙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나님의 아들도 사람으로 되신 이상, 우리들 인간과 가지로, 실패에 의해 지혜를 배우시는 것이다.

 

때는 유월절 가깝고, 곳은 디베랴(9 132역주) 호수의 대안이다.

헤르몬(헐몬) 산정이 호수면에 비취고, 청초하여 천연의 융단(carpet)으로서 들을 덮다시피 곳에, 허다한 갈릴리인은 예수에게로 모여왔다.

 

군중을 그는, 여기서 그들의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을 없었다.

그는 여기서 유월절의 잔치를 베푸셨다.

 

보리떡 다섯과 물고기 마리로서, 거기에 모인 5, 000 군중을 환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배불리 먹게 하신 것은 커다란 기적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려 비로소 있는 기적이다.

오로지 그의 사랑에서 나온 기적인 것으로, 조금도 군중을 경악케 하렴에서는 아니었다.

 

예수는 여기서, 자기가 생명의 빵이심을 그들에게 보이시기 위해 기이한 일을 행하신 것이다(6).

 

그런데 결과는 어떠했던가?

 

질박한 갈릴리 호반의 백성은 예수의 기적의 가르치심을 받았던가?

그들은 그들 위해 마련된 썩지 않은 (양식), 썩지 않을 빵임을 깨달았던가?

 

아니, 그들도 역시 영감에 둔한 육의 어린아이였다. 그를 영혼의 구주로서 영접하지 않고서 빵의 공급자로서 모시려 했다.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들은 유대인처럼 그에 대하여 반대하여, 대자선가로서 그를 환영하려 했다.

이것을 보고 예수는 심히 탄식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빵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을 양식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는 양식, 인자가 주는 양식 위해 일하라'(6:26-27) 말씀하시어,

 

그의 실망의 뜻을 표시하셨다.

 

교회가 구하는 것은 교권,

사회가 구하는 것은 ,

종교가 아니면 정치가,

도시인사도 시골인사도

구하는 바는 거의 다름없는 것이다.

 

참된 복음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을 영접하는 점에 있어서는 도시와 시골(도비 town and country), 모두 동일하다.

 

도시에 격렬한 반대 있고, 시골에 두드러진 반대 없음을 보고서,

시골은 도시보다 전도적으로 유망하다고 수는 없다.

다만 양자의 취미가 다를 뿐이다.

 

사람의 영예를 귀히 여기고 영의 양식을 경히 여기며 육의 양식을 중히 여기는 점에 있어서, 시골은 도시와 조금도 다름없는 것이다.

 

그리고 경외할 예수도 역시 그의 실험(체험) 의해 슬퍼할 사실을 발견하신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의 시민에게 실망하심과 같이 갈릴리의 농부와 어부에 실망하셨던 것이다.

그는 갈릴리 호반에 있어서 빵과 물고기와의 증식의 기적을 행하심으로서, 더욱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임을 깨달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의 3회의 자현에 의해,

세상의 그에 대한 태도는 더욱 분명해 졌던 것이다.

 

도시에 있어서는 냉우가 아니면 반대,

지방에 있어서는 육욕적 환영,

모두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신 뿐으로서 그에게 만족을 주지 않으셨다.

 

그는 이때 이미, 인자로 되셔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지상 베개 없음을 더욱 깊이 느끼셨으리라.

 

이제 갈릴리의 시골도 역시 신앙흥기의 곳으로서 소망을 두기에 족하지 못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랴!

백성은 모두 여호와를 버리고,

영은 둔해져, 빛의 강림도 이것을 깨우치기에는 족하지 못하다면,

 

이제부터는 다시 , 혹은 ,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곳에서 말할 만큼을 말씀하시고 나타내실 있을 만큼 나타내시어, 그리고 마침내 땅에서 들려,

만민을 이끌어 자기에게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필경 이때에 있어서의 예수의 각오였으리라.

 

예수는 이미 3, 자기를 세상에 나타내시었다.

 

성전을 청결케 하심으로서 그의 정의를 나타내시었다.

병자를 고치는 것에 의해 그의 은혜를 나타내시었다.

그리고 군중을 키우심에 의해, 그가 생명에 이르는 진정한 (양식)이심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자현의 결과는 언제나 다수의 반대와 소수의 신앙이었다.

 

예수는 그의 선행에 의해 더욱 세상의 반대를 초래함과 동시에 소수의 신자의 신앙을 강하게 하셨다.

 

예수는 사람의 영혼을 키우시는 참된 빵이시다.

그는 모든 사람을 비추시는 참된 빛이시다.

그는 이제는 사람의 빛으로서 자기를 나타내셔야 되셨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때는 유대인의 초막절이었다.

그가 성내를 걸어가시는 , 소경 거지를 보셨다.

 

'예수 행하시는 , 나면서 소경 자를 보셨다'(9:1) 있다.

 

'보셨다', '보셨는데' 뜻이다.

그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셨다는 뜻이다.

그는 선민 중에 여기 그의 은혜를 받기에 족한 그릇을 발견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제사장도 아니고, 유사도 아니라, 나면서부터의 맹인이었고, 거지였던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사람을 편벽(eccentricity)되이 보시는 이가 아니시다.

일찍이는 이방 부인에게, 그것도 음부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그는,

지금은 여기서 소경인 거지에게 크신 능력으로서 나타내셨다.

 

간단한 방법과 일언의 명령에 의해 맹인의 눈은 열리었다.

 

(9:6-7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여기서 대기적이 행해져, 예수는 다시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전과 동연했다.

 

신앙은 더욱 전진하고, 반대는 더욱 격렬의 도를 했던 것이다.

 

눈을 거지는 처음에 예수를 예언자의 일인으로서 알았으나,

 

(9:17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사람이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유대인의 힐문과 박해에 의해 예수에 관한 그의 생각은 분명해져, 그가 신앙으로 인하여 유대교회의 추방하는 바로 되자, 그는 마침내

 

'주여, 내가 믿습니다고 하면서 그를 경배했다' 것으로서,

그는 예수를 경배해야 하나님의 아들로서 믿기에 이르렀다.

 

(9:38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그리고 믿은 거지의 신앙의 진보에 따라 유대인의 불신의 발전도 현재해 졌다.

 

유대 교회의 직분들은 이제는 예수를 '죄인'이라 부르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9:24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사람이 죄인인 아노라).

 

예수는 여기서 이미 2, 안식일을 깨뜨려, 모세의 율법을 범했던 것이다.

 

전에는 안식일을 깨뜨려, 모세의 율법을 범했던 것이다.

전에는 안식일에, 38 앓은 자를 고치시고, 여기서는 가지로 안식일에 나면서부터의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

 

그의 죄야 말로, 사할 없는 것이다.

 

'그들이 예수를 잡으려 했으나, 그가 손을 피하여 떠나니라' 것이고 보면, 여기서 유대인의 반대는 공공연하게 그에게 손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예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는 그의 선행으로서 그의 국인을 제도(salvation) 없음을 깨달으셨다.

 

하지만 그는 그의 내부에 있는 전부를 세상에 나타내지 않고서는 마지않으셨다.

그는 최후에 그의 최선을 세상에 나타내셨다.

그리고 결과로서 그는 그의 생명을 버리기에 이르셨다.

그리고 그러한 기회는 그의 친구인 베다니의 나사로의 죽음에 의해 준비되었다(11).

 

그는(예수), 그의(나사로) 자매에게서

 

'주의 사랑하는 병들었나이다' 소식을 받은 때에,

여기서 최후의 현영의 기회가 그에게 주어진 것을 지각하셨다.

'예수 이것을 듣고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죽는 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이로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시렴에서이다'(11:4) 라고 있다.

 

그리고 이는 그에게 있어서 커다란 위험이 따르는 기회였음은, 그도, 또한 그의 제자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베다니로 가시려 하자, 제자의 사람인 도마는 말했다.

 

'우리도 또한 가서, (예수) 함께 죽자'(11:16) .

 

예수는 여기서 죽음을 결하고서 베다니로 가셨던 것이다.

일찍이는 갈릴리의 가나 혼연석에서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 예수는, 이제 여기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에 있어서 친구를 죽음에서 소생하게 하시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의 최대의 증거를 주시었다.

 

가나의 기적으로서 시작하여 베다니의 기적으로서 끝마치셨다.

 

처음에 만물의 조물주로서 자기를 나타내시고,

나중에 생명의 주로서 대능을 보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라고.

 

나사로의 부활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가나의 기적을 행하신 ),

하나님의 정의의 체득자인 (성전청결의 의미),

하나님의 자애의 실현자이신 (병자 치유의 의미),

생명의 ()이신 ,

세상의 빛이신 그는,

 

모든 생명의 근원(원천)으로서 영원히 사시는 까닭에,

영원히 삶의 능력을 사람에게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여기 명시된 것이다.

 

베다니에 있어서의 사자(死者) 부활은 예수께서 행하신 최대의 기적이었다.

예수는 이상으로 자기를 세상에 나타낼 수가 없었다.

사람은 이상의 하나님의 나타내 보이심을 요구하지 않는다.

내촌감삼의 (191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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