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요한복음의 교훈 4

거듭난 삶 2019. 4. 30.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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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교훈 4

 

 

사자(死者) 죽으나 죽지 않고,

예수를 믿음으로서 말미암아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원히 있음이 명시되어,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알고자 하는 모두가 그에게 보인 것이다.

 

나사로의 부활은 물론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데서 비롯된 나사로 일인(一人) 위한 부활은 아니었다.

 

일시 죽음을 면하는 것은 커다란 은혜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러나 최대의 은혜가 아님은 분명하다.

 

예수는 나사로를 소생케 하시어,

, 나사로와,

그의 자매인 마르다와 마리아 그에게 수종 하는 그의 제자들과,

여기 모인 많은 유대인,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서 세계의 사람들에게,

(그분), 예수에게 부활의 능력과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이시기 위해,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기적도 다른 기적과 한가지로,

단순히 기이한 이적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기적이다.

 

예수는 나사로를 소생케 하시어,

그가 (말일) 모두 그를 믿는 자를 부활케 하시는 능력과 사업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무릇 나를 믿는 자는(모두) 언제까지나 죽는 일이 없다'(1:26) .

 

이것이 기적으로서 하신 대설교의 주제였다.

 

그리고 나타내 보이심에 접하여 유대인의 반대는 절정에 달했던 것이다.

 

'이에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회의를 열어,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이 많은 기이한 일을 행했도다. 만약 그를 이대로 버려두면, 사람 모두 그를 믿기에 이르리라…… 날부터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꾀하다'(11:47-53)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자현이 극에 달한 때에, 세상의 그에 대한 증오도 역시 극에 달했던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나사로의 죽음은,

그의 최대최고의 힘을 나타내는 기회로 되었으나,

그의 적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그를 죽이는 기회로 되었던 것이다.

 

베다니의 기적은 골고다의 비극과 서로 관련시켜 해석해야 것이다.

전자는 후자의 직접의 원인으로 것이다.

 

예수는 그의 친구를 소생케 하심으로 인하여, 제사장, 바리새인들의 포로(사로잡는바)되어, 마침내 그들의 죽이는 바로 되셨던 것이다.

 

이것을 기이하다면 기이하달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세인의 어떠함을 , 이것은 결코 기이한 아닌 것이다.

 

정의는 최후의 승리자라고 하는데,

그러나 정의는 세론의 찬성을 얻는 까닭에 최후의 승리자라는 것은 아니다.

세인의 세론은 언제나 정의에 거슬리는 불의에 ()하는 것이다.

 

만약 예수와 바라바와 누구를 택할까를 묻는다면,

세론은 언제나 항상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를 사하소서(18:40)하고 외치는 것이다.

 

그런데 '바라바는 도둑이다'라고 있다.

 

하나님께 거역한 이세상의 사람은,

오히려 도둑은 용서해도,

하나님의 아들은 이것을 용서치 않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은 신자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 한가지인(동일한) 이름이시다.

하지만 불신자에게 있어서는 국적, 불효자, 모든 악사를 종합한 명칭이다.

 

우리들은 일본국에 있어서도 일이 사실임을 알고 있다.

같이 하여, 예수는 전후 5회에 걸쳐 자기를 세상에 나타내 보이셨다.

그리고 결과는 세인전체의 반대와 소수의 신자의 경앙이 있었다.

 

그의 자현은 그에게 죽음을 가져왔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것을 쓰고 나서 자기의 관찰을 진술하여 말했다.

 

예수 그들(세인, 특히 유대교인의 직분과 신자들) 앞에 그렇듯 많은 기사(깊은 의미를 포함한 기적) 행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그래도 그를 믿지 않았다. 이는 예언자 이사야가 말에

 

'내가 말하는 것을 믿는 자는 누구랴. 주의 손을 누구에게 나타났던가!' 적중한 것이다.

 

이사야는 다시 말했다.

 

'그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 받을 없게 하기 위해, 그가(하나님) 눈을 어둡게 하시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도다.' 라고.

 

이러므로 그들은 믿을 없었다.

 

이사야는 (예수) 영광을 (미리) 보았음으로,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하지만 유사(정치가, 종교가, 이른바 상류사회의 사람들) 중에 허다히 그를 믿는 있었지만도,

그들은 바리새인(교권을 가진 종교가) 두려워하여 분명하게 그를 믿는다고 하지 않았다.

회당에서 배척될 것을 두려워함에서였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평판(명성) 기뻐함으로이다(12:37-43) 라고.

 

귀하신 예수의 33년의 세상의 생애는 요한복음 기자의 말로서 기록된 것이다.

 

대다수의 반대,

극히 소수의 신앙,

유사(공회원) 중에 신자는 생겨나지 않은 아니지만도

, 사람을 두려워하여 은밀히 그를 믿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를 믿고, 기탄없이 그를 세상에 소개한 것은 이방의 부인, 그것도 타락부인 아니면 소경 거지들 이였다.

 

세상의 정치가, 종교가들은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서는 모두 그에게 반대하고, 죄인으로서 그를 정부에 고소하여, 그를 절멸시키지 않고서는 마지않았다.

 

요한복음이 명백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이것이다.

 

글이 일종의 고적감을 띠고 있는 것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일이다.

 

'빛은 어두움에 비치나, 어두움은 이를 깨닫지 못했다'(1:5참조).

 

'그가 자기 나라에 오셨으나, 백성은 이를 영접하지 않았다'(1:11참조),

 

'이에(유대 사람들이) 그를 치려고 돌을 취하니'(8:59참조),

 

' 날부터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 모의했다'(11:53참조),

 

'세상이 만약 너희를 미워하는 때는,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는 것으로 알라'(15:18참조)…….

 

요한복음의 기록을 통한 예수의 생애는 결코 행복의 생애, 성공의 생애, 명예의 생애가 아니였음은 무엇보다도 분명하다.

 

예수 () 세상은 괴리(estrangement), 충돌, 결투로 끝났다.

그리고 이긴 것은 물론 세상이고, 것은 물론 예수였다.

예수의 일생의 현영과 전도에 의해 그가 얻은 것은 불과 12인이었다.

 

그밖에 소수의 신자는 있었대도, 이는 그의 복음을 맡기기에는 족하지 못했다.

그리고 12인은 모두 참된 신자는 아니었다.

중의 1인은 악마였다(6:70).

 

13 이하 17장에 이르기까지는, 예수께서 신자의 일군을 가르치고, 위로하신 기사이다.

 

'유월절 전에, 예수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이른 것을 알고, 세상에 있어서 자기의 백성(제자를 가리켜 말한다) 사랑하셨으니, 끝까지 이를 사랑하시니라'(13:1) 있다.

 

12인은 소수이다(그것도 중의 1인은 악마이다).

하지만 소수야말로, 그의 일생의 노동에 의해 거두어 드린 ,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눈동자 같이 귀했다.

 

그러므로 그가 이제 그들과 서로 떠나려 하는 있어서 그들을 가르치고 위로하는 말은 은근(politeness: intimate) 극했다.

 

사람의 붓으로 기록된 중에, 요한복음 13 이하의, 예수께서 제자에 대해 하신 이별의 말씀보다도 아주 적절(appropriateness) 것은 없다.

 

여기서 사랑의 순수(genuineness) 있다.

 

예수는 그를 믿지 않은 유대인에게 향해서는, 에둘러서 말하시고, 비유로서 깨우치셨지만도, 그를 믿는 제자에게 향하여서는, 숨김없어 사실 그대로 말씀하셨다.

 

이것을 알아차린 제자의 사람은 그에게 말했다.

 

'주께서 지금 밝히 말씀하십니다. 비유로 말씀하지 않습니다'(16:29) .

 

우리들은 13 이전에 있어서, 예수께서 세상에 대하여 취하신 태도를 보고,

13 이하에 있어서, 그가 그의 사랑하는 제자에 대하여 취하신 태도를 본다.

 

세상에 대해서는 운무(clouds and mist)처럼 포착(catch)하기 어려운 바가 있다.

그러나 제자에 대해서는 일광이 명백함 같이 명백하다.

 

성실은 불신에 대하여 실체를 보일 수는 없다. 다만 신앙에 대해서만 나라의 진미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의 진미를 나타내시기에 앞서서, 최후의 청세를 행하셨다.

악마인 유다는 제자들 가운데서 떠나야 것이었다.

그가 중에 있어가지고는, 예수는 자기의 진미를 나타낼 수는 없었다.

 

불신의 앞에 성실은 냉각하지 않을 없다.

불신은 신앙발전의 대방해이다.

유다가 떠나지 않은 예수는 제자들에게 향하여 그의 최선최미를 말할 없었다.

'유다는 조각의 (식물) 받고 나갔다. 때는 이미 밤이었다. (유다)그가 나간 후에,

예수는 말씀하시기를, 이제 인자는 영광을 받는다……'(13:30-31) .

 

세상은 예수를 버리고 예수 자신은 이제 세상의 최후의 분자를 그의 신변에서 물리치심으로서, 그는 나서 처음으로 여기서 하나님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있게 것이다.

 

넓은 세계에 자기를 합쳐 겨우 12,

이것이 그때의 예수의 일단이다.

지상의 천국이다.

세상의 누룩을 섞지 않은 누룩 없는 ()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강세와 그의 33년의 가난한 생애는, 소근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귀하다, 하나님의 교회.

교회란 이러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만들고,

이렇게 하여 성립하는 것이다.

 

우리들이라 해도 그러한 의미의 있어서의 교회는 이것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소한 양군을 이끌고서 예수는 세상과 최후의 충돌을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8 이하는 예수 () 이세상의 최후의 결전을 기록한 것이다.

 

암흑은 정권과 교권과 배신자의 향도(guidance) 얻어, 광명을 향해 쳐들어 왔다.

 

광명 군중에 대동요가 있었다. 병졸은 군주를 혼자 남겨 놓고서 모두 도망쳐 버렸다(가련한 약졸들이여).

 

그러나 구주는 혼자 서서 더욱 강하셨다.

그는 혼자 적의 강성(a fort) 침입하여, 의거한바 기초를 분쇄했다.

그러나 자신은 적봉에 희생되어 사라졌다.

 

세인의 눈으로 , 싸움은 전연 하나님의 아들의 패배로서 끝났다.

암흑군은 개가를 높여 기뻐했다.

그들은 그의 시체를 아리마대의 요셉의 무덤에 장사했다.

생각하기를,

 

'우리들은 이렇게 하여 나사렛 사람의 광적 복음을 봉쇄해 버렸다. 이제야 우리에게 영구의 평화는 왔다'.

 

하지만 보라.

 

부인,

예수의 부활을 고하는 자가 있었다.

도망쳤던 그의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다.

 

여기에 세상의 이론으로서는 도저히 없는 이상한 대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년도 되지 않았는데,

예수를 죽인 자는 모두 멸망되고,

죽임 당하신 예수의 복음은 전지에 선전되기에 이르렀다.

 

예수의 생애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종국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반대인 생이었다.

 

예수는 세상에 버린바 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세상을 버리지 않고 서서히 이것을 자기에게로 거두어들이시고 있다.

 

현세에 있어서는 실패,

후세에 있어서는 대성공,

세상에 증오되고서 세상에 이기셨다는 ,

이것이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예수의 생애의 귀한 교훈이다.

 

위대하도다, 요한복음!

 

하지만 지금의 그리스도 교회는 어떤가?

지금의 그리스도교 청년회는 어떤가?

예수처럼 세상에 증오되지 않고서 도리어 세상의 환영을 구하고,

이것을 기뻐하며,

이것을 자랑삼는다.

 

예수는 그의 일생 동안에 11인의 신자를 얻는데 지나지 못했는데,

지금의 교회와 청년회는 1회의 설교 회에 백인의 신자를 얻었다고 하여 기뻐한다.

 

예수는 유사 중에 일인의 공적 신자를 가지셨는데,

지금의 이른 그리스도 신자들은, 공작, 백작의 찬성 원조 있으면 천지의 찬동을 얻은 것처럼 기뻐한다.

 

귀하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

비열하다, 현대의 교회의 감독과 목사와 전도사여.

 

그들은 성서를 배우고 요한복음을 송찬하면서 명백한 교훈에 거슬리고 있는 것이다.

 

오인은 여기서 새로이 요한복음을 그들에게 권하여 그들의 개전(repentence) 촉구하지 않을 없다.

오인은 이렇게 말한대서, 자신이 그들을 저주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어떤 다른 이가 오인의 뒤에 서서,

오인으로 하여금 이것을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라 믿는다.

 

내촌감삼의 (191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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