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거듭난 삶 2019. 5. 1.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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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신 예수

 

: [ 1: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것이 없느니라

4)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 우주 창조의 시작을 선포하는 1:1 연상시키는 구절을 매개로 하여,

저자 요한은 구약과 일관된 흐름으로 신약의 복음서를 쓰고 있다.

 

(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계시의 시작인 천지 창조의 기사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에 이르러 계시가 완성된다고 , 구절은 복음서의 서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태초'(아르케)라는 용어는 원래 '시간과 공간의 시초' 의미한다.

따라서 고대 그리이스의 자연 철학자들은 '만물의 시초(始初)'라는 뜻으로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처음 시간의 특별한 시험뿐만 아니라 () 시간적인 영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참조 : (1:1-18).

 

말씀이 - 원어상 '말씀(로고스) '수집', '계산', '목록', ''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용어는 철학적인 의미로서

 

(1) 어떤 법칙, 의미, 구조의 내용,

(2) 형이상학적 실재나 사물을 이해할 있는 법척,

(3) 우주론적인 실재들을 표상하는 개념 등으로 사용되었다.

 

용어를 신학적 의미로 전환시킨 사람은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던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였다.

 

그는 '하나님의 로고스'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며,

인간을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중재자( 대변자거나 제사장) 부각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로고스 하나님의 창조 능력의 총화(總和)이자 세상을 질서있게 다스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성경 전반에 걸쳐서 '로고스' 주로

 

하나님의 권능과

 

( 147:15 명을 땅에 보내시니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148:8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말씀을 좇는 광풍이며;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계시를 의미한다.

 

( 2: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26:1 유다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 초에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딤전 5:17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특히 요한은 본절에서 '로고스' 영원성, 인격성, 신성(Deity) 부각시킴으로써,

'로고스' 바로 계시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임을 보여준다.

 

본절에서와 마찬가지로 14절에서의 '말씀'에서도 '로고스' 인격성이 뚜렷이 표현되고 있다.

 

본서에서 '믿다'(피스튜오), '사랑'(아가페) 더불어 주요 개념으로 쓰인 용어(로고스)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강화(講和) 구성되어 있는 본서의 특성까지도 드러내고 있다.

 

계시니라 요한은

(1) '로고스' 태초의 어느 시점에서 창조된 것이아니라 계속하여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아울러

(2)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 영원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당시의 이방 철학의 인본주의적 경향과 유대교적 신관(神觀) 오류를 분쇄하고,

세상의 시초 이전에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존재하였다는,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계시다는 엄연한 사실을 선포한 것이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하나님과 함께' '서로 마주 대하는'이라고도 해석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다는 사실을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영화로우신 '친교'(Robertson)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위 일체 교리의 근간' 되고 있다(Calvin).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 본문은 성자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간결하고도 명확한 선포이다.

 

이러한 성자 하나님의 모습은 20:28 도마의 고백에서 확실하게 밝혀진다.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한편 3개의 문장으로 기술된 본절은

 

(1)말씀의 선재성과 영원성,

(2) 인격성. 그리고

(3)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선언은 요한복음 전체의 기독론(Christology) 대변한다.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에 관한 심오한 내용을 문장으로 간결하게 함축한 것으로서 복음서 문장 양식 백미(白眉)라고 하겠다.

 

 

 

[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1절의 문장의 내용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반복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 방법이다.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자녀 교육시 반복을 통해 기억시키는 학습법을 흔히 사용했다.

 

( 13:9 이것으로 손의 기호와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으로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능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특히 시편의 반복적 찬양시들과

 

참조 : (118;136)

 

잠언의 반복적 교훈들은 이스라엘의 반복 교육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8 아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4:1-4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2)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법을 떠나지 말라

3) 나도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었으며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었노라

4)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말을 마음에 두라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6:20 아들아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13: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

 

이러한 반복 교육은 내용을 강조하고 그것을 상대방(피교육자)에게 선명하게 주입시키려는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히브리적 교육을 받았던 저자 사도 요한은 율법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철저히 전파하고 교육시키기 위하여 반복적인 문장을 자주 소개했다.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것이 없느니라;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없느니라,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없느니라,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특히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라는 표현이

 

다른 복음서에서는 번도 사용되지 않았는데 반해서 요한복음에는 무려 25회나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사도 요한의 교육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요한일서도 사랑을 주제로 문장의 반복을 심층적으로 구사하면서 과거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사랑의 중요성을 마음속 깊숙이 심어준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은 무척 늙어서 강대상에 올라 없었을 , 제자들이 그를 의자에 앉히고 강대상에 올려 때마다

 

'어린 아들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동일한 말씀을 전했다고 한다.

 

같은 말만을 반복하자 제자들이 이유를 여쭈었다. 그때마다 요한은

 

'이것이 주님의 교훈이니 이것만 실천하면 족하다' 하였다고 전한다(Jerome).

 

이렇듯 복음서와 서신의 집필 그리고 죽을 때까지 주의 말씀을 꾸준하게 반복적으로 선포한 사도 요한의 자세에서 말씀에의 사랑과 말씀 전파의 숭고성을 볼수 있다.

 

끊임없이 말씀을 상고(詳考)하고 배우는 자세는 구약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말씀과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들의 참다운 태도이다.

 

( 119:9 청년이 무엇으로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105 주의 말씀은 발에 등이요 길에 빛이니이다;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것이 없느니라

 

만물이 - '만물'이란 현재의 시점에 국한된 우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는 우주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용어는 역사와 더불어 존재하는 만물을 의미한다.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사도 바울은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1:16)이라고 공간적인 의미로서 만물을 정의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 이러한 표현은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 11:36)라고 표현한 바울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말미암아' 성경 전반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서 주로

 

(1) 창조와

 

( 2: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2) 구원사역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역할을 드러낸다.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노릇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노릇 하여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본절에서 말미암아 창조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킨다.

 

1절에서 언급한대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고려한다면, 창조시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수단으로서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1:26)라는 말씀에서 있듯이 대등한 인격적 친교를 바탕으로 사역이었던 것이다.

 

지은바 되었으니 - 이는 그리스도께서 () 상태로부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암시한다.

 

또한 본절에서는 '만물'(all things, NIV) 주어인데 반해서 1절에서는 '말씀' 주어이다. 이로써

 

(1) 말씀은 존재하고 있었으며,

(2) 만물은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만물 하나님의 우주적 사역의 현장이며, 수단임에 비하여,

말씀 하나님과 더불어 항상 존재해 왔다.

 

 

 

[ 1:4]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 '생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조에' '영원한'(아이오니오스)이라는 형용사를 수반하여 '영생'이라는 용어로 자주 등장한다.

 

(3:15-16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일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한편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생명의 주인으로 나타난다.

 

( 104:29-30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30)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생명관이 반영된 것이 본문의 '생명'(조에)이다.

 

따라서 저자 요한은 '생명'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이 영원한 생명(영생)임을 명시한다.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자가 없느니라;

 

17:3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영접하는 성도들에게는 영생이 부여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본원적(本源的)으로 존재하고 있는 영생을 매개로 하여 영원한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사람들이 빛이라 - ''(the light) 대한 개념은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발견할 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1) 빛을 발하는 구름이나

 

( 37:15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구름의 번개 빛으로 번쩍번쩍하게 하시는지 네가 아느냐)

 

불기둥 가운데 현현하시는 .

 

( 78:14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화광으로 인도하셨으며)

 

(2)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는,

 

( 12:22 어두운 가운데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데로 나오게 하시며)

 

빛나는 .

 

( 42:16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 흑암으로 앞에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것이라 내가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3) 빛과 어두움의

 

( 5:8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4) 이스라엘의 영원한 빛으로 묘사되고 있다.

 

( 60:1-2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위에 임하실 것이며 영광이 위에 나타나리니)

 

따라서 요한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 인류에게 임할 빛이라는 사실을 피력하고 있다.

 

(1:9 세상에 와서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이러한 생명과 빛은 창조되었거나 형성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삼위 일체 하나님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성도들로 하여금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36:9)라는 기쁨의 찬양에 이르게 한다.

 

 

 

[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 빛과 대조되어 나타나는 '어두움'(스코티아) 앞절에 비추어 , 생명을 가로막는 죽임의 세력, 사단의 세력과 세력 하에서 부단히 죽어가는 죄악된 세상을 상징한다.

 

본문은 죄악된 세상과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인 성육신을 통하여 죄악된 세상인 이세상 안으로 임하셨다는 뜻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승천 후에 생명의 빛은 소멸한 것이 아님을 있다.

 

따라서 생명의 빛은 지금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도들에게 비추이며 생명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빛의 군사로서 어둠의 세력과 끝까지 투쟁하는 능력을 공급하고 있다.

 

(딤전 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죄악된 세상 속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것이 바로 본서의 전반적인 맥락이다.

 

따라서 저자 요한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생명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한 세상의 정체(正體) 준열하게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어두움의 세력에 휘말린 세상이 이제 재림하실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요한계시록에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1)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죄악된 세력의 실상을 깨우쳐 주며

(2) 죄악된 세력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빛의 세력을 궁극적으로는 '이길 없는' 사실을 보여준다. 참조 :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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