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거듭나야 할 니고데모

거듭난 삶 2019. 6. 1.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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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나야 니고데모

 

요한복음 3 1-4 :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표적을 아무라도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있삽나이까.


 

워키간에 위치한 Bonnie Brook Baptist Church 목사님의 이야기가

"무디"라는 잡지에 실렸습니다.

목사님의 이름은 케빈 크래스입니다.

 

그는 목회자뿐만 아니라 웨스트레이크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고 있기도 합니다.

운동 코치로 봉사하기도 하고, 이사회 멤버로 일하기도 합니다.

그의 좋은 성품으로 인해 동네에서는 어쩌면 가장 알려진

인물중의 하나이기도 같습니다.

죠깅하는 그의 모습, 자전거를 타면서, 운동장에서는 열정적으로

소리지르는 아주 건강한 사람이었습니다.

 

1996 2월의 어느날 복부에 갑작스럽게 심한 고통이 있어 병원을 찾게 되었습니다.

단층촬영까지 하게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결과는 생각보다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장에 조그만 혹이 하나 생겼다는 거예요.

그래서 90 정도 걸릴 것이라는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졌습니다.

복부를 개복하고 닥터의 얘기는 상상할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몸에 암이 퍼져버려서 손을 조금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병원에서의 투병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투병 와중에도 케빈의 태도가 예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의사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를 만나는 최소한 10 이상의 모든 의사들에게 그를 찾아 때마다

그와 함께 기도해달라는 요청을 것입니다.

 

간호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간호원들은 가능하면 환자와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케빈의 부드러운 성품으로 함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로 그를 치료하던 간호원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간호원은 함께 대화를 나눈 곧장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도를 드릴 있게 되었고, 다른 간호원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다음에 동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니 사람 도대체 어떻게 사람이지요?

What is that guy?

 

그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영원히 사는 것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니

He is dying, but he's talking about living forever.

 

도대체 어떻게 사람인가요?"

 

그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인 루이 팔라우의 Say Yes Chicago라는 켐페인에 나가 간증을 합니다. 그의 간증을 통해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습니다.

케빈이 찾아가는 꽃집의 주인도 바로 그녀의 가게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I don't want to go to heaven without you."

'하늘나라에 당신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여러분,

도대체 무엇이 케빈을 이렇게 바꾸어 버렸습니까?

무엇이 얼마 있지 않으면 죽을 사람으로 하여금,

아니 지금 죽어가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히 ", Living forever 관해 용감하게 말할 있도록 만들었습니까?

 

 

사람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당시에는 가장 위대한 종교지도자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는 권력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곳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다스릴 있는 종교적인 권한을 가진

산헤드린의 정식 회원이었습니다.

 

그는 선택된 사람 중의 선택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6천명을 넘지 않는 바리새인 중의 한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생명을 바쳐 십계명을 준수하기로 서약한 사람입니다.

진실로 하나뿐인 하나님만 섬깁니다,

우상을 포기합니다,

부모를 공경합니다,

거짓과 간음과 도적질과 탐심을 버리며 삽니다.

하나님과 사람보기에 모자랄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도대체 모자랄 없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것입니다.

그것도 밤중에 말입니다.

무언가 고민하고 있는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까?

찾아왔습니까?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깊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밤중에 위대한 종교 지도자인 그가 예수님을 만나러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아나이다."

 

위대한 선생인 니고데모가 오히려 예수님을 랍비라고,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겸손한 지도자였습니다.

사실 니고데모 자신은 이스라엘 누구에게든지 랍비라는 칭호를 듣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랍비라고 부를 사람은 자신을 가르쳐준 스승 사람 외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일개 목수 출신인 예수에게 랍비라는 칭호를 붙이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표적을 아무도 없음이니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표적의 얘기를 익히 듣고 있었던 같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표적들은 하나님이 아니시면 행하실 없는 것임도

솔직하게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기심이나 질투가 담기지 않은 순수한 고백을 것입니다.

그는 순전한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에게 나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니고데모보다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나은 사람이라고 자부하십니까?

그리고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그리스도 앞에 솔직하게 나와서 예수가 하나님의 능력을 베푸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찾아가십시오.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외칩니다.

 

"민족들아 가까이 나아오라... 우리가 가까이 하여 서로 변론하자."

 

주님께 찾아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접어두고 앞에 우리는 나와야 합니다.

나와야 분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자리에 예배를 드리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금 우리 주님 앞에 내어 놓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분의 음성을 듣게 되는 은혜가 시간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말을 들으신 예수님의 대답이 조금 엉뚱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없느니라" 지금

 

니고데모는 전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있는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니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입니까?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내시는 것일까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엉뚱한 말씀은 절대로 하시지 않습니다.

밤새도록 고기 마리 잡은 베드로에게

그물을 어디에 던지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하시지요?

 

분명 그것은 시몬 베드로의 어부 상식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 5 5)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의 고기를 잡게 것입니다.

 

그리고 가지 기억하실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 기억해야 것은

 

"주님은 우리를 가장 알고 계신다" 사실입니다.

 

우리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앞장인 2 24 보실까요?

 

"예수는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가장 아는 사람은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부모도 아닙니다.

 

누가 가장 아십니까? 주님입니다.

시편 139 13-16절을 제가 공동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당신은 오장육부를 만들어 주시고 어머니 뱃속에 나를 빚어 주셨으니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은 몸을 속속들이 아십니다.

은밀한 곳에서 내가 만들어 깊은 속에서 내가 꾸며질

마디마디 당신께 숨겨진 하나도 없습니다.

형상이 생기기 전부터 당신 눈은 나를 보고 계셨으며 됨됨이를

모두 당신 책에 기록하셨고 나의 나날은 하루가 시작하기도 전에

하루하루가 기록되고 정해졌습니다."

 

속속들이 나를 아시는 분이 바로 주님입니다.

 

바로 그런 분이 니고데모의 전혀 묻지 않은 말에 엉뚱하게 보이는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없느니라"

 

여러분,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아시겠습니까?

바리새인, 유대인의 관원 니고데모에게는 영적인 빈곤이 있었습니다.

영적인 메마름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하면 나의 눈으로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곳에 들어갈 있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의 스승이어도,

아무리 그가 율법을 그렇게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어도,

아무리 산헤드린의 종교적 지도자로 떵떵거리고 있었어도,

그의 영혼 구석에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으면,

아무리 다른 것으로 포장되어 있어도,

부족함 없이 살아가는 같아도,

돈이 있어 자랑스럽게 뽐내고 다녀도

인생은 언제나 갈급함뿐입니다.

 

이것이 채워져야 합니다.

문제가 해결되어야 영적 공허감은 사라질 있습니다.

 

어느 수녀 시인이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오늘은... 하나님 당신 아닌 누군가에게 기대를 걸었던

나의 어리석음도 뉘우치면서 당신 안에 평온히 쉬고 싶습니다."

 

이런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것에 기대하면서 사는 우리의 삶에 종지부가 찍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에 기대면 기댈수록 우리 삶의 공허감은 커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니고데모의 이런 공허감이 자리 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가질수록 목말라오는 인생에 우리는 이상 묶여 살수가 없습니다.

마시고 먹어보아도 목마르고 배부르지 않는 공허감 때문에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다시 거듭 수가 있습니까?"

 

니고데모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다시 태어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있습니까?

어머니의 뱃속에 어떻게 다시 들어가서 태어날 있겠습니까?

 

그의 마음은 답답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해할 없는 이야기가 자꾸만 예수님에게서 나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니고데모에게 이런 영적인 것을 이해할 있는 눈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영혼의 문제를 육적인 가치판단의 눈으로 쳐다보려고 하니 어찌 이해가 되겠습니까?

 

생떽쥐베리가 "어린 왕자"라는 책에는 이런 내용이 등장합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하지.

그래서 네가 만일 친구 하나를 만났다고 그들에게 말하면,

그들은 정작 친구에 관한 정말 중요한 질문-

 

친구의 목소리는 어떻든?

어떤 게임을 제일 좋아 한다구?

나비수집을 좋아하는 친구니?

이런 질문은 하지 않고 엉뚱한 질문만 하는 거야.

 

' 아빠가 돈을 얼마나 버신다니?'

 

이런 질문을 통해서만 어른들은 사람들을 알려고 하지.

만일 네가 그들에게

 

'오늘 너무 멋진 집을 보았어요. 장미빛 나는 벽돌로 만들어지고,

창문에는 제랴늄이 가득 피어있구요,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멋있게 앉아 있었어요' 라고 말하면

그들은 전혀 집이 어떤지 알아차리질 못하지.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한단다.

 

'오늘 십만불 짜리 집을 봤어요' 그렇게 말하면

 

'! 정말 멋지겠는 '이라고 말한단다."

 

생각이 다르면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영적인 문제는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일에 얽매여 사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말씀을 빨리 알아들을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영의 일을 생각하기 시작하십시오.

그래야 그리스도의 말씀이 들려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예배에 빠지지 않는다고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만은 없습니다.

 

달라스에서 있었던 일이라 합니다.

풋볼경기를 엄청 좋아하는 성도님이 계셨습니다.

하필 달라스 카우보이 경기하는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예배 마치는 시간에 하기만 해도 좋을텐데 12시에 경기가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 나가지 않을 수는 없고, 경기를 놓치기는 싫고 해서 자동녹화를 해놓고 라디오를 들고 교회에 갔습니다.

 

목사님이 보이지 않는 예배당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귀에 이어폰을 꼽고

뒤로 선을 보이지 않게 하고서 예배를 드립니다.

 

설교가 무르익어 갔습니다. 경기도 시작되어 열기가 슬슬 더해갔습니다.

조금 지났는데 갑자기 성도님이 벌떡 일어서면서 양손을 번쩍 들고

"터치다운!"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이런 분도 성도님이라 불러야 합니까?

아마 지어낸 이야기이겠지요?

 

이렇게 질문해 보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정말 영적인 일에 관심이 있는가?

나는 무엇에 관심을 쏟고 있는가?

말씀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날마다 하면서 살수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거듭날 있는지를 묻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없느니라

육으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거듭난다" 말은

 

태어난다,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고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태어 난다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태어나야 합니다.

번은 물로, 번은 성령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여기서 물은 자연적인 출생을 말합니다. 양수에서 태어나지 않습니까?

이런 태어남은 육으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이것으로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으로, 죄로 더럽혀진 몸으로 구원을 받을 육체는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결국 육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태어남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다시 니고데모가 묻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있겠습니까?"

 

무슨 방법으로 되겠습니까?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하면 하늘로부터, 위로부터 태어날 있습니까?

 

예수님의 설명을 들어보십시오. 구약의 사건으로 되돌아 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 지방을 피해 가려고 호르산을 떠나 홍해바다 쪽으로 둘러가다가

가는 동안 마음이 상하면서 모세와 하나님께 원망하면서 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어쩌자고 우리를 에굽에서 데려 내왔습니까? 광야에서 모두 죽일 작정입니까?

보십시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습니다. 그리고 거친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불뱀을 원망하는 백성중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독이 얼마나 강한지 뱀들에게 물린 백성들이 즉각적으로 죽임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간사한 백성들이 어느새 모세에게 와서

 

"뱀이 물러갈 있도록 여호와께 기도해달라" 간청을 합니다.

 

그들의 부탁을 들은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독특한 해결방법을 주십니다.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나을 있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말이지 쳐다 사람은 모두 살게 것입니다.

독이 몸에 퍼져 당장이라도 죽게 사람이 쳐다보기만 하면 살게 되는

이상한 기적적인 사건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으로 거듭날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방법을 발견하셨습니까?

 

뱀에게 물린 자들이 뱀을 쳐다보아 살게 되었던 것처럼,

자신을 믿기만 하면, 니고데모의 지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율법을 칼날같이 지키는 것으로도 아니고,

산헤드린의 막강한 멤버자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있고 들어가게 주시겠다는 엉뚱한 비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믿을 하지 않는 비법,

시시한 비법,

뭔가 달라야 믿고 싶은 처방을 듣고,

그대로 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완전히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놓아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들어가는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워터 게이트 사건의 주모자로 몰린 콜슨이

"Born Again"에서 그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분이 나를 구원하시지 않으시면 내가 길은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내가 모든 것을 갖추기 하면

하나님 나라가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일이 가지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에 기대는 것을 포기하고 분만을 쳐다보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늘나라를 있고 들어갈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영적인 일에 관심이 없는

모조품 신앙인으로 살아가시는 분이 계십니까?

 

바울이 시간 이렇게 도전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후 13 5).

 

살펴보십시오. 확인해 보십시오.

그리고 아직까지 장대에 달린 뱀을 쳐다보지 못한 분이 계시면

시간 주님을 만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려고 땅에 오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사람의 니고데모가 계십니까?

거듭나게 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거듭나면 우리의 삶은 바뀌게 것입니다.

 

작가 연희씨가 "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책에는

 

중공군 포로 수용소 병원에서 중공군 환자들을 돌보다 죽은 의순 선생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그는 6.25 발발하자 남으로 피난하다 미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거제도로 끌려간 그는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며 말도 통하지 않는

중공군 환자를 돌보다 석방을 얼마 앞두고 숨을 거둔 포로수용소의 밀알이었습니다.

 

그가 죽었을 포로된 환자들이 맹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글은

우리에게 거듭난 자의 삶을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의순 선생 영전에 드립니다.

 

평화의 왕자, 화평의 사도, 인애의 ,

우리에게 사랑의 주인이셨던 맹의순 선생이 가시다니...

전쟁이라는 것에 화가 났고 우리를 전장에 보낸 자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들을 죽도록 원망했습니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맹선생은 병동을 찾아와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선생은 중환자들이 심하고 무거운 고통에 짓눌리는 시간

새벽 두시면 병동으로 오셨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를 골고루 만져주고 주물러주면서 그렇게도 간절하게 기도를 하십니다.

 

겨울이면 따뜻한 물로 여름이면 시원한 물로 우리들의 얼굴을 씻어주고 손을 닦아 주십니다. 발도 씻겨 주십니다. 넉넉치 않은 수건을 정성껏 깨끗하게 빨아 사람 사람 고루 씻어 주십니다.

 

선생의 손에는 신비한 힘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손이 얼굴에 닿으면 시원하고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염치없이 번만 번만 그분의 손을 씻기는 것을 바랬습니다.

우리는 선생에게서 사랑의 신이 계시다는 것을 보고 깨닫고 알기 시작했습니다.

 

포로가 되고 팔이 잘려 나가고, 눈을 잃은 , 살점이 달아난 ,

동상으로 살이 문드러 자가 되어 적군의 손으로 치료를 받는 자가

우리의 마음은 끝없는 원망과 증오가 굳어져서 깜깜하기 이를 없었습니다.

 

자리에 맹선생이 오셨습니다.

맹선생의 숨결은 우리의 두꺼운 껍데기를 녹여 주셨습니다.

얼음장처럼 차고 두껍고 어둡던 마음의 문을 기도와 찬미와

손을 대어 만져주던 사랑으로 녹게 주셨습니다.

 

사랑의 따뜻함이, 철문이 되어 단단하게 빗장 질러졌던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주시고 빗장이 풀리게 주셨습니다.

 

지난 8 11 새벽에도 선생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잠이 들었지만 우리들은 거의 선생께서 석방되시리라는

소문을 듣고 있었기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선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통과 성경책 그리고 번역한 찬송가를 베껴 종이 묶음을 들고 오셨습니다.

 

내일은 이곳을 떠난다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 사람 침대 머리에 꿇어 앉아 손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중환자들에게 가셔서는 얼굴 씻기고 씻기는 일을 다른 날과 다름없이 하셨습니다.

선생은 환자들을 씻겨 주시면서 베껴서 나눠 주신 찬송가를 나직하게 부르셨습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훈계로서 인도하며 도와주시기를 바라네

위태한일 면케하고 품어 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다시 만날 우리 서로 만날

다시 만날 그때까지 주님 함께 계심 바라네'

 

선생은 한사람 사람 중환자를 씻기시며 울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따라 울었습니다. 선생은 석방이 되셔도 곳에서 일할 있는 길을

찾아본다고 하셨지만 우리는 암담했습니다.

 

마지막 환자를 씻기고 일어난 선생은 눈물을 씻을 생각도 하지 않고

시편 23편을 우리말로 더듬더듬 읽어 주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셨으니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봉독하신 높은 곳을 바라보시며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 잔이 넘치나이다 내잔이 넘치나이다"

 

우리는 그를 바라보며 그의 말씀을 따라 외웠습니다.

선생은 마지막 환자를 씻겨낸 물통과 대야를 들고 일어나셨습니다.

순간 어딘 곳을 향해 높고 높은 곳을 바라보며 남겨두고 가시는 우리들을

부탁하시듯 높은 곳을 바라보시던 그대로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미국인 의사가 달려오고 앰뷸런스가 와서 선생을 실어간 우리는 자책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아침이 밝아 전해진 소식은 선생께서 운명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맹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어쩌면 맹선생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세상을 떠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맹선생과 함께 주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거제리 포로수용소 중공군 병동의 환자들 일동.

 

거듭난 니고데모가 여기에 살아 있습니다.

여러분도 거듭난 니고데모로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주님을 만나보십시오. 그리고 변화의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