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거듭난 삶 2019. 6. 10.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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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 [ 3:22-30]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침례를 주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침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저편에 있던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침례를 주매 사람이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없느니라

8) 나의 말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 3:22]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침례를 주시더라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 메시야에 대해 냉담한 예루살렘 도시를 떠나 유대 지경 내의 변두리 마을로 물러가신 것을 나타낸다고 있다. 정확히는 없지만, 그곳이 요단 근처의 평야이거나 아니면 여리고 근접한 지점일 것으로 추정된다.

 

침례를 주시더라 - 예수께서 침례(baptizing) 베푸셨다는 기록은 사복음서를 통틀어 여기에만 나오는데

 

예수께서는 친히 침례 요한의 증거를 진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셨으며 침례 요한의 제자들 중에 예수를 열렬히 따르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자연스러운 과도기적 수단으로서 침례 요한식 침례를 긍정적으로 허용하셨으리라 이해된다.

 

한편 예수께서 몸소 침례를 베풀지 않고 제자들에게 대행시킨 이유 중의 하나는 역시 제자화 훈련(弟子化 訓練) 맥락에서 이해된다.

 

 

 

[3: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침례를 받더라

 

살렘 가까운 애논 - 지명이 현재의 어느 위치를 가리키는지는 분명지 않다.

 

'살렘'(Salim) '평화'라고 하는 셈어적 기원을 갖고 있는 지명이며,

'애논'(Aenon) ''이라고 하는 아람어의 복수형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지명들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있다.

 

(1) 베레아 지역 요단강 건너편으로 보는 견해.

우리가 알다시피 침례 요한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28 일은 요한의 침례 주던 요단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이니라).

 

(2)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 남방 8마일 지점 요단 계곡의 동쪽으로 보는 견해(4세기의 유세비우스).

 

(3) 세겜으로부터 동서쪽으로 4마일 떨어진 곳에 옛부터 알려졌던 '살림'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북동쪽으로 8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현재 '아이눈'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애논' 것이라고 보는 견해.

비록 현재 이곳은 물이 전혀 없지만 과거에는 많은 샘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Albright)

 

(4) 또한 1세기 초기에는 '살렘'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Cheyne).

 

한편 크리거(Krieger) 저자의 확실치 않은 지리적 보고(報告) 상징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는데 요한의 침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평화에 가까이 있게 해주지만 그러한 평화를 제공하지는 못하는 반면 예수의 침례는 구원과 평화(살렘) (애논) 펑펑 솟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 3: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 이는 저자와 당시의 직접적 독자들이 침례 요한의 투옥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저자가 침례 요한의 투옥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공관복음서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요한의 관심사가 예수의 사역에 보다 밀도있게 집중되고 있다는 등에서 찾을 있다.

 

본서에서 침례 요한이 등장하는 유일한 의의는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다.

 

한편 요한은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서술하고 있지 않는 내용 침례 요한과 예수의 동시적 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이후에 요한이 투옥되고 갈릴리에서의 공적인 등장이 있기 이전에 초기에 유대 지방에서 전도 사역을 행하셨던 셈이다.

 

 

 

[ 3: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 요한의 제자들은 어떤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淨潔) 관한 논쟁을 하고 있었는데,

논쟁(argument) 유대인들이 행하는 일반적인 정결 예식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정결 예식에 반대하여 요한과 예수가 행하는 침례에 관한 것인지

또는 요한과 예수가 각자 따로 행하는 침례에 관한 것인지 명확지 않다.

 

한편 '변론' 아마도 요한의 제자는 유대인과 더불어 침례 요한이 주는 침례의 의의와 효력에 대해서 바리새파와 엣세네파 그리고 예수가 행하시는 침례와 비교하여 변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이어지는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침례 요한의 침례와 예수의(제자들의) 침례 어느 것이 확실한 근거를 가질 것인가에 관한 변론이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 3: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저편에 있던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침례를 주매 사람이 그에게로 가더이다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라고 하는 정확한 호칭으로 부르지 않은 것은 예수를 깎아 내리고자하는 그들의 의도를 반영한다.

 

요단강 저편인 베다니에서 침례 요한은 예수의 메시야이심을 증거 하였고,

 

(1:19-28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묻되 네가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자라

25)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침례를 주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섰으니

27)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28) 일은 요한의 침례 주던 요단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이니라)

 

또한 예수께 침례를 베풀었다.

 

( 3:13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신대).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는 침례 요한에게 빚을 자요,

감사해야 자였지만 도리어 침례 요한의 명성을 떨어뜨리는 경쟁자로 나선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결례(缺禮) 대한 논쟁을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가져왔을 , 그것은 단순한 논쟁거리가 아니라 예수께 대한 불평과 비난으로 변화되었다.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 역시 예수의 이름을 피하고 있다.

 

'증거하다' 현재 완료로서 과거 어느 시점에서 시작된 침례 요한의 예수에 대한 증거가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음을 암시한다.

 

침례 요한은 줄곧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거해 왔으나 그의 제자들은 그러한 증거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던 같다.

 

례를 주매 - 원문에는 앞에 '보라', '보옵소서' 뜻인 헬라어 감탄사 '이데' 붙어 있다.

 

이는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혹은 그의 제자들이) 침례를 베푸는 행위에 대해서 상당히 흥분하고 분노를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 이는 '그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 하는 뜻을 나타낸다.

 

1:45;3:7 갈릴리 사역 동안의 예수의 호소(呼訴)

( 1:45 그러나 사람이 나가서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3: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무리가 좇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본서에서도 나타난다.

 

(11:48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 3: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없느니라

 

하늘에서 주신 아니면 - 본문에 있어서는 대화의 용상 침례를 베푸는 자의 자격을 의미하는 같다.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 ('하늘' 하나님을 지시하는 완곡어로서 사용됨) 침례를 베풀도록 허락받은 사람은

 

(1) 요한 자신(Bengel, Calvin)이나

(2) 예수 그리스도(Godet, Meyer)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3) 일을 행하도록 허락된 많은 선지자, 예수의 제자들 등도 포함된다(Lange, Lucke, Moulton).

 

여기서 침례 요한은 높아가는 예수의 명성에 대해 시기하는 마음을 갖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의 모든 사역이 바로 하나님께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 3:28] 나의 말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 1:20에서 산헤드린(Sanhedrin)에서 파견된 대표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시 한번 천명(闡明)하고 있다.

 

(1: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많은 사람들이 침례 요한 자신을 메시야로 오해하는 데서 발생되는 모든 혼란을 없애기 위하여 자신의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확언하고 있다.

 

여기서 '나의 말한 ' 침례 요한이 예수께 대해 이미 여러 증거하였던 사실을 나타낸다.

 

너희니라 - 말은 원문상 강조법으로서

'너희가 설교를 귀담아 듣고 의미를 헤아렸다면 이미 너희들 스스로(yourselves) 답변을 가지고 있다' 뜻을 시사한다.

 

한편 침례 요한의 우려대로 그의 가르침과 침례를 고지식 하게 추종하는 인물이 1세기 중엽까지도 상당히 존재했음에 분명하다.

 

예컨대 에베소에서 사역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아볼로의 경우가 그러하다

 

( 18:24-26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25)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침례만 따름이라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도 침례 요한의 추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해 온전히 이해할 있도록 가르쳐 있다

 

( 19:1-7 예수 그리스도의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우리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 신부는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이며, 신랑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종종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신부로 상징하였고

 

( 54:5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남편이시라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3:20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남편을 속이고 떠남 같이 너희가 정녕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7 저가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때의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2:11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신약성경에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상징되었다.

 

( 5:32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본절에서의 강조점은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보다는 신랑인 예수와 친구인 침례 요한과의 관계에 있다.

 

침례 요한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주인이심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 - 히브리어에서 '쇼쉐벤' 신랑의 친구로서, 신랑과 신부 사이를 중매하는 역할과 신부를 신랑에게 무사히 인도 하는 역할과 결혼식에서의 신랑의 들러리 역할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혼 잔치를 주관하는 역할까지도 담당했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 잔치에 있어서 중매자 역할을 담당하였고

 

( 19:17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기슭에 섰더니)

 

바울도 역시 자기 자신이 정결한 처녀인 성도들을 남편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올 담당하는 자라고 표현하였다.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 등장했던 연회장도

 

(2:9 연회장은 물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신랑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잔치를 주관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해 수도 있다.

 

또한 침례 요한은 신랑의 친구는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함으로써, 친구가 마치 종과 같은 태도로 혼인 예식을 위해 헌신적으로 돕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 마치 물이 컵의 끝까지 가득 있는 상태처럼 침례 요한의 기쁨이 가득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의 기쁨은 완벽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했던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였으며 또한 그토록 바라던 메시야를 친히 목격하고 증거했기 때문이다. (A. M. Hunter).

 

 

 

[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 말은 본서에 나오는 침례 요한의 마지막 진술로서 그의 선지자적 위대성을 단연 돋보이게 하는 구절이다.

 

위대한 이상이나 목표를 내걸고서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자체도 크고 힘든 일이거니와,

그의 주변에 모여든 열렬한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한계성(限界性) 분명히 주지시키고 그들의 관심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게 하는 일에 이토록 적극성을 보이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침례 요한은 '...해야 한다' 표현으로써 자신의 주장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뜻의 필연성과 당의성을 확고히 천명 하고 있다.

 

실제로 침례 요한의 삶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위해 온전히 바쳐졌으며, 예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에 헤롯의 핍박을 받아 참수형(斬首刑) 당함으로써 '주의 길을 곧게 하는 '로서의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 1: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3:18-20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정죄는 이것이니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