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하나님은 그의 외아들을 주시리 만큼 세상의 사람을 사랑하셨다

거듭난 삶 2019. 6. 8.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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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그리스도교

 

요한복음 3 16 :

 

'하나님은 낳으신 외아들(독자) 주시리 만큼 세상의 사람을 사랑하셨다.

이는 그를 믿는 자에게 멸망하는 없이 영생을 받게 하시렴에서이다'(요한복음 3:16)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낳으신 외아들을 주시리 만큼,

이는 모든 믿는 자에게,

그를 망하는 없이,

반대로 생명을, 영구한,

받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것은,

 

하나님은 사랑 그것이라고도, 또는 사랑의 정상(頂上)이라고도 해석할 수가 있다.

 

막연한 사랑은 아니다.

분명한 열렬한 사랑이시다.

추상적인 사랑은 아니다.

구체적인 사랑이다.

어떤 명백한 역사적 사실로서 나타난 사랑이시다.

 

'사랑하셨다'이다.

 

'사랑하신다' 아니다.

특별한 때에, 특별한 방법으로서,

사랑을 나타내셨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종교라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는 것은 놀라운 알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소식이다.

 

하나님께 거역한 세상,

빛보다도 어두움을 사랑하는 세상,

보내신 예언자를 죽이고,

불의와 허위를 전하는 거짓 예언자를 환영하는 세상,

어느 점으로 보아도 가증이 여겨야 사랑할 없는 세상,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듣는 우리들은 놀라지 않을 없다.

 

말을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지 않는가?

 

' 세상 혹은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 사람이 만약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랑 안에 없다'(요한12:15) .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한다.

모순하는 보이는 정도로 놀라운 사랑이시다.

 

그리고 가증히 여겨야 세상을 얼마만큼 사랑하셨는가 하면

외아들을 주시리 만큼 사랑하셨다고 한다.

 

이는 놀라움의 절정이다.

 

사람으로서는 아주 하기 어려운 일을,

만한 가장 가치 없는 위해 하나님은 하셨다고 한다.

 

이는 확실히 가장 가치 없는 위해 하나님은 하셨다고 한다.

이는 확실히 사랑의 기적이다.

아주 믿기 어려운 일이다.

사람이 위해 자기의 자식을,

더구나 외아들을 주었다는 것을 들을 누가 믿을 것인가?

 

더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거역한 세상 위해 하셨다는 것이라고 한다.

 

무한한 사랑이란 그러한 사랑을 말한다.

만물의 조물주에게 사랑 있었다고 듣고서 우리들의 우주관도 인생관도

일변치 않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주심은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구원의 조건이란 간단하기 그지없다.

 

'이는 모든 믿는 자에게'란다.

 

믿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입기 위한 유일의 조건이라고 한다.

 

'모두'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는, 멸망하는 없이라고 있다.

아주 간단한 방법에 의해 가장 은혜를 입을 있다고 한다.

놀라운 사랑이다.

사랑의 가장 깊은 부분(lnnermost) 사랑이 있다.

우주의 무한에 필적하는 사랑이다.

 

'그를 믿는 자에게'이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을 믿는 자란다.

 

하지만 하늘 높이에 계시는 하나님,

우주의 넓음 같은 사랑,

어떻게 하여 이를 믿을 수가 있는가?

 

신앙은 명확한 목적물을 요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것도 예비하셨다.

그가 세상에 주신 외아들(독자) 이것이다.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

사람으로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여,

지금은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우리 위해 중보하시고,

후에 다시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

그를 믿음으로서 구원된다고 한다.

 

간단한 위에 더욱 간단하다.

마치 향응(entertainment) 마련되어,

하나님 자신이, 젓가락이든가,

숟가락을 들어 우리를 먹여주시는 같다.

 

그리고 이것이 구원의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이것마저 거부하는 자는 어떻게 처분되는 것이 적당할 것인지,

사람은 남에게 물을 것도 없이 스스로 판단해야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사람에게서 요구하신 것은 다만 이것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려면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까' 라는 물음에 답하여,

 

예수는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은, 보내신 자를 믿는 , 이것이라'(요한복음 6:28-29) .

 

하나님이 세상에 주신 외아들을 믿는 ,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다만 한가지 ,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에 들어가 최상 최대의 은혜에 참여하기 위한 행위는

다만 행위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행위이다.

 

'망하는 없이',

 

'망한다' 것은 세찬 말이다.

그리스어의 '아폴루미 apollumi'

영어의 '어나이얼레이션 annihilation'으로서,

절멸의 뜻이다.

 

사람이 절대적으로 존재를 잃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있을 없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런 일을 하실 수는 없다 말하는 자는 누군가?

만약 그것이 있다면 어찌하랴?

 

생명에 죽음의 위험이 따른다.

죽음의 위험이 동반하지 않는 것은 생명은 아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영혼에 절멸의 위험이 있다.

이것 있음은, 하나님이 무자비해서가 아니다.

생명의 특성으로서 그러한 것이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떠나 영혼은 죽는다.

사람으로 하여금 위험에서 면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외아들을 보내어 구원의 길을 마련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육체의 죽음의 두려움을 안다.

하지만 영혼의 죽음의 두려움을 모른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것을 아시는 까닭에,

여기서 비상수단을 마련하여,

사랑의 기적을 행하여 구원의 길을 예비하신 것이다.

 

영원의 형벌이라는 것은 결코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예리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이것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속죄에 의해 형벌에서 면할 있어,

감사에 넘치는 개선의 소리를 올렸다.

 

'반대로 영생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

그는 생명을 잃는 일을 좋아하시지 않는다.

그는 사람의 멸망도 좋아하시지 않고,

모든 사람이 회개에 이르는 것을 좋아 하신다.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어버이는 자식을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한다.

전능의 아버지는 자기 형상 따라 지은 사람이 멸망되지 않게 하시려고

여기에 보여 주는 같은 비상수단을, 강구하지 않으시랴!

 

자식을 가지고서 아는 부모의 (),

자식을 잃고서 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너희는 보라, 우리가, 부르신바 되어 하나님의 자녀 있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얼마나 사랑이랴'(요한1 3:1).

 

하늘의 아버지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외아들을 그들에게 주시고 모든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는 일없이 이들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끝으로

 

'주시어' 일자(一字) 주의하라.

 

'주시어' 단지 '내리시어' 또는 '보내어' 아니다.

'주시어' '주심으로서'이다.

 

자기에게서 떼어 타인의 () 하는 것을 '준다' 한다.

 

그리고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은 외아들을 세상에 주신 것이다.

성자는 사람이 되어 그리고 지금도 사람으로서 계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에 '하나님의 수육(受肉)'이라는 것이 있다.

일로서는 불가사의의 극이다.

 

하지만 사랑의 행위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국왕은 거역한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다시 자기에게 되돌리도록 하시렴에서,

외아들을 서민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능의 하나님은 실제 이것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전하고, 이것을 믿으며,

신앙에 의해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이다.

 

하나님의 사랑, 세상의 ,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취하신 하나님의 수단,

성자의 강세,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승천, 재림,

 

그를 믿음의 신앙,

영원한 죽음에 대한 영원한 생명,

이것이 그리스도교이다.

 

적어도 내가 믿고, 내가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교는 이것이다.

이것은 낡은 것이라 하고, 미신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를 떠나갔으면 한다.

 

나에게는 이것 외에 그리스도교는 없는 것이다.

 

'대저 하나님은 낳으신 외아들을 주시리 만큼 세상을 사랑하셨다.

이는 모두 그를 믿는 자에게 멸망하는 없이 영생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라' .

 

실로 귀한 문자이다.

 

안에 무용(無用) 문자는 일자도 없다.

모두 무게 있는, 의미심장한 문자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그렇듯 확실한 ,

그렇듯 명료한 ,

오해와 명상을 허용치 않는 것이다.

 

달려가면서도 읽을 있을 만큼 명백한 것이다.

 

*내촌감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