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거듭난 삶 2019. 6. 19.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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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다.

 

: [ 4:43-54]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52)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아비가 예수께서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때인 알고 자기와 집안이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행하신 두번째 표적이니라.

 

 

[ 4: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로 가시며 -

 

"이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서 역사하신 기간을 말한다.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던 도중에 사마리아에서 역사하신 것은, 하나의 도중 행사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에 이틀을 잡으신 것을 보아, 사마리아 사람들의 회개하는 열심이 많았던 것을 있다.

 

 

 

[ 4:44]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

 

말씀은 예수님께서 길릴리로 가시는 동기를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는, 고향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할 아시면서 그리로 가셨을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가지 학설이 있다.

 

(1) 고향이란 말은 유대를 가리켰거나,(Keil), 예루살렘을 가리켰다고 한다.(Hoskyns).

그렇다면 귀절의 의미는, 예수께서 유대나 예루살렘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할 아시고 갈릴리로 가신다는 뜻이겠다.

 

(2)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심은 고향 나사렛에 가심과 다르다.

그가 고향 나사렛에서는 환영 받지 못할 아시고, 나사렛 이외의 다른 갈릴리 지방에 가신다는 의미라고 한다.(Calvin, Lagrange).

 

(3)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실 때는 갈릴리를 목적지로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사마리아 전도에 성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또는 고향 갈릴리에서는 환영 받지 못할 아시면서도 초지(初志)대로 관철하시기 위하여 그리로 가신다는 의미라고 한다. (Grosheide).

 

 

 

[ 4: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는, 예수님의 하신 (권능 있는 ) 까닭이었다.

 

그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앙보다 떨어진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 믿었다.

 

(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어떤 권능을 보지 못하고 말씀만 듣고 믿는 것은 더욱 아름다운 신앙이다.

 

 

 

[ 4:46] 왕의 신하가 있어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 "왕의 신하" 헤롯 안디바의 신하를 말함이다.

 

여기 " 아들"이란 말의 헬라 원어(*) 관사(冠詞) 있음을 보아 "외아들" 의미한다. (Grosheide).

 

"가버나움", 수리아에서 애굽으로 때에 지나게 되는 도시로서 거기 관리들과 세리들이 많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 4: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

 

왕의 신하로서 사환을 보내지 않고 친히 예수님을 찾아 것을 보니, 예수님께 대한 그의 존경이 컸다.

 

 

 

[ 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이적 행하실 것은 믿었으나,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아직 믿음이 부족한 자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기서 사람의 불신앙을 간접적으로 꾸짖으신다.

 

예수님의 말씀(하나님의 말씀) 근거하여 그의 인격을 믿는 것이 건전한 신앙이다.

 

 

 

[ 4: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 오소서 - 왕의 신하의 신앙은 저렇게 약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이,

 

(1) 거리나 시간에 제재를 받을 듯이 생각하였으며,

(2) 죽은 다음에는 고칠 듯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도리어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맡아 취급하신다.

 

 

 

[ 4: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

 

예수님은, 사람과 같이 가시지도 않고 그의 아들을 고쳐 주셨다.

 

그는 아무 방법도 사용하시지 않고, 거리에서 " 아들이 살았다" 마디 말씀만 하시므로 고쳐 주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이신 증거를 보여 주심이다.

 

여기 "살았다" 말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현재에 바로 살아난다는 뜻이다.

 

그러면, 여기 "살아난다" 말은 어떤 의미의 생명이 살아남을 가리킨 것일까?

 

그것은, 여기서 질병을 고침 받음에 관하여 사용된 말이니 만큼, 물론 육신의 생명이 살아남을 가리킨다.

 

그러면, "살아난다" 말이 요한복음에 있어서 일반적으로는 영생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말이 예외의 의미(, 육신적 생명의 ) 가진다는 말인가?

 

질병에서 고침 받는 것이, 물론 육신적 생명과 관계된 것이다.

 

그러나 육신의 생명 구원도 마침내 영생의 프로그램에 들어 있는 것이니 만큼,

그것이 도외시(度外視) 것은 아니다.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도 육신적 생명과 관계된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것으로써 영생에 관한 설교(11:25-26) 기회를 삼으신 것이다.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스밀데(E.Smilde) 말하기를,

 

"우리는 이렇게 보는 것이 당연하다. , 4:46-53 말씀은,

5장에 있는 영생의 생명 주시는 (영생은 몸을 제외하지 않음) 그리스도 복음에 관한 말씀의 예비적 계단이다.

요한복음에 있는 '생명'이란 말씀(살린다는 말씀) 귀절들을 영화(靈化)하여 버리는 해석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36).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하신 말씀에 부딪혀 믿음을 얻었으니, 그것이 과연 건전한 신앙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의 심령의 병을 고치고 믿음을 주셨으니, 그것이 그의 아들의 육신의 병을 고친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육신의 질병도 고치시지만 심령의 (불신앙 ) 고치시는 것을 위주한다.

 

 

 

[ 4:51-52] 내려가는 길에서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52)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

 

말씀은,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신앙으로 상고한 사실을 보여 준다.

 

그는, 아이가 어느 시간에 나았는지 상고해 보므로 낫기 시작한 시간이 예수님의 말씀하시던 시간과 일치한 알게 되었다.

 

때에 그는 예수님의 능력의 신기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신앙은 한층 굳세어졌다.

 

" " 우리 시간으로 오후 경이다.

 

 

 

[ 4:53] 아비가 예수께서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때인 알고 자기와 집이 믿으니라 -

 

아비가 예수님을 믿음에 따라 그의 가족이 믿음은, 계약 원리(契約原理)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실현이다.

 

아버지는 하나님 앞에서 집의 대표자인 만큼,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집을 축복하신다.

 

* 참조 ( 17:7 내가 언약을 나와 너와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105:8-10 그는 언약 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9)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10)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 4: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행하신 번째 표적이니라 -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 만드신 표적으로써, 예수님은 자연계의 주님이신 사실을 나타내셨다.

 

여기 " 번째 표적", 예수님께서 거리(距離) 초월하셔서 권능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알려준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거리 관계로 못하시는 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