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거듭난 삶 2019. 6. 20. 00:23
728x90

삼십팔 병자를 고치시다.

 

 

: [ 5:1-12]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삼십팔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사람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사람이 누구냐 하되

 

 

 

 

[ 5:1]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

 

여기 이른 "유대인의 명절" 이란 말은 어느 명절을 가리킨 것인가?

 

사건의 순서를 따져 본다면,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나서 유대를 떠나셨고, 도중에 사마리아에서 전도를 하시던 때는 추수하기 4개월 (?)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때는 오순절인 듯하다(Calvin). 오순절은, 유월절 둘째날 부터 7주를 계수하여 50일을 말함이다.

 

( 16:9-12 주를 계속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주를 계수하여

10)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11) 너와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12) 너는 애굽에서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칼빈(Calvin) 그렇게 보았어도, 많은 정통 학자들은 절기를 유월절이라고 해석하여, 2:13 6:4과의 사이에 유월절 하나를 둔다.

 

그리하여야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 3년이 넉넉하다.

 

예수님께서 이런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목적은, 그런 절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 원하셨다.

 

 

 

[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

 

여기 "양문" 영국 왕역(A.V.) "양의 시장"(Sheep market)이라고 하였으나, "양문"이란 번역이 채택된다.

 

3:32, 12:39에도 양문이란 성문이 있다.

 

( 3:32 모퉁이 누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고들이 중수하였느니라,

 

12:39 에브라임 위로 말미암아 옛문과 어문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지나 양문에 이르러 감옥 문에 그치매)

 

"행각" 현관식으로 지은 시설을 가리킨다.

 

 

 

[ 5:3-4]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

 

유력한 사본들(* , B, C, D)에는 3 끝의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문구부터 4절까지의 말씀이 없고, 이것이, 보다 열등(劣等) 사본들(A,C ) 나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것이 논쟁건이 되어 있다.

 

(1) 어떤 학자들은 괄호 안의 말이 사도적 원본은 아닐 것이라고 한다.

 

크로솨이데(Grosheide) 말하기를,

"참으로 이것의 사본상 권위는 무겁지 않다" 하였고

(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 1950,PP.342-343),

 

고데이(Godet),

"이것이 일반 민중의 전설이었는데, 후에 어떤 사본에 기입되므로 이렇게 전승되었다" 하였고,

 

헨드릭센(Hendriksen) 말하기를,

" 문구에 대한 사본 증거가 무겁지 못한 사실을 보아서, 그곳에 물의 동함이 초자연적 능력으로 되었다는 것이 저자 요한의 소신(所信) 아니었을 것이고, 성령님의 교훈도 아니었을 것이고, 아마도 병자의 신념이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W.Hendriksen, New Testament Commentary, The Gospel of John, P.191).

 

(1) 옛날 터툴리안(Tertullian, 145-220 A.D.), 부분 말씀을 사용한 실례가 있다(On Baptism V).

 

칼빈(Calvin), 부분의 사본 문제를 전연 취급하지 않고, 이것을 사도적 원본으로 그저 받아들인 태도로 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 "물이 동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물질을 자유로이 사용하신다는 증표이다. 아니라, 것은, 때에 병자들의 치료된 원인이 오로지 직접적으로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려주는 증표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Calvin's Commentaries, John's Gospel I,1847, P.189).

 

 

 

[ 5:5] 거기 삼십팔 병자가 있더라 -

 

"삼십 " 여기 38년이란 연수는, 병자가 실제로 앓고 있었던 기간일 것이다.

연수는, 예수님의 연령보다 많으니 치료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암시된다.(A.Marack).

 

 

 

[ 5:6] 예수께서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을 보시고 정확히 아신다.

그는 병자가 절망 상태에 빠진 것도 아셨다.

그러나 그는 절망 자에게 길을 주신다. ,

 

(1) 그의 마음 속에 소망을 일으키시며,

(2) 고쳐 주시기를 약속하시는 의미에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물으심은 병자에게 믿음을 일으킬 만한 적당한 말씀이었다.

 

믿음은, 소망과 약속에서 생긴다. 주님께서는, 긍휼에 의하여 병자를 고쳐 주시고 병자 자신의 심리 상태의 어떠함을 알아보시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종종 사람의 몸보다도 심령을 살리기 위하여, 죽은 심령에 생기를 주시려고 힘쓰신다.

 

그러므로 그는, 절망한 자에게 소망을 일으키시며, 거기에 믿음을 건설하시려고 하신다.

 

우리가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그곳에 병자들이 많았는데 하필 38 앓던 병자 사람만 고쳐 주셨을까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다.

 

( 4:25-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여섯 달을 닫히어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중에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실시가 하나님의 주권대로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와 같은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항상 감사할 처지에 있다. 이유는, 그들은 유달리 저런 놀라운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 말씀을 보면, 그때 예루살렘의 인심이 무정하였다는 것을 있다.

 

어디나 언제나 인심은 이렇게 무정하다.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내버림이 되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세상이 모르게 죽을 지경의 고생을 당하다가 모르게 죽는다.

 

 

 

[ 5:8-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사람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명령을 내리심이, 동시에 사람을 고치시는 능력이 되었다. 주님의 명령하시는 말씀은 동시에 능력이 되는 법이다.

 

사람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 " 나아서" 말은 예수님의 말씀의 비상 능력을 보여 준다.

 

주님의 고치시는 능력의 역사(役事) 저렇게 완전하여 병자를 즉각적으로, 또는 완전히 고쳐 주셨다.

 

크로솨이데(Grosheide) 말하기를,

"그것이 그렇게 것은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며, 또한 그의 전도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님께서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 5:10] 유대인들이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

 

안식일에 짐을 지는 것은 성경에 금지되었다.

 

( 13:19 안식일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 때에 내가 명하여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종자 두어 사람을 성문마다 세워서 안식일에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매;

 

17:21-2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22)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아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그러나 말씀은 영업과 관계된 운반을 금지시킨 것이고, 부득이한 휴대품을 운반하는 것까지 금지시킨 것은 아니다.

 

그런데 때에 바리새인들은, 머리털을 쪼개듯이 번쇄하게 사람들의 행동을 정죄하는 일에 율법을 오용하였다.

 

 

 

[ 5: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

 

이것은, 그가 예수님께 책임을 돌리고 자기는 발뺌을 하려고 말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권위를 승복하고 그에게 의지하는 생각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난치병에서 건져 주신 이의 말을, 그로서는 복종할 만하였다.

 

* 참조 (9: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3:9-10 모든 백성이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 5: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사람이 누구냐 하되 -

 

유대인들이 강퍅하였던 것이 여기 드러난다.

 

그들은, 불쌍한 병자의 고침 받은 반가운 사실을 묵살시키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게 사실만을 추궁한다.

 

(1) 그들은 죽을 사람을 살린 긍휼보다, 사람들의 헛된 유전을 중대시 하였으며,

 

( 15: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2)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사람을 헛되이 정죄하여 죽이는 것을 유쾌하게 여겼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