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거듭난 삶 2019. 6. 21.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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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팔 병자를 고치시다 2

 

 

: [ 5:13-18]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15)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 5: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뒤에, 많은 병자들이 고침 받기를 원하여 그에게로 모여들 우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리를 피하셨다.

 

그는 고쳐 주심보다 복음 전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고침 받고 믿는 것보다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을, 그는 더욱 원하신 것이다.

 

 

 

[ 5:14]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 귀절에 대하여는 가지 해석이 있다.

 

(1) 고침 받은 자의 병들었던 원인이 그의 어떤 특별한 범죄에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죄를 다시 범치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Luther).

해석에는 난제가 있으니, 그것은, 성경말씀이 한편, 어떤 질병의 원인을 특수한 죄악에 돌리지 않은 사실이다( 9:1-3).

 

그러나 성경은 다른 한편, 어떤 질병의 원인이 사람의 특수한 죄악이라고 하므로( 16:46), 우리는 해석을 옳게 밖에 없다.

 

그러나 그보다는 다음 해석을 더욱 적합하다고 본다.

 

(2) 여기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말씀의 헬라 원어는, " 이상 범죄를 계속하지 말라" 뜻이다.

 

이것은, 하필 그의 38 전의 범죄(처음에 그가 병든 원인)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니고, 38 동안 중에서도 계속 범죄 하던 것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 이것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그의 죄악을 가리킨다고한다.

(Maar de man leefde nu in zonde, had zich niet aan den Heiland gegeben.-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352).

 

그렇다면, 여기 " 심한 " 영적 형벌을 가리켰을 것이다.

 

* 참조 ( 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44)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보니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위의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뜻을 보여준다.

 

(1) 예수님께서 친히 38 병자의 과거의 죄악들을 모두 용서하여 주신 사실,

(2)그가 고침 받은 자의 성화(聖化) 요구하신다는 사실,

(3)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성화를 힘쓰지 않는 자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 2:2-3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3) 우리가 이같이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그러므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고침 받은 자는 말씀에서 살아야 되며,

마디 말씀이 그의 심령에 살아 있어야 된다.

 

루터(Luther) 말하기를,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것을 권장한다. , 사람이 마땅히 그리스도의 충족성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dass man an die Genugtuung Christi glauben soll.-Evangeliem Auslegung, 4,P.206).

 

 

 

[ 5:15-16]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

 

고침 받은 자가 저렇게 보고한 것은 예수님을 배반하는 의미가 아니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공적으로 핍박하기는 여기 사건에서부터이다(Bernard).

 

"핍박하게 된지라." 말은 핍박하기를 계속한다는 뜻이다.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남들을 대신하셔서 항상 고난을 받으신 분으로 드러난다.

 

그는 병자를 고쳐 주셨고, 자신은 때문에 고난을 받으신다.

 

 

 

[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지 만물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은,

 

( 2:2-3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결코 하나님의 무활동을 의미하지 않고, 그의 창조 역사에서 쉬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대로 그가 계속하여 만물유지와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하신다.

그와 같이, 예수님도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하신다는 것이, 5:17,19-30 나타난 변론이다.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9-30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아들에게 보이시고 그보다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속에 있게 하셨고

27)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심판은 의로우니라)

 

그가 이와같은 일을 하신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되신 증표이다.

 

예수님의 변론(5:17) 들은 유대인들 자신도 그의 변론을 가리켜,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그가 하나님과 동등이란 의미의 변론이라고 하였다.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님의 하신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이신 그로서 안식일에 오히려 하실 만한 것이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안식에 속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안식은 사람의 활동 능력을 정지시킴이 아니고, 보다 참된 일로 돌림이다"라고 하였다. (Asleep in Jesus, P.55).

 

 

 

[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

 

"이를 인하여" 말은,

 

위의 17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유로 함을 가리킨다.

 

,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므로 자기도 일하신다는(하나님과 자기는 동등이라는 의미) 말씀을 이유로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은혜로운 계시(啓示)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 때문에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가장 요긴한 점을 반대한 셈이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특수한 의미에서 아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만이 저런 특수한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 아버지" 라고 하셨고, "우리 아버지" 라고는 하지 않으셨다.(Zahn).

 

그런데, 예수님의 신자격(神子格) 다른 뜻으로 오해한 학설들이 있다.

 

(1) 성령적 신자설(聖靈的神子設).

학설이 성립된다면, "하나님 아들" 이라는 이름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아들이라기보다도 인간으로서 성령과 함께 한다는 의미의 하나님 아들일 것이다.

, 뤼트겔트(Lutgert) 이론에 의하면,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하늘의 일들을 문견(聞見)하신다는 어귀들에 하나님 아들이란 칭호가 많이 나오는데,

천적(天的) 문견은 현세에 있어서 성령을 통하여 되는 일일 것이라고 하며,

이렇게 성령을 충만히 받으신 의미에서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학설의 관계 장절들을 연구하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신 고로 하나님 아들이 되셨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성령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 1:33-34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아니라, 하늘 일에 대한 문견이, 그의 현세적 경험에 국한한 것이 아니고 그의 화육(化肉) 이전의 것도 있다.

 

예를 들면, 3:32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이가 없도다" 어귀의 문견에 관한 동사는 완료 시상이다.

 

그것은 그의 화육 이전의 경험을 말함이다.

이유는, 윗절에 있는 그의 화육 사실은 "위로부터 오시는 "라고 하는 현재 사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2) 종교 윤리적 신자설(宗敎倫理的神子設).

하르낙(Harnack) 학설의 대표자이다.

 

그는 말하기를, 요한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아들이 아니고 종교 윤리적으로 그가 하나님과 일체이신 의미에서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였다 한다.

 

요한복음을 읽으면, 예수님의 신자격(神子格) 하나님 아버지에게 대한 그의 순종(종교 윤리)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계명은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2:49 내가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14: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같이 너희도 계명을 지키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종교 윤리적 생활이 신자격의 성립 원인이라고 하지 못한다. 요한복음의 어느 부분에서도 이런 교훈을 찾을 없다.

 

그의 종교 윤리적 생활은 그의 신자 격의 결과로 나타는 일종의 수반 현상이고, 결코 그것이 신자격의 성립 원인은 아닌 것이다.

 

(3) 역사적 신자설(歷史的神子設).

독생자란 술어를 기초로 하여 역사적 신자설을 지지할 있을까?

 

독생자란 말은, 예수님의 화육(化肉) 사실을 의미한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영원 자존의 신자격을 가리킨다.

 

3:16, 18; 요일 4:9 보면,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독생자 되도록 보내신 것이 아니고, 독생자를(화육 전에도 이미 독생자였음) 보내셨다고 까닭이다.

 

독생자가 독생자 되심은,

역사상의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것이 아니고 우리로서 측량하기 어려운 영원(永遠) 속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