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거듭난 삶 2019. 6. 23.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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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권위 2

 

: [ 5:26-29]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속에 있게 하셨고

27)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속에 있게 하셨고 -

 

여기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말은 아들에게는 없던 생명을 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 "주어" 것은 시간적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영원한 시간을 말함이니,

아버지께서 아들을 중보자로 세워 택한 백성에게 생명을 주는 역사(役事) 하게 하신 것을 가리킨다.

 

여기 이른 , 아버지와 아들의 소유하신 "생명" 그들만이 독점하신 절대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생명 운동의 근원이다.

 

( 1:4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5:27]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

 

말씀에 대한 해석은 가지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인자(, 사람) 형상을 입도록 낮아지셨으니 만큼,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장으로 높이셨다는 .

 

( 2:7-10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 칼빈(Calvin) 말씀을 윗절에 연락시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인자(, 인성)되신 방면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계시하시어 믿는 자들에게 주신다는 뜻이라고 한다.

 

(3) 구속 사업 전체를 인성(人性) 소유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실행하시는 것인 만큼, 구속의 일부분되는 심판도 그가 하신다는 . (Meyer).

 

(4) 심판은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를 드리는 의미의 행위인 것인 만큼, 사람들 측에서 일이며 그것을 실행할 이는 이상적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해야 된다는 . (Godet).

 

(5)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시니 만큼 누구를 정죄하시지 않는다. 다만 인간들이 구주를 배척하므로 자정죄(自定罪)하는 뿐이다.

 

그들이 인간성으로 오신 성자(聖子)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넘어진다.

, 그들은, 성자 예수님께서 인간의 형태로 나타나신 사실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걸려 넘어진다.

 

그러나 그의 인간성은 그의 사랑을 구체화 것이었다.

그것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실상 그것에게서 심판을 받음과 같다.

 

, 그것은 그들의 자정죄이다.

(Beyschlag, Neutest, Theol. 1,P.290).

 

(6) 헨드릭센(Hendriksen)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 귀절의 '인자' 말이 관사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다만 인간 성품을 의미하고 메시야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나, 우리는, 점에 있어서 관사의 유무를 가지고 지나치게 일정한 구분을 필요는 없다. 어떤 때에는 직명(職名) 관사를 가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인자' 말이 보통으로는 메시야의 직명인데, 하필 여기 와서 인간 성품만을 의미하였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므로 귀절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시기 때문에 심판의 권세를 받으셨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7) 크로솨이데(Grosheide)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여기'인자' 말은 인간성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부분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세우시고(26),

다시 그의 인간성을 내세우신다(27).

 

이렇게 그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시어 심판의 권세를 받을 자격을 가지셨다.

그가 인간성을 가지신 자격으로써도 심판하실 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인간성에게 그런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더욱 윗절(26) 벌써 말한 것과 같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심판하실 있다"라고 하였다.

 

(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P.375-376).

 

(8) 슐라텔(Schlatter)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 부분 말씀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생명의 창조자이시고(25), 인자(, 인간성)이신 그는 심판자이시다. 이유는 다음과 같이 해설된다. 인자는, 속죄자(, 인간성으로 흘려 죽으신 )이시니 만큼, 죄악을 심판하실 권리도 받으심이 당연하다. 이유는, 죄는, 이와 같이 속죄하여 주신 그를 믿지 않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판은 주로 사단에게 대한 것이다(12:31, 16:11).

 

심판은 예수님이 인간성으로 죽으심에 의하여 성립시키셨다고 하였다.

 

(Das Hauptstuck des Gerichts ist das Gericht am Satan, 12:31, 16:11, und dieses bewirkt Jesus durch seinen Tod.- Der Evangelist Johannes, P.151).

 

위의 여덟가지 해석 우리는 첫째 해석을 택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섯째 해석을 취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

 

이것은 별세하였던 신자들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몸으로 부활할 것을 가리킨다.

 

 

 

[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선한 "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으므로 나타낸 선한 열매를 가리키고, 일반 도의적 선을 말함이 아니다.

 

(3:19-21 정죄는 이것이니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여기 "선한 일을 행한"이란 말의 "행한"이란 반드시 상습적으로 완전히 행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나 "악한 일을 행한"이란 어귀에 있어서 "행한" 상습적으로 행한 , 혹은 일생의 행습(行習) 말함이다.

 

악을 행하기는 이렇게 쉽고 상습적이다.

 

귀절이 말한 가지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것이다.

 

이런 가지 부활에 대하여 성경은 종종 말하였다.

 

( 24:15 저희의 기다리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20:12-13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있고 다른 책이 펴졌으니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사망과 음부도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말씀은, 명백하게도 세계 종말에 있을 대심판에 대한 것이다.

 

점에 있어서, 사본들이 함께 같은 내용을 가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내용이 저작자의 기록 그대로인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권위있는 신약 학자들은, 부분(5:28-29)말씀이 문맥상으로도 본래의 원본인 사실을 알려준다.

 

크로솨이데(Grosheide), 부분 말씀보다 앞서 벌써 27절이 미래의 심판을 말한다고 하며, 부분 말씀은 그것의 연속이라고 하였다.

 

아니라, 슐라델(Schlatter) 다음과 같이 말한다.

 

, 5:19이하의 말씀은, 예수님의 살리시는 역사로 심판하시는 일이 현세에 벌써 실행된다고 강조하는데, 그와 같은 역사(役事) 권세는, 곧바로 28-29절에 기록된 그의 장차 행하실 심판 권세와 같은 것이라는 의미로 말하였다.

(Der Evangelist Johannes, p. 152).

 

우리는 점에 있어서, 예수님이 5:28-29에서 가지 사상의 병립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한다.

 

, 영생(또는 심판) 현재적 실시와 세상 날의 실시를 병립시키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병립 사상은, 특별히 요한복음 저자의 사고방식이다.

 

6:40에도 이와 같은 취급이 나타나 있다. 거기 말하기를,

 

"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하였다.

 

여기 나타난 사상은, 신자들이 현세에서 벌써 영생을 소유한다는 사실과 또한 그들이 대종말에도 부활의 형태로 영생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하여 6:44, 54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이라는 말까지 사용하시면서 그의 수평선적(水平線的) 종말관(終末觀) 표현하셨다.

 

그리고 그는,

 

12:48에서도 "마지막 "이라는 말을 사용하셨다.

 

거기서도 그는, 현재적 심판과 미래의 심판을 병립시켜 말씀하셨으니,

 

, "나의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하신 말씀이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위에서 하신 말씀이 미래의 심판 권위를 가졌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현재에도 말씀이 심판과 같은 종말관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은 종말관적 성격 있는 최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의 심판 성격은 현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상 날에도 그러하다는 사실이 알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