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거듭난 삶 2019. 8. 19.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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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에서 생명으로

 

요한복음 5 19-29 :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아들에게 보이시고 그보다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속에 있게 하셨고

27)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사람들에게는 쉽게 바꿀 없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해결해야 하고,

저런 경우에는 방법이 최고라는 식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아니면 무조건 거부하려고 하고,

심지어는 증오심까지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정관념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새롭게 바꿀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있으면 변화에 빠른 적응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계란을 어떻게 세울 있는 가에 대한 얘기를 아시지요?

우리의 고정관념으로는 계란은 세울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란을 깨트린 이후에 세우는 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보고 나면 그것 누가 못하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계란을 깨트리는 작업,

다시 말해 고정관념을 무너뜨림이 없으면 변화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호기심 많은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유대인에 관해 알고 싶어서 이런 저런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유대인의 생활규범인 탈무드를 익혀야 제대로 유대인을

이해할 있을 것같아 랍비를 찾아가 탈무드를 배우게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자격심사를 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동의한 젊은이에게 랍비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 아이가 집에서 굴뚝 청소를 하고 있었소.

아이가 똑같이 굴뚝 청소를 끝내고 내려왔는데

아이의 얼굴에는 그을음이 잔뜩 묻어있었고,

다른 아이 하나는 말끔한 채로 내려왔소.

아이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너무 쉬운 질문을 받은 젊은이는 의기당당하게

 

"그야 물론 얼굴이 더러운 아이가 씻겠지요.".

 

랍비는 예상한 냉정하게

 

"당신은 역시 탈무드를 공부할 자격이 없소.",

"그렇다면 정답이 무엇입니까?".

 

랍비는 친절하게 설명하기를

 

" 아이가 청소를 끝내고 내려와 서로의 얼굴을 보았겠지요.

그러면 얼굴이 깨끗한 아이는 얼굴이 더러워진 아이를 보고

' 얼굴도 저렇게 더러울거야'.

그러나 반대로 얼굴이 검은 아이는 깨끗한 아이를 쳐다보고는

' 얼굴도 저렇게 깨끗하겠지'라고 생각했겠지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알았다는 듯이 젊은이는

다시 한번만 시험해서 결정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웃으면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질문은 바로 전의 질문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젊은이가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요?

 

"얼굴이 깨끗한 아이입니다.".

 

그러자 랍비가 이번에도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역시 당신은 탈무드를 배울 자격이 없소.",

 

낙담한 젊은이가 해답이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젊은이가 측은하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 아이가 똑같이 굴뚝 청소를 했는데

어떻게 아이는 얼굴이 깨끗하고 아이는 얼굴이 더러울 있단 말이요?

아이가 모두 얼굴이 더러워질 것이 당연하지요.

그렇다면 아이 모두가 얼굴을 씻을 아니겠소.".

 

물론 다른 대답도 있을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고정화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야 새롭게 모든 것을 있다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열려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어떤 틀에,

우리가 옛날부터 만들어 기존의 틀에 모든 것을 맞추려면

언제나 우리는 뒤쳐진 사람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시대는 멀리 앞으로 달려가고 것입니다.

 

제가 금요일 예배 때에도 말씀드린 있는

새들백 교회는 교회 건물이 있어야 성장할 있다는 고정관념을 넘어선 교회입니다.

 

교회는 15 동안 일흔 아홉번이나 남의 건물로 옮겨 다니면서도

일만명 이상의 성도를 가지는 기적을 이룬 교회입니다.

담임 목사인 워런 목사님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새들백 교회는 자체 건물없이 15 동안 1만명의 크기로 성장했다.

따라서 나는 적어도 일만명까지는 (교회 건물없이) 성장할 있다는 것을 안다.

건물의 유무가 결코 교회 성장의 저해요소가 되어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건물보다 훨씬 중요하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닫혀있는 문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적혀져 있는 불변의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말씀은 살아 움직입니다.

 

죽은 문자가 아닙니다.

죽어버려 변경될 없는 말씀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가슴을 열고 성경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신앙의 태도도 활짝 개방시켜 놓아야 합니다.

다가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언제나 새롭게 들을 있도록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유익입니다.

 

만일 우리가 신앙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할 있는 역동성만 있다면

우리는 날마다 신선한 삶을 살아갈 있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가 들은 말씀의 마지막 부분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랬습니까?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두려고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는 인간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일 뿐이지

하나님일 결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찌 인간에게서

하잘 없는 출신으로 태어날 있는가하는,

말하자면 고정관념의 틀에 자신을 묶어두고 있었습니다.

 

전혀 새로운 생각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낮은 자로 찾아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신성모독이라고 죽이려고까지 것입니다.

고정관념은 이렇듯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죄의 해결은 누구의 권한에 속한 것입니까?

 

하나님 외에는 사함의 이야기는 없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예수라는 자가 나타나서

 

"죄를 사한다" 말을 하였다면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가질 있어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혹시라도


" 사람이 오실 메시야는 아닌가"라고 물어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실 메시야를 기대하는 눈이 감겨져 있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눈을 그들은 열어 놓지 못한 것입니다.

열린 눈을 가지지 못한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말하는 예수라는 사람은 죽여야 한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수가 없었습니다.

 

피터라는 사람이 책을 하나 썼습니다.

In search of Excellence(우수한 기업연구라고 할까요) 그런 책인데요,

 

책에서 그는 미국에서 경영이 뛰어난

44개의 기업에 대해 보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책이 발간된 후에 2 정도밖에 안된 시점에서

마흔 개의 기업 네개의 기업이 재정적으로

엄청난 어려움으로 무너지게 된것입니다.

 

그때 비즈니스 위크가 기업들의 재정적 어려움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석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은 기업의 제일 취약점은

변화에 대한 반응과 응전의 실패이다" 말했습니다.

 

생각의 틀이 깨어져야 합니다.

선입관과 고정관념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신앙의 틀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는 신앙의 눈은 20 , 30 전의 눈과는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이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오늘 본문은 자신을 밝히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상세하게 드러내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밝히신다구요?

 

유대인이 가진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자신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가진

신앙의 고정관념도 깨어질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신앙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분의 분명한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19-20 보십시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아들에게 보이시고

그보다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바로 얼마 전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를 일으킨 사건을 보았습니다.

사실 병자를 고치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해서 병자를 일으키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치신 분은 엘리사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분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고치는 일을

직접 그대로 하시는 분이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것보다 일을 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병자를 일으키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보다 일을

행하시는 분이 예수님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보다 " 무엇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시느니라.".

 

, 예수님이 직접 밝히신 자신의 번째 모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이십니다.

 

죽어 있는 ,

육신이 죽었든지, 그의 영혼이 죽었든지

그들을 살리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21절에 나타난 "죽은 "

영적인 죽음입니까?

아니면 육체적인 죽음입니까?

 

오늘 본문 24-27절을 보시면

죽음은 영적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본문 28-29절을 보시면

육체적인 죽음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게 것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은 가지 점이 모두 만족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삶도 살아나 만족을 누려야 하고,

우리의 영원한 삶에 대한 보장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땅에서의 삶도 아름답게 살아야 필요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것보다 훨씬 중요한 영원과 연결된 영생의 문제가 우리에게 해결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죽음의 문제는 해결할 없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이든 영적인 죽음이든 죽음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던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이길 있는 빛을 던져 사람이 없었습니다.

 

독일의 문호 요한 괴테가 죽음의 병석에 누워있었습니다.

가족들이 주위에 둘러 있었습니다.

오랜 침묵 끝에 괴테가 겨우 손을 펴서 창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Mehr Licht!

빛을!",

 

누가 급히 달려가 창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빛이 그의 얼굴에 비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창문을 사람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보니 이미 그는 죽어 있었습니다.

빛이 비친다고 그가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은

죽음, 사망의 권세에 대해서만은 어떻게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도 사망을 이길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살리실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아니라 누구라도 죽음 가운데서

건져내셔서 생명을 주실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아예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고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우리가

이렇게 노래하는 아닙니까?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의 영혼은 죽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땅의 삶으로 인생을 마감할 수가 없습니다.

영원히 남는 영혼이 있습니다.

 

땅의 것만으로 마감되는 인생이라면 어느 누구가 고민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겠습니까?

 

고민할 이유가 없습니다.

땅에 속한 혈과 육으로만 한번 살고 마칠 인생이면

쾌락을 좇다가 살아도 그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은 영원을 사모하는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이 만족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목마른 것입니다.

 

아직까지 영원한 생명이 없으신 분이 있으십니까?

 

지금 주님 앞으로 오십시오.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께 고백하기만 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말을 받으시기만 하면 우리는 영원한 영으로 살아갈 있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으신 성도님들께 그렇다면 묻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것에 신경을 많이 쓰면서 살아갑니까?

아니면 언제인가 썩고 것에 모든 투자를 아끼지 않고 살아갑니까?

 

우리는 정말 썩을 것만 심으면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나의 모든 정력을 쏟아버리고 말지는 않습니까?

 

비록 땅을 사는 육신을 가진 몸이지만,

여기에 신령한 ,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영원한 몸이 또한 있음을

자각하고 있는지 우리 신앙인들은 물어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인생은 보이는 것만으로 되어있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감하게 살아갑니다.

 

아니 보이지 않는 신령한 몸이 있다는 것을 어쩌면 알면서도

실제로는 전혀 신령한 것을 위해

씨를 뿌리거나 심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혹시라도 보이는 것에만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종말에 하나님께서 영원히 살리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오신,

지금 여기에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메시야가 말하는

생명 이야기는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율법의 이야기에 매달리는 고정된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시는 그리스도가 나타나도 전혀 상관없이,

오히려 그를 죽이려고 하면서 살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간에,

순간에 생명을 주시는 주님 앞에 굴복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땅의 , 아침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고 ,

풀의 꽃처럼 시들고 것에 모든 관심을 쏟아버리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만에 가득찬 삶을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오늘 주님은 자신을 밝히십니다.

생명을 주는 자라고 말입니다.

순간순간 영원한 생명에 눈을 돌리라고 말입니다.

 

혹시라도 시들은 영혼이 있다면

새롭게 살려내는 주님을 다시 한번 만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아직 영생의 예수를 만나지 못하셨다면

주님의 생명을 지금 만나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그렇지 않으면

번째로 밝히시는 주님의 모습을 만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번째로 만나는 주님의 모습은 심판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언제인가 우리는 땅의 삶을 마감할 것입니다.

부유하게 살았건, 궁핍하게 살았건,

지혜있는 자로 살았든지, 배우지 못한 삶을 살았든지,

아니면 권력을 누리고 살았든지,

소리 한번 쳐보고 살아갔던지 간에 우리는

심판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게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피할 없습니다.

너무도 익히 들어 아시는 히브리서의 말씀을 들려드릴까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9 27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실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생명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심판주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 모두에게

언제인가 심판이 있을 것임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미리 알려 주셨을까요?

 

간단한 것입니다. 죽음의 심판을 막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 23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도록 하기 위해서

심판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심판이 있는 알면서도 준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욕심의 결과가 죄인 알면서도,

그리고 죄가 자라면 사망이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심판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거대한 어리석음 아닙니까?

죽음의 심판이 있는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는

우리의 교만이 있지 않습니까?

 

심판은 엄청난 것입니다.

사느냐 죽느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 느긋합니다.

다음으로 미루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은 지금 얻는 것이지 나중에 얻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아니면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심판하시는 주님입니다.

아무도 막을 없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주를 만나도 생명을 얻을 있는 길이 여기 있습니다.

다시 한번 24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9 27 다음 절인 28절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죽음의 심판입니까? 아니면 생명입니까?

 

25절을 보시겠습니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듣고 살아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목표입니다.

사실 심판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말한 22절을 제외하고

이후의 말씀은 모두 생명을 얻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입니다.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이 우리 주님의 최종 목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생명이 있듯이 우리 주님에게도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는 생명을 얻게 것입니다.

생명의 부활로 살아나 심판을 이길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밝히는 주님의 최종 목표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밝힙니까?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들을 구원하시고 싶은 열망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생명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주님의 마음이 유대인들에게만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마음을 품고 계십니다.

우리들에게도 생명을 전하고 싶어 하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죽음으로 이끄는 심판보다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입니다.

 

이런 생명을 받으면 사는 것이 달라집니다.

북한 선교를 다녀오신 서대반 선교사님의 간증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지금도 북한에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말하면서

공산당 간부직원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공산당원이 예수님의 생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완전히 사로잡힌 그는 뜨거운 마음을 주체할 없어서

가는 곳마다 예수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붙잡혀 들어가 죽도록 두들겨 맞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석방되고 나서도 계속해서 예수를 전하자

이번에는 그의 성대를 잘라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상 말을 없도록 말입니다.

그리고는 몹시 두들겨 맞아 다리를 쓰지 못하는 불구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을 받으면 나누어주지 않을 없을 만큼 뜨거움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고문이 두렵지 않고 몸이 불구가 되는 것도 겁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사는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주님이 가지신 가장 거대한 구호입니다.

 

오늘 자리에 모인 자들이

모두 함께 구호를 외치며 사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생명 이야기가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1,2019-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