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거듭난 삶 2019. 7. 1.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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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소리

 

요한복음 1 15-23 :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것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헤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묻되 네가 선지가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은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시대로 만든 개신교 선교 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시작한 모라비안 선교 운동은 최초의 개신교 선교 운동이었고,

지역적으로 유럽과 전세계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초기 영국의 부흥 운동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이름은 진젠도르프(Zizendorf)입니다.

 

그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오직 가지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가지의 열정만 가지고 사는 사람,

가지의 목표만 추구하는 사람

그런 사람의 삶은 아름답게 후손들의 가슴에 새겨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의 열정을 갖고 있습니까?

무엇을 죽을 때까지 추구하면서 여러분의 생을 마감하시겠습니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무엇인가 충족될 만한 것이 없고,

즐거움을 누릴 있는 어떤 것도 없는 자리에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소리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앞서 있는 분이십니다".

'저는 정말이지 분의 하수인 노릇조차도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저는 분의 신발끈만 묶어드릴 있어도 영광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기가 쉬울 같습니까?

거의 동년배인 예수를 말하면서 그렇게 자신을 낮춘다는 것이

간단하게 이루어 같습니까?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갈릴리 지방으로 오실 무렵에

이미 침례 요한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 있는 말씀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유다와 요단 사방에서 그에게 나와서 침례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정도만 아닙니다.

당시 종교계의 거물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칠 있을 만큼 백성들로부터 추앙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는 이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권세를 주었느뇨?

 

질문에 예수님은 침례요한의 이야기를 끄집어 냅니다.

 

'침례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말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대답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침례요한은 함부로 평가할 없을 만큼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의 본문을 그대로 옮기면

 

"모든 사람이 침례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말하자면 만일 침례요한을 사람에게서 났다고 하면

백성이 가만있지 않을 것을 정도였단 말입니다.

 

정도의 사람이 자기 뒤에 오는 사람,

아직 사역도 시작하지 않은 사람 얘기를 높여 말한다는 ,

그것도 너무나 높은 분이셔서 자신이 감히 다가가지 못할 정도라고

말한다는 것이 쉽겠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행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말하시겠습니까?

 

혹시 '자신을 낮추는 ' 아닐까요?

 

이말이 너무 종교적인 말이라면 이렇게 바꾸어 볼까요?

 

'나는 당신하고 비교하면 정말 볼일 없는 사람이다'.

 

아니 그것보다는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당신 의견을 들으니 의견은 마치 어린아이의 생각 같았군요'.

 

이렇게 말하는 이런 아닐까요?

 

'남을 나보다 높이는 ',

 

이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동년배를 칭찬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훈련을 요구합니다.

 

내가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더구나 객관적으로, 외적으로 보기에 못하다고 판명이 된다고 하더라도

내적으로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내가 그를 인정해주고 나은 사람이라고 말해준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의 사람, 인격이 훈련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아첨을 위한 것이라면 혹시 높여 말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굉장한 인품의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침례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긴장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예언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그것 때문에 그의 사역이 긴장과 시기와 불안함으로 흔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묻습니다.

 

"당신 위대한 사람같은데, 말씀에 능력이 있는데,

심지어 우리가 보기에 위대한 선지자 같은데

 

갑자기 난데없이

 

' 뒤에 오시는 ,

 

당신의 말에 의하면 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할 없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이란 사람은 누구입니까?

 

본문 20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어보실까요?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땅에 오시는 것을 사모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말입니다. 그래서 능력을 베풀고,

침례를 주고, 영혼들이 변화받고,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고 있는 그들에게

막힘없이 대답해주는 그를 보면서 그리스도를 기대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물어본 것입니다.

 

땅의 마지막 때가 되면 곳곳에 그리스도를 자칭하는 자들이 일어날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해도

미혹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요즈음도 보십시오.

기적이 일어나고,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심지어 죽은 자들이 일어나는 기적을 일으키면 영락없이 그들은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구세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재림주가 바로 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유의하십시오.

 

천국의 생명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전에는,

세상에 전파되기 전에는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마태복음 24 14절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 24:14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침례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비밀스럽게, 혹시라도 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않으면

자신이 영광을 누리려고 숨겨놓지 않았습니다.

 

사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되는 아닙니까?

그냥 침묵하고 있어도 잘못된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다가 기회가 생기면 좋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침례요한은 드러내 놓고 말하였습니다.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않았습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좋은 기회, 자신을 빛낼 있는 기회였는데

그는 그의 어쩌면 경쟁자일 있는 예수를 오히려 높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속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무엇, 당신이 엘리야입니까?".

 

얘기를 들은 침례요한이 스스럼없이 대답합니다.

 

'나는 엘리야도 아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침례요한은 사실 배경이 든든한 사람입니다.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었습니다. 제사장 출신입니다.

성경도 그의 출생에 대해 결코 평범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라".

"이는 저가 앞에 자가 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이런 평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침례요한 자신이 땅에 다시 엘리야라고 말한다고 해도

어쩌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물어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십니까?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나느니라". (마태 5:37)

 

그는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있는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명예가 높아질 있는 절호의 기회에서조차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기회만 타면 최소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가운데서는

최고의 자리에 앉을 있었을는지 모르는,

세속적으로 말하면, 멋진 기회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그는 숨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명으로 남아있기를 선택하는 용기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자 묻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선지자입니까?

 

물음은 신명기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신명기 18 15절에서 이렇게 예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이말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그렇다면 우리의 조상 모세가 예언해 놓은 바로 선지자입니까?

 

삼세판입니다.

사실 정도에서는 '그렇다' 말해야 우리 상식에 맞아들어가는 것인데

다시 아니라고 잘라 말해버립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처음에는 '설마 저래도 그리스도만은 아니겠지!

왜냐하면 스가랴와 엘리사벳의 아들이잖아'라고 생각하면서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막힘없는 대답을 들으면서 주춤합니다.

왜냐하면 무언가 색다른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명예욕은 떨칠 없는 거대한 유혹입니다.

그런데 유혹을 간단하게 '숨김없이 아니라' 말하는 요한을 보면서

어떤 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 혹시 엘리야입니까?

 

이번에는 어쩌면 기대하면서 물어보았을지도 모릅니다.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버린 위대한 선지자,

그가 내려온 것은 아닐까?

아니면 모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세우시겠다는 선지자는 아닐까?

 

질문에도 요한은 칼로 자르듯이 말해버렸습니다.

 

"아니라.".

 

여러분, 감정을 조절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의 감정은 얼마나 기복이 심한지 칭찬 마디 들으면

삶이 솟아나는 희망으로 가득찹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남과 나를 비교해서 내가 하찮은 사람이라고 평가를 하면

잠이 오질 않습니다.

더욱이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를 무시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침례요한은 자신의 사역이 점점 무르익는 순간에,

자신을 제쳐두고 뒤에 오시는 그분을 예비해주고, 높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과 이해를 하기 쉽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동일한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일을 있었을까요?

 

마지막으로 묻는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신 스스로 당신을 어떻게 말하겠소?".

 

침례요한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나는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 때문에,

 

주의 길을 곧바르게 준비해 주기 위해 외치는 소리.

아니라 번이 외쳐져도 모습은 잡을 없는,

눈에 두드러지게 수도 없는, 아무런 형체조차 없는 소리.

 

자신은 완전히 없어질 뿐인 소리라고 그는 자신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그것은 침례요한의 삶이 결코 자기중심적이지 않았음을 명쾌하게 알려주는 말입니다.

 

나는 들려지고 없어지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나를 잡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는 소리입니다.

잡을 없는 소리,

그래서 나를 높여서 여러분의 우두머리로 삼을 없는 소리일 뿐입니다.

나는 분을 예비하려고 외치는 소리입니다.

나는 분의 길을 준비해주는 선구자일 뿐입니다.

 

침례요한의 삶의 목표는 분명했습니다.

자신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는 ,

나보다 늦게 와서 사역할 사람이지만 나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 사역자,

나는 겨우 회개의 침례밖에 주지 못하지만,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는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불어넣는 성령의 침례를 주실 있는 그분을 위하여 외쳐대는 광야의 소리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나아가 자신은 아예 드러나지 말아야

<광야의 소리> 뿐입니다.

 

침례요한의 마음에는 자신이 자리잡고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명예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의 외침 속에는

 

"주의 ",

 

바로 그리스도의 길이 중심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 76절에

 

"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앞에 앞서 가서 길을 예비" 것이라고

 

침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를 통하여 예언한 그대로 그는 삶을 것입니다.

 

누가 우리 삶의 중심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면 명예가 실추되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존심이 중심자리에 있지 않으면 나보다 남을 먼저 추어주어도

그리 실망스럽지 않습니다.

 

핵심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 안에 계시는가?

삶의 중심에 도대체 누가 있는가?

나의 살아가는 목표가 "나의 " 추구함인가?

아니면 "주의 " 추구함인가가 중요합니다.

 

침례요한은 주의 길을 추구했기 때문에

네가 그리스도냐라고 물었을 때도 과감하고도 당연하게

아니라고 말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어떤 것으로도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번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인기를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감추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가슴에는 "주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과 안에 "주님의 " 가져다 놓지 않으시겠습니까?

 

인기, 명예, 자존심, 나의 , 그것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치는 소리로 "주의 " 말하고 싶지 않습니까?

최소한 주님의 교회에서만은 이것이 이루어져야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의 고백,

 

" 안에 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나의 명예가 죽어도, 나의 모든 자존심이 죽더라도

유익한 삶은 바로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삶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고백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서도 안됩니다.

 

메리 피셔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런던 바이블 칼리지에 입학했습니다.

그녀가 학교에 입학한 것은 너무도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선교의 소명으로 받은 아프리카 남동부에 위치한 짐바브웨에 가서

어린이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열망에 젖어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드디어 졸업을 했고 그녀는 조금도 머뭇거림없이 짐바브웨로 떠났습니다.

얼마가 지났습니다.

1978 7 세계의 뉴스는 짐바브웨의 미션 스쿨에 게릴라가 침입한 일로 온통 채워졌습니다. 시간 동안 일어난 학살 장면을 목격한 기자는

뉴스위크지 그해 7 3일자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평온한 크리켓 운동장이었던 이글 미션 스쿨 근처에는 시체들이 뒤덮여 있었다.

모든 시체는 끔찍하리만큼 뒤틀려 있었고,

대부분의 시신들은 몽둥이나 개머리판으로 맞고 칼로 잘려 죽은 것이었다.

여자들의 시체는 부분적으로 덮여져 있었지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쉽게 짐작할 있는 것이었다.

 

어떤 남자는 눈알이 도려내져 있었고 쪽에는 칼에 찔린 상처가 가득했다.

30세의 샌드라 맥켄은 자신의 손을 그녀의 살난

파멜라의 몸에 얹은 채로 죽어 있었다.

아이의 머리는 장화나 몽둥이 같은 것으로 짓이겨진 같았다.

 

28세인 메리 피셔, 희생자중의 하나였던 그녀는 죽음 가운데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메리는 살아남기 위해 속으로 기어가려고 애를 썼다.

내가 선교지에 도착했을 그녀는 이미 샐리스배리 병원으로 옮겨졌고

의사들이 그녀를 살리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24시간도 못되어 그녀는 최후의 희생자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소지품을 모아보니,

거기에는 짐바브웨 나라의 언어로 어린이 노래 테이프가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테잎을 번역해보았더니 노래는 그녀와 어린이들이

다음의 내용으로 함께 부른 것이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주의 손을 잡고 주가 허락하신 좁은 길을 걸으리

주의 뜻대로 걷는 평화와 기쁨, 감격이리

내게 사는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8세의 아리따운 여인의 마음 속에 살아있었던 것은

명예나 아름다운 결혼이 아니라 주님이었습니다.

나의 삶이 죽어도 유익한 그리스도가 그녀의 가슴에

중심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주님의 " 우리 삶의 중심에만 있다면

우리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아무도 나의 인생을 인정해 주지 않은채로 우리의 인생을 마쳐도 아름다울 것입니다.

 

"주의 " 우리 중심에 있다면!

우리는 낮아질 있습니다.

누구든지 높여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1945 2 21 에릭 리들이라는 세계적인 육상선수가 뇌종양으로 숨을 거두었을 ,

소식을 들은 모든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그를 애도하였습니다.

에릭은 1924 파리 올림픽에 참가한 그는 100미터 경주에서

금메달 우승 후보자로 지목되었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일정의 변경으로 주일에 열리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리들은 주일을 범하지 않는 선수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만은 예외여야 한다는 압력이 전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습니다. 모두들 아쉬워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며칠 400미터 경주가 있었습니다.

사실 400미터는 그의 종목이 아니었는데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에릭 리들이 금메달을 차지 했습니다.

 

후에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400미터에서 제가 승리한 비결은 이것입니다. 처음 200미터에서 저는 있는 최선을 다해 달렸습니다. 그렇지만 나머지 200미터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더욱 힘껏 달릴 있었습니다.

 

원래 중국 텐진에서 선교사 부모 밑에서 태어나 에릭은

올림픽에서 승리를 거둔 1 후에 자신이 선교 사역을 하려고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중국을 떠날 그의 앞길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가 에딘버러 중심의 웨버리역에서 중국을 향하여 떠날

그를 환송하러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좌우명은 이것입니다. 세상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왜냐하면 세상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사람들과 함께

 

"햇빛을 받는 곳마다 예수 왕이 되시고" 찬송을 부르고 떠났습니다.

 

1936 시아오창에서의 복음 전도 사명을 받고 사역하던 그는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에게 1938 체포되어 혹독한 환경의 수용소에 갇혀

고난당하다가 1945 뇌종양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단지 주일에 경기가 있다는 이유로

올림픽 100미터 금메달의 가능성을 포기할 있었을까요?

 

무엇이 그를 사로잡았기에 올림픽을 마친 1년만에,

당시 너무도 가난한 중국을 향해 죽음을 무릅쓴 선교를 떠날 있었습니까?

 

"세상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세상이 필요로하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햇빛을 받는 모든 곳에 주님의 생명의 길이 전해져야 한다는

삶의 분명한 목표가 그의 마음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중국으로 발걸음을 향할 있었던 것입니다.

 

침례요한만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메리 피셔도 되었고, 에릭 리들도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고,

우리도 또한 그렇게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중심에 분의 길을 외쳐보십시오.

그렇게만 있다면 본문 16절의 말씀대로

우리는 모두 주님의 충만한데서 은혜의 은혜를 받게 것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면

내가 그분을 위하여 있는 어떤 희생도 결코 대단한 것이라 없다" 말한

 

세계복음화운동의 창시자 스터드의 말이 저의 귓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유일한 열정은 무엇입니까?

 

외치는 소리로 살아가십시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분이 중요한 분으로 여러분의 삶을 만들어 가십시오.

하나님의 독생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