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거듭난 삶 2019. 7. 28. 10:12
728x90

위에서 태어난 사람

 

요한복음 3 31-36 :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지난 주에 저의 마음을 사로잡은 한권이 있었습니다.

나환자들의 정착마을인 주민 250명가량의 영호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독일에서 15년간의 학업을 끝낸 목사님이 한국의 어느 신학교에서

강단을 맡게 되었습니다. 조직신학을 강의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이론을 정립해 나가긴 했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은

무미건조한 신학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목사님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교수님은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질문에 충격을 받은 교수님에게 어느 목사님은

사역을 현장을 권해주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교수직을 사임하고 하나님을 직접 만나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직접 만나 악수를 나누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어느 토요일, 건내받은 마을의 주소로 찾아갔습니다.

글은 바로 그의 사역 현장이었던 영호마을 사역 경험을 적은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이름은 김요석입니다.

 

어둑어둑한 저녁에 도착한 목사님을 서너 사람이 마중을 나왔습니다.

사람들의 얼굴 생김새가 특이한 같았지만 가로등 불빛으로는 자세히 수가 없었습니다.

더러운 벽과 작은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조그만 방으로 안내된 목사님은

피곤한 몸으로 옷을 입은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주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긴장된 마음으로 대예배를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되어 강대상 앞에 섰는데 무언가 숨기려는 듯한 사람들의 모습이

교회당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앉은 할머니가 고개를 드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할머니의 얼굴에서 있었던 것은 오직 구멍 다섯 뿐이었습니다.

코도 입술도 없는 얼굴, 양손조차 끊어져 나간 사람을 발견한 것입니다.

 

예배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망치질 하듯

마음이 두근거린 채로 예배를 마쳤습니다.

 

강대상을 겨우 내려오는데 얼굴 없는 할머니께서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손가락 없는 손을 그에게 내밀었습니다.

 

순간 그의 마음은 어찌할 몰랐습니다.

어떻게 잡아야 하나? 손목을 잡아야 하나?

아니면 손가락이 끊어진 부분을 잡아야 하나?

 

결국 그는 할머니의 위에 그의 손을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순간의 느낌을 그는 평생 잊을 없을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당황한 그의 입에서는 엉뚱한 질문이 튀어 나왔습니다.

 

"할머니 어디가 편찮으세요?".

 

할머니는 흉한 얼굴로 웃어보이려고 애쓰면서 겨우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여덟살 때부터 지금까지 번도 건강한 손을 잡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목사님이 이렇게 손을 잡아주시니 너무 기뻐서....",

 

말을 잇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너무나 부끄러워 고개를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가르치시기 시작하셨다.

손가락이 끊어져 나가고 없는 할머니의 뭉툭한 끄트머리에서

하나님은 내게 악수를 청하셨다. 바로 자리에서 나를 맞이하시기 위해서.

나는 누군가와 악수하듯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음을 느꼈다.".

 

번째 글의 제목 "만남" 이렇게 시작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그리고 분과 악수하듯이 그렇게 밀접하게 만나기를 소원하십니까?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그리스도에 대한 침례요한의

마지막 증언을 만나게 것입니다.

 

침례요한의 고백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 분이

여러분의 삶에 고백되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침례요한이 밝혀주는 번째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31절을 보십시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 그리스도는 -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리스도는 위에서부터 오신 분이십니다.

땅에 속한 분이 아니십니다. 만물 위에 계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모든 것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이것을 다른 번역본은 이렇게 알려줍니다.

 

"위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들보다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He is greater than anyone else)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보다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능력있는 사람들보다, 있는 사람보다, 재력이 풍부한 사람보다,

지식이 출중한 사람보다 위대하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분은 땅의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땅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주님의 말씀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실행하기 어렵게 느껴지시면 당연하다고 생각하십시오.

왜냐하면 주님은 땅에 속한 말을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위에서부터 태어나신 분이십니까?".

 

만일 "그렇다" 대답하신다면 이렇게 고백할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나보다 크십니다. 주님이 나보다 위대합니다. 나의 생각이 주님께서 가지신 것보다 크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보다 결코 위대하지 않습니다.".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분보다 높지 않기 때문에 그의 권위에 복종하겠다는 뜻입니다.

분이 나보다 높기 때문에 생각을 앞세우지 않겠다는 말인 것입니다.

 

내가 크기 때문에, 내가 위대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위대하신 이가 주님이시기 때문에 분의 말씀 아래

무릎을 꿇어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덩달아 땅에 속한 말만 하면서 살지 않겠다고

고백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비록 땅에 살아도 땅에 완전히 소속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주님처럼 하늘에서부터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영광입니까?

신뢰할 없는 땅에 살아도 땅에만 묻힐 없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다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 얘기로 되돌아갑니다.


영호마을의 이웃마을에서 양씨 성을 가진 가정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초신자라서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어느 그가 흥분해서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목사님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옆집 인간은 해도 정말 너무 하지 않습니까?".

 

차근차근 설명을 요구하자 양씨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날 오후에 자기 어미 돼지 다섯 마리가 옆집 채소밭에 들어가

채소를 몽땅 먹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옆집 주인이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입니다.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그야 당연히 배상해야지요.".

 

그런데 문제는 옆집이 요구를 것이 엉뚱하게도

어미 돼지 다섯 마리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나쁜 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

 

양씨는 목사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대답해 줄까를 생각하다가 그가 입을 열었습니다.

 

" 옆집 사람은 형제님을 시험해보려고 그러는 같습니다. 사람은 형제님이 마구 흥분하고 화내기를 바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불교를 믿는 동네 사람들에게 보여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려면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주셔야 합니다. 손해를 입게 되더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많은 것으로 갚아 주실 겁니다.".

 

그러나 목사인 그도 말을 해놓고 과연 그의 말이

초신자인 양씨에게 설득력이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허리에 손을 얹고 잠시 고민하던 양씨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좋습니다. 어쨌든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요. 아까는 정말 화가 났지만 접어두고 하나님께 순종하겠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지요.".

 

되돌아간 양씨는 정말 불평 마디 없이

돼지 다섯 마리를 전부 옆집에 주어버렸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양씨가 미친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지만,

중에는 양씨의 태도를 보고 사뭇 진지해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주님이 나보다 위대하십니다, 나보다 크십니다"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처럼 많이 배운 사람의 생각처럼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양씨가 행하듯이 어쩌면 아주 단순한 순종과 복종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순박한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여름에 있었던 사건이 세월을 지나 어느 가을 ,

누가 목사님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양씨가 또다시 흥분한 듯이 서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신바람나서 얘기를 시작합니다.

 

오늘 낮에 옆집 황소 일곱 마리가 양씨의 밭에서 실컷 뜯어 먹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돼지 다섯 마리를 가져간 옆집 주인이 양씨에게 와서

 

"양씨, 어떻게 배상해야 할까?".

 

생각 같아서는 황소 일곱 마리를 냅다 끌어오고 싶었지만

목사님께 여쭈어보고 결정하려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이겼지요? 그렇지요? 돼지 다섯 마리에 황소 일곱 마리라니, 목사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정말 제가 잃은 것보다도 많이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양씨의 얼굴은 굴러들어온 이익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다시 그의 기대를 저버릴 수밖에 없는 대답을 던졌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님, 형제님은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앙갚음하려는 마음을 버리시고 분에게 용서하는 마음을 보여주십시오. 형제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것을 알게 것입니다.".

 

양씨는 갑자기 침울해지더니 빠진 모습을 하며 되돌아갔습니다.

 

다음 저녁이 되었습니다.

양씨는 한번 신이 나서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맞았어요! 제가 아무것도 배상을 받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오늘 옆집 사람이 돼지 아흔 마리를 끌고 우리 집에 왔지 뭡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 돼지 모두 자네껄세, 내가 자네 때문에 지난 밤에 숨도 못잤어.

지난 일로 화가 잔뜩 났을텐데 황소를 달라고 하지 않느냐 말이야.

내가 그걸 생각하느라고 머리가 빠개지는 같아.

자네 돼지가 낳은 새끼를 합쳐서 여기 아흔 마리를 전부 데려 왔으니 가져가게.

그리고 이제부터는 이웃끼리 지내보세.".

 

돼지를 되돌려 받은것도 대단하지만 새끼를 이제껏 먹인 먹이를 생각하면

정말 하나님이 제가 손해 것보다 훨씬 많이 주셨지 뭡니까?

그런데 목사님, 이것보다 좋은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진지해진 양씨가 덧붙였습니다.

 

"마을 전체가 우리를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인정하게 겁니다.

이거야말로 하나님께 받은 최고의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글의 제목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있다"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위대하신 하나님이라고 찬양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믿으면서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씀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복되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실감나게 듣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해의 능력으로는 땅의 계산법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땅의 것밖에 수가 없습니다. 하늘의 것은 절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만큼 제한되어 있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외에는 눈을 돌릴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태어난 사람은 그렇지 않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구별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을 전체가 양씨 가정을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인정하는 일로 그들은 구별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위에서 오셨기 때문에 땅의 것을 말하지 않으십니다.

땅의 가치관에 얽매인 말만 하시지 않습니다.

땅의 말만을 하지 않다는 말이 그렇다면 무슨 말입니까?

3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심이니라.".

 

땅의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 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32절의

 

"그가 위에서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 있습니까? 어떻게 증거하시겠습니까?

 

오늘 아침 QT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위에서 내려온

사람을 만날 있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삼천명이나 데리고 사울왕을 완벽하게 죽일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옷자락만 베어버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옷자락을 베어버린 것조차 양심에 찔려서

사울을 향하여 엎드려 절하면서

 

"혹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나는 손을 들어 주를 해치 아니 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자가 됨이니라...

여호와께서 나와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손으로는 왕을 해치지 않겠나이다" 말한 다윗이 있었습니다.

 

이같은 ,

하늘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면 없는 말을 들은 사울이 감격하면서 대답합니다.

 

" 아들 다윗아 이것이 목소리냐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우리의 주님처럼 위에서 내려온 자는 다윗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울에게서 나온 말과 같은 말을 듣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을 한다는 것은 말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과 삶의 태도가 하나님의 것으로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영호 마을에 쉰여섯 되신 아주머니에게 문둥병이 재발했습니다.

심한 불안과 절망에 빠진 아주머니는 엄청난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끈질긴 생명은 아주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가지 않았습니다.

 

김요석 목사님이 아주머니를 찾아갔습니다.

그녀가 울부짖습니다.

 

"목사님, 제발 저를 다시 소록도로 보내지 말아주세요.".

 

"그럼요. 하지만 여기 그대로 계시려면 건강을 빨리 되찾으셔야 합니다.

아무 거라도 잡수어 보세요".

 

"먹을 수가 없어요.".

 

부엌을 내다보니 생선찌개가 아궁이 위에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숟가락으로 찌개를 떠서 맛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입을 다물지 못한 김목사님을 뚫어지도록 쳐다보았습니다.

옮길 것을 겁내지 않고 자신의 숟가락을 쓰는 것에 깜짝 놀란 것입니다.

 

" 보세요. 아주 맛있는데요.".

 

아주머니는 그가 건넨 국물을 꿀꺽 삼켰습니다.

아주머니 혼자 계시면 아무것도 못드실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냄비가 때까지 아주머니와 함께

숟가락 하나로 번갈아 가면서 찌개를 먹었습니다.

 

배부르게 먹은 송씨 아주머니는 금새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잠든 아주머니의 얼굴에 흐르는 고름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나는 건강한 사람이고 아주머니는 문둥병자였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내게 잔잔한 웃음을 보내주었다.

내가 아주머니의 숟가락을 썼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머니에게는 입맞춤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사람의 삶은 혹시 이런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다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위에서부터 오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면서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입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말이 나오게 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우리의 말은 급하면 급할수록 상처를 줍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 11절에서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같이 하고"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말이 하나님 같습니까?

우리가 얘기할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연히 말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고 있습니까?

 

남의 연약함을 고려하지 않고 내뱉은 우리의 말에

그들이 입은 아픔은 엄청난 것입니다.

 

나의 삶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나의 태도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사람다운 것입니까?

 

그런데 여기 한가지 주의하실 것이 있습니다.

 

이런 좋은 , 부드러운 대화, 남을 격려하는 ,

세워주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 전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의 가장 핵심은 바로 3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은 도덕적인 삶의 수준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좋은 것이다, 저것은 피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여러분과 제가 죽고 사는 문제, 생명의 말씀에 관계된 것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들에게는 생명이 있다고 말하는 ,

그리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구원하는 영원의 생명은 있을 없다고

잘라서 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를 살리는 생명의 입맞춤을 전해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가 핵심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구원과 영생의 말씀이 아니라 율법적인 삶을 얼마나 있는 가에

초점을 자꾸만 맞추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도덕이 아닙니다. 생명입니다.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하는 것이지

얼마나 득도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부처가 되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침례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침례 베푸는 자체가 아닙니다.

나는 쇠하여야 하겠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다는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자들에게는 생명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은 결코 있을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 침례요한의 마지막 증언의 핵심입니다.

 

요한 사도도 요한복음서의 기록 목적이 바로 이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너희로 믿고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은 삶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세상이 말하는 도덕적인 선보다 나은 도덕적인

가르침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과 사업에 복을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사실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하나님 말씀의 핵심이 없습니다.

 

침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고,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직접 보고 들은 생명에 관한 것을 알려주시려고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으로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을 만나보시기를 원하지 않으십니까?

 

시간 함께 눈을 감으시기 바랍니다.

 

위로부터 오신 분은 영원한 생명을 들고 자리에 계십니다.

만일 아직까지 그저 교회에 나오시는 분이 계시다면

영원한 생명을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영접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시간 주님을 구주로 모시기를 원하시는 분은

마음속으로 저와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셔서 나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구원을 받기를 원합니다.

나의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것을 믿습니다.

나에게 들어오셔서 영생을 주옵소서.

주님밖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나의 생명의 주인이 되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