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거듭난 삶 2019. 7. 7. 09:36
728x90

예배를 회복하십시오

 

요한복음 2 13-22 :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성전은 사십육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제가 가끔 언급하는 하이벌즈 목사님이 한번은 이런 말을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말하기 어려운 주제는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라'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세상적인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면

그들은 내가 마치 화성에서 사람처럼 생각합니다." .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지 그리 손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열매를 얻기 어려운 주문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에게 헌신한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는다, 십일조를 바친다,

교회 봉사에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성경을 매일 읽는다,

대단한 것을 말한다면 새벽기도에 나간다,

이런 것이 여러분의 마음에 떠오릅니까?

 

헌신이라는 말은 그대로 해석한다면 "몸을 바친다" 그런 뜻이 것입니다.

 

저희 집의 넷째 아이 이름이 있습니다.

저희 아이들도 알고 있는 "예헌"입니다.

예수님께 몸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몸을 바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약시대의 제사를 기억하십니까?

제사는 양이든지 수송아지이든지 몸뚱아리를 제사의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몸을 바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께 헌신한다는 말은 그렇다면

그리스도에게 몸을 바치는 제사를 드린다 말일 것입니다.

이말은 무슨 뜻입니까?

 

오늘날 "제사를 드린다" 말은 바로 "예배를 드린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헌신한다는 말은 오늘날 "예배를 드린다" 뜻입니다.

 

말을 들으시면 여러분은 오히려 안심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여러분은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 헌신하시는 것이 지금 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민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가 어떤 예배인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수백마리, 아니 수천마리의 제물을 잡아 피를

강수처럼 흘리며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헌신의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제물에 질려버렸다고 말씀하신 있습니다.

얼마나 지겨웠는지 하나님은 말라기서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위에 헛되이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노라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말라기 1 10절의 말씀입니다.

 

예배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예배에 질려 버렸다는 이런 역설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아예 누가 나타나서 성전문을 완전히 닫아버렸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다니 딱한 노릇아닙니까?

 

헛되이 예배드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누군가 나타나서 성전의 빗장을 완전히 걸어버린다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읽어실수 있습니까?

 

몸을 바치는 헌신은 헌신인데 헌신이 헛된 것이라고,

헛된 예배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무언가 잘못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도 혹시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

염려되고 떨리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드리는 예배가 헛된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성전 문을 닫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까?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올라가셨습니다.

유월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주신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사실은 기념이 아니라 구원하신 것을 감사하는 제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 지금도 그날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손길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을 없다고

감사의 고백을 하는 날입니다.

내가 오늘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알고 감격하는 날이 유월절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을 우리는 예배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입니다.

감격이 살아있는 예배,

내가 이만큼 있게 것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에 의한 것임을

고백하는 예배가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자녀가 이만큼 것을 감격하고 감사할 있어야 예배가 살아있을 있습니다.

부족해도, 하나짜리 아파트에 비록 살고 있어도

이만큼 살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송할 있어야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야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우리의 목표가 이렇듯 분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려오는 장소로 그들에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달픈 포로생활을 했었어도, 나라잃은 설움이 북받혔어도,

그곳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할 있는 장소였습니다.

잡혀서 굶주린 사자의 밥이 줄을 알면서도 곳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하지 않을 없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만 생각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인할 있는 그런 장소였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포로생활에서 되돌아온 그들에게도 가장 우선적인 일은

예루살렘에 허물어진 성전을 다시 건축하는 것이었을 정도였습니다.

 

자신들의 생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녀의 교육문제를 먼저 신경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무너진 성전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예루살렘이 있으십니까?

예배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여러분에게도 있습니까?

신앙의 근본을 생각할 있는 장소를 여러분은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들에게는 올라갈 예루살렘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시카고 한인 연합교회가 되든지,

여러분의 기도의 골방이 되든지,

여러분 사업처의 기도실이 되든지 예루살렘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예루살렘이 없는 자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영혼의 안식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새로운 힘을 얻을 장소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격할 있는 삶의 처소가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사도들과 함께 모이셨을

저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우리에겐 예루살렘이 있어야하고 또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아야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예루살렘이 어디입니까?

그곳을 떠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122 6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자의 아름다운 발걸음이 여러분의 발걸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격을 기대하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아주 엉뚱한 일을 만나게 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여러분 원래 성전이 어떤 곳입니까?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떤 곳으로 지금 바뀌어버렸습니까?

'장사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그랬습니다.

 

구속하신 하나님을 감격으로 만나는 장소가

장사를 하는 , 이익을 챙기는 엉뚱한 곳으로 뒤바뀌어버리고 것입니다.

예배가 아니라, 구속하신 사랑을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장사하여 이윤을 남기는 것이 우선적으로 것입니다.

 

교회는 친교의 장소가 아닙니다.

외로움을 달래는 이민자의 만남의 장소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교회, 성전의 원래 목표가 아닌 것입니다.

사업의 연줄을 찾는 곳도 아닙니다.

 

사실 처음은 성전에서 그렇게 시작하려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곳에서 올라오는 수천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이 살고 있던 곳에서부터 제사물을 끌고 온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끌고 오다가 흠이라도 생기게 되면 양이나 송아지는

제물로 바칠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타국에서 오는 자들은

성전세를 반드시 예루살렘의 통용화폐로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환전상이 있게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바칠 제물은 어차피 필요하지요, 성전세도 내야지요.

그런데 때문에 점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물을 사려면 엄청난 웃돈을 얹어주어야 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거기에서 사지 않으면

성전에서 제물을 파는 상인들과 계약을 맺은 제사장들이 괜스레 트집을 잡아

다른 곳에서 사온 희생제물을 제사 제물로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성전에서 비싼 돈을 지불하고 수밖에 없게 것입니다.

그리고 환전상들도 터무니 없는 이윤을 챙기면서 환전해준 것입니다.

 

제사장이나 상인들이 이제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생각지 않게 것입니다.

예배보다 앞선 것이 생겨버렸습니다.

주객이 전도되었습니다.

 

성전의 본래 기능은 예배를 드리는 , 하나님을 만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요소들이 거기에 끼어들게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제는 중요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예배는 왜곡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21세기의 교회를 예견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21세기의 교회는 편의점 -24 Hour Convenient Strore- 처럼 되어야 살아남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느 때고 들어가서 말씀을 듣고 싶을 때는

들을 있는 그런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좋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예배의 본질을 망각한 것이 아닐 없습니다.

 

제사, 예배라는 말은 바로 "희생"이라는 말과 동일한 어원을 갖습니다.

희생이 없이는 제사는 이루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아닙니까?

 

그런데 요즘의 예배는 희생이 사라진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희생하지 않고 편안히, 손해보지 않고 예배를 드리려고 생각합니다.

예배와 제사 거기에는 "거룩한 부담" 있어야 합니다.

희생과 손해가 따라야 예배가 이루어집니다.

희생이 없는 예배, 제물이 사라진 예배,

자신의 삶을 제어하는 일이 없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없습니다.

제물은 있되 거기에 자신의 삶이 함께 바쳐지지 않는 예배는

헛된 예배가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제물이 풍성해야만 아름다운 예배가 이루어진다면

백만장자, 아니 억만장자가 훨씬 아름다운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삶이 담기지 않은 예배와 제물은 속이 텅빈 것입니다.

아무리 드려도 하나님께 열납될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너희가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보이기 위해서 드려지는 예배,

자신의 속은, 자신의 영혼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은 빠져버리고 겉만 드러내 보이면서

' 출석했음'으로 만족되는 예배는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면 예배가 장사로 뒤바뀐 이유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장소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드려져야 하는 예배의 장소가

장사하는 집으로 바뀌어버리고 말았는지 17절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것을 기억하더라".

 

바뀌어 버리고 말았습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모함이 사라져버리면 예배드리는 장소는 장사하는 ,

아니 그것 아니라 엉뚱한 다른 용도로 사용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주님의 전을 사모하는 마음,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교회는 텅빈 것이 수밖에 없습니다.

목마른 사슴처럼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면

예배가 필요없고, 엉뚱한 것들이 판을 칩니다.

이익 때문에 싸움이 벌어집니다.

의견차이 때문에 교회가 완전히 마비가 됩니다.

 

주님을 사모하지 않으니 예배가 시시해집니다.

지겹습니다. 광고가 훨씬 기다려집니다.

예배 끝나고 무엇을 해야지 하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우리의 사모할 주님이 예배의 핵심인데 핵심이 빠지니 다른 것들이

당연히 앞장설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감격없이, 사모함이 없이 예배의 장소에 오게되면

하나님의 이런 음성만 듣게 될것이 분명합니다.

 

"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971 어느 날이었습니다.

28명의 조종사가 베트남 전쟁에 모두 포로가 되어 감방에 갇혀 있었습니다.

심문과 고문으로, 그리고 전쟁에서 입은 상처로

제대로 운신할 없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66년부터 포로가 이후로 그들은 번도 성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71 봄부터 수용소 당국은 포로 3명에게 1주일에 1시간씩

성경을 복사할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경비원은 허락한 후에도 성경을 복사하려면

자꾸만 팔로 가리면서 방해를 놓았습니다.

5주를 지나서야 겨우 산상보훈 거의를 베낄 있었습니다.

 

한사람의 이름이 제임스 레이였습니다.

그가 그것을 감방으로 가져오자 보배같은 말씀을

조잡한 필기도구로 베끼면서 말씀을 읽고 암송하며 묵상했습니다.

 

그해 부활절이 되었습니다.

월맹당국이 포로 규정을 지키는 조건으로 포로 20명까지는

방에 모여 예배를 드릴 있게 했습니다.

부활절 아침, 포로 4사람이

 

"그 참혹한 십자가에 주 달려 흘린 피 샘물같이 늘 흐르니 죄 많은 형제여",

 

찬송을 불렀습니다.

나머지 포로들이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합창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신 말씀을 정확하지는 않지만

암송한 기억들을 맞추어 함께 암송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묶어 본디오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예수의 옷을 벗기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웠다.

그들은 예수께 침을 뱉고 채찍질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못박으라' 소리쳤다...".

 

포로들은 그들이 받은 채찍질과 침뱉음,

모욕당함과 몽둥이질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누군가가 전날 배급식량에서 남겨둔 빵을 꺼내어 떼기 시작했습니다.

 

커티스 대위가 말했습니다.

 

"이것을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찢어 주는 몸이니라, 너희가 이것을 행할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

 

이어서 잔에 관한 말씀을 암송했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피니라".

 

포로들은 피에 관해 너무도 처절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터진 상처에서 흐른 , 찢어진 고막에서 흐른 ,

고문으로 빠진 손톱에서 흐르던 , 붕대에서 스며나오던 피를 보며

그들은 지금 그들을 위해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를 생각했습니다.

 

조심스럽게 간직해두었던 미역국 잔이 돌려졌습니다.

누군가가 또다시 조용하게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커티스는 잔을 입에 대는 순간 울음이 터져나왔습니다.

모두들 함께 울면서 그리스도의 찢겨진 몸을 기억했습니다.

챨스 콜슨이 "Loving God"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런 것이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감격이 있어야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여러분과 제가 드리는 예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떡과 포도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묵상하면서 받아든 잔이면

그것이 무엇이어도 감격의 눈물이 쏟아져야 합니다.

말씀이 그리워야 합니다. 기도하고 싶어야 합니다.

찬송을 불러도 열정을 다해서 불러야 합니다.

 

가라오께 때는 성심성의껏 감정까지 넣어서 하는데

찬송을 부를때는 그렇지 못합니까?

 

사모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간직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사모하십시오. 여호와의 성전을 사모하십시오.

시편 84:2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사모하는 영혼으로 쇠약함이여! 그렇게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모하는 마음이 사라진 성전이 장사하는 집으로

바뀌어 버린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합니까?

(나머지 복음서에서는 '강도의 굴혈'이라는 강력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내어  으시고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성전을 장사하는 것으로 만들면 성전은 더럽혀지고 맙니다.

그리고 더럽혀진 성전은 정결하게 되어야합니다.

세밀하게 말씀드리면 예배를 예배아니게 만드는 것들은 내어 쫓아야 합니다.

그런 요소들이 붙이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 보십시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그런 생각들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자꾸만 정돈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위해 아예 채찍까지 만드셨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을 사모하지 못하게 하는 ,

주님을 말씀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그런 생각들은 채찍을 들고서라도

몰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훈련입니다. 이런 것이 헌신의 과정입니다.

기도할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애를 써야 합니다.

 

예수를 믿은 얼마되지 않은 평신도에게

목사님이 어느 갑자기 기도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분이 혹시라도 갑작스럽게 그런 일이 닥칠 알고 2-3분가량의

기도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멋있게 준비된 기도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도를 마쳐야겠는데 마지막 부분이 생각이 나지 않는거예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생각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말이 무엇인가를 계속 고민하면서 자꾸 기도하는 겁니다.

전혀 생각지 않았던 유년부 아이들 기도도 하고,

아픈 사람 기도도 하고, 그래서 10분이 지나고 15분이 때까지

자꾸만 기도하는데도 마지막이 생각이 나지 않는거예요.

교인들은 전부 속으로 놀랍니다.

 

", 금방 믿은 사람이 저렇게 열심히 기도하는구나".

 

그런데 도저히 생각하여도 끝이 생각나지 않자

교인이 드디어 마무리를 짓습니다.

"기도 !"

 

훈련은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계속적으로, 의도적으로 애를 써야합니다.

우리의 예배를 방해하는 것들을 쫓아 내십시오.

그냥 내버려 두면 끊임없이 우리의 성전에 자꾸만 양이 들어오고 소가 돌아다니고,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지,

예배를 드리는 장소이지, 경배와 찬송을 드리는 곳이지

장사 이야기 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집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래서 아예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성전을 헐어 버려라".

 

그런 성전이라면 헐어버리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예배가 있는 곳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더러워진 성전은 허물어뜨려야 합니다.

46 동안 지은 성전이라 하더라도, 너무도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성전은 허물어져야 합니다.

 

새로운 예배 장소를 지어야 합니다.

새롭게 예배가 일어날 있는 성전을 만들어야 합니다.

예배는 갱신되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가득해서

새로운 교회가 건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주님이 몸이, 육체가 바로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몸은 더럽혀 없습니다.

주님이 있는, 아니 주님이신 성전이어야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46년된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우뚝 아름다운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주님의 몸이 가장 거룩한 예배처이기 때문입니다.

 

수가성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여자여 말을 믿으라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이때라".

 

여러분 산도 아니고, 산도 아닙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조차도 예배의 장소가 없습니다.

 

어떻게 드려야 진짜입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이말의 원어는 " 프뉴마티 카이 알레세이아" "성령과 진리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진리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진리이신 예수 안에서, 성전이신 주님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양과 소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니 어떻게 주님께서 더럽혀진 성전을 가만히 보고만 계시겠습니까?

 

나아가 볼까요?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린도전서 3:16-17).

 

우리 몸도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성전도 정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몸인 성전이 새롭게 세워져야 합니다.

성전인 우리 안에 양과 소와 돈을 주고 받는 일이 없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 주님이 계십니까?

여러분 안에 성령이 거하십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성전입니다.

성전을 더럽히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신령한 예배가 드려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성전의 문이 닫혀져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으시도록

우리의 예배를 새롭게 만들어 가십시다.

 

예배처인 예루살렘,

주님이 계시는 예루살렘으로 날마다 올라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희 교회 증축이 건물로만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증축으로 인해 우리의 예배가 새로워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안의 성전을 새롭게 세워나가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