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새 계명 2

거듭난 삶 2019. 8. 27.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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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 2

(내촌감삼의 계명계속)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서 서로 사랑할 수가 없다면

 

세상의 약한 치고,

도움 없는 치고,

마음 쓸쓸한 치고,

사는 보람 없는 치고,

실로 그들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떠합니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과연 서로 사랑합니까?

그들은 당을 짓지 않습니까?

교회 위해 충실하면서 그리스도 위해 불충하지는 않습니까?

서로를 헐뜯지 않습니까?

교회, 신자의 쇠퇴타락을 듣고서 은근히 기뻐하지 않습니까?

교회의 재산 다툼을 하지 않습니까?

이른 신자 중에 있지만 가운데 있는 듯한 감을 갖지 않습니까?

이른 그리스도 신자라는 자는 서로 속이지 않습니까?

서로 모략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서 서로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오늘의 이른 그리스도 신자의 특질입니까?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나는 지금 여러분 앞에 대답 드릴 것은 없습니다.

나는 혼자 나의 마음속으로 대답해야 것입니다.

 

여러분도 각각 마음속으로 대답해야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떠나심에 있어서 특히 가지를 우려 하시어 특히 계명을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중에 깊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신약성서 전체를 읽지 않으면 알지 못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위해 목숨을 버린다'(요한복음 10:11)

 

이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를 사랑하신 사랑의 일반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나를 격려하셨다.

우리들이 생각하건대,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신하여 죽었으니,

모든 사람, 이미 죽은 것이다'(고린도후서5:14)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력을 보인 말씀입니다.

 

(겸하여 말씀드립니다마는, 여기에 '격려한다' 있는 것은 오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어의 의미는 영어의 constraineth 한가지로, 한계 짓는다든가, 양측에서 협공 당한다든간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길을 한계 짓는다.

나는 이제 사랑 이외에 행동할 없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모두 여기서 말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같은 요한복음 13장에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가 보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사랑의 실례를 보인 후에 사랑의 계명을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 같은 장의 3 이하를 읽어보십시오.

 

'예수, 자기 손에 아버지께서 만물을 주신 것과,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알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취하여 허리에 두르시고,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의 발을 씻고,

두르신 수건으로 닦아주기 시작하여, 드디어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렀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당신이, 발을 씻으시렴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행하는 일을 너는 지금, 모른다.

후에, 이것을 것이다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신 ,

겉옷을 취하시고 (자리에) 앉아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행한 일을 아는가?

 

너희가, 나를 스승이라 부르고 주라고 부른다.

너희가 말하는 바는 옳다, 나는 실로 그렇다.

나는 너희의 스승 또는 주인데도 너희의 발을 씻는다.

너희도 또한 서로 발을 씻도록 하라.

내가 너희에게 예를 보여 주었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행한 대로, 너희에게도 행하게 하렴에서 이다'(13:3-7;12-15)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사랑의 실례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이같이 서로가 서로 사랑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서로의 발을 씻는다는 것은, 물론 물로서 서로의 발의 흙탕을 씻어 떨어뜨린다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겸손으로서 서로에게 쓰이는 뜻입니다. 바울이 이른

 

'우리들 강한 자는,

강하지 못한 자의 약함을 지고서,

자기 마음에 기쁘지 않더라도 해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은 않으셨다'(로마서15:1-3) 것입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의 비복으로 됨의 각오로서 서로가 서로 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확실히 새로운 계명입니다.

이러한 훈계는, 모세에 의해서도,

소크라테스에 의해서도 공자에 의해서도 세상에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신 것은 무어 공덕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의 결백을 표현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사랑을 마음에 가진' 때문입니다.

 

사랑이 겸손을 띠기에 이르기까지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듯 서로를 사랑할 우리들은 비로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에 인정되기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느 특별한 의식을 지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세상에 향하여 표백해야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정한 신앙개조를 선언하여 우리들의 지위를 명백히 해야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의 특질은 서로에 대하여 가지는 특종의 사랑입니다.

신앙, 신앙이라고 하는데, 신앙은 결코 그리스도교의 특질은 아닙니다.

신앙이 강한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에 한하지 않습니다.

 

회교의 신자 , 신앙에 있어서는 훨씬 그리스도 신자보다도 강한 자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 위해서라면, 생명을 홍모(feather)보다도 가볍게 생각합니다.

 

과년, 아프리카, 옴더만전역(Omdurman) 만이라는 회교도는 영국의 속사포 앞에 머리를 잇대어 쓰러졌습니다.

만약 신앙의 강약에 의해 종교의 우열이 정해지는 것이라면, 회교(이슬람교, 모하메트) 훨씬 그리스도교 이상의 종교입니다.

 

하지만 신앙이 많고 적음에는 의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성질에 의합니다.

 

어떠한 신앙입니까?

이는 우리들이 첫째로 일으켜야 문제입니다.

사랑을 기초로 하는 신앙인지,


혹은 사랑을 떠난 신앙인지,

모든 것을 사랑의 희생으로 하는 신앙인지,


혹은 자기의 주장을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반대자를 해치며,

이를 욕하며, 헐뜯으며, 넘어뜨리는 것도 감행하는 신앙인지,

이는 우리들이 첫째로 규명해야 문제입니다.

 

그리고 내가 보는 바에 의하면,

회교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도,

이른 (소위) 신앙이라는 것은 2종의 신앙입니다.

 

사랑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신앙입니다.

형제의 발을 씻지 않음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를 상하게 하고,

심장을 옭아매고. 쾌재를 부르는 신앙입니다.

 

그러한 신앙은 우리나라의 그리스도교계에 있어서 있을 아니라,

미국, 영국 등의 오랜 그리스도교국에 있어서도 종종 목격되는 일입니다.

실로 통탄의 극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리스도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통언하여 나는 특히 여러분을 책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사랑의 부족을 가지고 책해야 것은

 

첫째로 자신임을 알고 있습니다.

먼저, 언제나 신앙의 부족을 탄식하며 사랑의 부족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도교는 특별한 사랑의 종교로서 신앙의 종교가 아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커다란 부주의, 커다란 망실입니다.

사랑을 최상위에 두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 것입니까?

우리들의 마음에 확실히 사랑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제자임의 첫째 자격을 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기를 기도해야 것입니다.

우리들은 종종 사랑은 하나님의 최대의 은사임을 잊어버립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이것을 스스로 발휘할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할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사랑 없음을 보고 실망하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멀리 떠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들은 즉시 하나님의 보좌로 가까이 나가 사랑으로 채워지도록 기도해야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인 위한 기도는 이것이었습니다.

 

'원하옵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

너희 모두와 함께 있기를'(고린도후서13:13-)이라고.

 

우리들도 또한,

자기 위해, 상호 위해,

특히 그러한 회합 위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과 함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면 됩니다.

 

이제 우리나라의 그리스도교는 구시기를 떠나 신시기에 들어가려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구래의 서양전래의 그리스도교는 이미 만큼의 일을 하고 끝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위에 그리스도교 그것이 발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이상의 발전은 확실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발전이란 무엇입니까?

진리의 발양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아직 정력을 소진(consuming away)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일본인에게 명하여 발전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으로 믿습니다.

이제 모든 방면에 있어서 일본인은 구미인을 능가하고 있지 않습니까?

 

시모세화약 같은 , 기무라식 무선전신 같은 , 모두 구미인 이상의 신발명이 아닙니까?

 

그리고 오로지 종교에 있어서만 우리들은 서양인의 찌끼(gas; residue) 언제까지 감수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겠습니까?

 

나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일본인은 종교에 있어서도,

옳습니다, 특히 종교에 있어서 구미인 이상으로 나가지 않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들 이상으로 나가는 것은,

그들 이상의 언어학적 발견을 하고,

그들 이상의 교의적 명확에 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도 하십시다.

 

그러나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에 있어서 상진하는 일입니다.

일본국에 있어서 종파적 편집을 전혀 끊어 버리는 일입니다.

 

냉혹한 이론과 법칙과 의식을 가지고서 유지하려는 구미류 그리스도교에 대신하는데,

따뜻하고 영과 생명과 사랑으로서 하는 새로운 그리스도교로서 해야 것입니다.

 

우리들은 부와 지식에 있어서는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있대도,

성령의 힘이신 사랑에 있어서는 그들 이상으로 서려는 성망을 가져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만,

아사마야마 산록 치꾸마가 부근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세력이 솟아나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 내촌감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