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예수의 세 방면

거듭난 삶 2019. 9. 5.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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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하신 구주(救主) 성격

 

요한복음 14 6

'예수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것은 예수의 자신에 관한 가장 완전한 자현(manifestation)이시다.

그는 이에 의해 가장 간결하게 그가 무엇인지를 그의 제자들에게 보이셨다.

 

예수는 실로 길이시다.

진리이시다.

생명이시다.

 

이러하신 이기 때문에 인류의 완전한 구주이시다.

 

() 무엇인가?

 

처세의 ()이다.

이른 도덕(道德)이다.

 

사람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사람의 취할 ()이다.

실행의 방법이다.

 

예수는 (일신) 있어서 완전한 도덕의 표준을 보이셨다.

 

우리들은 나라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주권자에 대하여,

부모에 대하여,

형제에 대하여,

붕우(朋友) 대하여,

적에 대하여,

악인에 대하여,

어떠한 () 취해야 할까,

 

우리들은 예수의 행위에 있어서 이것을 배워야 것이다.

세상에 (대처)함의 길은 어려운 있다.

 

하지만 예수는 (일신) 있어서 가장 명백하게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바울은 고린도인에게 보내어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고린도전서11:1).

 

우리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에게 본받으면 좋은 것이다.

예수의 () 이것을 지켜 나가기에 어렵기는 하나 애매하지는 않다.

 

좁기는 하나 곧바르다.

이에 십자가는 따르지 만도 도달점은 천국이다.

 

예수의 생애는 인생의 모범이다.

이에 의하지 않으면 사람은 아버지에게로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는 길일 뿐만 아니다.

실천도덕의 모범일 뿐만 아니다.

그는 도덕이신 동시에 진리이다.

 

예수는 행위로서 배울 뿐만은 아니다.

그는 지식으로서 공구해야 분이다.

그는 만물이 의지하여 (기초)이시다.

 

(골로새서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안에 함께 섰느니라)

 

'지혜와 지식의 축적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다'(2:3)

 

그리스도는 실로 지혜 그것이다.

 

'영원부터, 원시부터, 땅이 있기 전부터 세워지고, 아직 바다 없고, 아직 없던 때에 이미 나신'(잠언8:23-24)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성서에 따르면 우주의 원리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실행적으로 해석해야 뿐만 아니라 사색적으로 탐구해야 분이시다.

 

그는 도덕의 모범일 아니라 철학의 제목이시다.

그는 진리 그것이다.

철학의 종극점,

만물의 해석이시다.

 

도덕이시며 진리이신 예수는 동시에 생명이시다.

특히 영적 생명이시다.

 

사람을 존재의 근저에 있어서 움직이시는 이시다.

 

'이에 생명이 있다. 생명은 사람의 빛이시다'(요한복음1:4)라고.

 

'예수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라고.

 

그로 말미암지 않고서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자이다.

그는 실로 하나님에게서 보내어주신 생명의 빵이시다.

그로 말미암지 않으면,

도덕도 없으려니와 철학도 없다.

그는 특별히 사람을 살리시는 이시다.

 

같이 하여 예수는 완전한 구주이시다.

다만 실천도덕의 모범을 보이심에 그치지 않고,

사람의 도리에 호소하는 자이시다.

 

그리고 도덕을 가르치고

도리에 호소함과 동시에

사람의 영혼에 생명을 주시는 이시다.

 

예수는 공자와 같은 도덕가는 아니시다.

그렇다고 플라톤 같은 철학자는 아니시다.

 

그는 인류의 구주이신 까닭에,

도덕 이외, 철학 이외에, 깊은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이시다.

 

예수는 그러한 구주이시므로,

그를 완전하게 해득하고자 하면,

그의 특성인 방면에서 그를 보지 않으면 된다.

 

방면의 하나를 결여 ,

우리의 그리스도관은 치우치지 않을 없다.

 

완전한 그리스도관과 건전한 신앙이란, 예수를 방면에서 해득한 결과이다.

세상에는 소위(이른바) 실행적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것이 있다.

그들은 오로지 예수를 행위에 있어서 모방하려고 한다.

 

예수같이 겸손히,

예수 같이 자비 깊게,

예수 같이 근명하고자 한다.

 

그리스도교 철학 같은 것은 그들의 묻는바 아니다.

그들은 심령적 생애라는 것을 경멸한다.

 

기도하고, 울며,

죄를 통회하고,

성령을 구하는 같은 것은 그들의 해득 못하는 일이다.

 

그들은 말한다.

 

그리스도교 무엇인가?

실제적 도덕 아니고 무어랴?

 

그리스도의 교훈을 실천하는 외에 그리스도교라는 것은 있을 아니라고.

 

하나님의 특성 같은 ,

그리스도의 신성 같은 ,

부활의 교의 같은 ,

그들은 이것을 불용 문제로 여기고,

그리스도교의 전부는 솔로몬의 잠언과,

그리스도의 산상수훈과 사도 야고보의 서간에 있다고 하여,

아주 간이하게 그리스도교를 해석하려 한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간이하고,

매우 단순한 그리스도관인 보이지만,

실은 매우 천박한,

따라서 유지하기에 곤란한 그리스도관이다.

 

그리스도교의 도덕이란, 교의를 떠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도덕은 언제나 교의의 결과인 것으로서,

이자의 관계는 나무와 열매와의 그것이다.

 

깊은 교의 없이 높은 도덕은 없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만물의 창조주이시라는 것은 그리스도교 도덕에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도덕이란 단지 그리스도의 행위의 기계적 모방은 아니다.

 

이것은 우주와 인생을 지배하는 심원한 도리가 일신의 행위에 나타난 것이다.

사람은 싫든 좋든 간에(어떻든) 그리스도교를 지식적으로 해득하지 않으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를 모방하려 (본받고자)해도 그를 본받을 수는 없다.

특히 기도를 경히 여기고,

찬미를 웃고,

모든 심령적 감동의 발동을 미신시하는 같은 것은

종교를 근저에서 거부하는 자이다.

 

종교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과 살아있는 사람과의 교제이다.

 

그리고 그러한 교제가 깊은 감정으로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가 없고,

음악 없고,

회개의 눈물 없는 종교는 극히 천박한 종교이다.

 

하나님은 규칙의 여행자는 아니시다.

사랑의 아버지시다.

 

우리들은 마음에 깊이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않는 명에 따를 수는 없다.

유니테리안 주의의 그리스도교가,

매우 단순한 듯이 보이면서,

언제나 천박하여 소멸되기 쉬운 것은 때문이다.

 

예수를 주로 () 도덕의 표준으로서 보고

진리를 궁구하는 얕고 생명으로서 받는 일이 적기 때문이다.

 

사도 야고보의

 

'하나님이신 아버지 앞에 깨끗하고 없이 쓰이는 ,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아 주는 일이다'(야고보서1:27) 말씀을 극히 천박하게 해석하는 때문이다.

 

예수는 도이다.

실천도덕이다.

 

하지만 그것뿐만 아니다.

그것과 동시에 철학적 진리이다.

심령적 생명이시다.

 

세상에는 예수를 주로 진리로 보는 자가 있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신학자이다.

그들은 이해의 방면에서만 예수를 획득하려고 한다.

 

우주에 있어서의 예수의 위치,

예수는 사람인가,

삼위일체의 철학적 설명,

성서의 문학적 비평,

하나님의 자현의 범위,

기타 이에 유사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는 경시할 없는 문제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신학자의 결점은 실행 경건의 방면을 게을리 하는 일이다.

진리는 이해성에 의해서만 요해할 있는 것은 아니다.

실행도 진리 해득상의 필요조건이다.

 

기도도 진리 요득에 필요하다.

기도하고, 실행하며, 생각하지 않으면,

진리를 완전히 해득할 수는 없다.

 

신학이라는 것은 대개가 건조무미, 모래를 씹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에 실험이 따르지 않고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학자 네안더(본권396역주) 말했다.

 

'마음이야말로 바로 신학의 중심이라'.

 

그리스도교는 귀족의 종교가 아닌 동시에 학자의 종교는 아니다.

이것은 서재에서 고출될 질의 것은 아니다.

이것은, 느끼고, 실험(체험)하여, 비로소 아는 종교이다.

 

신학의 의론에 끝은 없다.

세상에 무익한 학문치고 순신학 같은 것은 없다.

신학자가 반대자를 헐뜯고, 떨어뜨리며,

죽일 경우는 옛날도 지금도 많이 있다.

 

신학자 반드시 그리스도 신자는 아니다.

아니,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는 신학자만큼 그리스도의 마음을 모르는 자는 없다.

그리스도를 죽인 자는 학자와 바리새인이다.

 

그리고 학자는 지금의 신학자이다.

죽이는 문자에 구니(adhesion)하여 살리는 영을 잊어버린 자이다.

 

예수를 진리로서만 보는 폐는 마침내 여기에 이르게 한다.

 

그를 '신학자' 만들어,

자랑하고, 오만해지도록 하며,

저주하고, 조포(rough), 친구를 팔며,

난폭(outrage), 자부의 사람 되게 한다.

 

(디모데후서 3:2-4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삼가면서 더욱 삼가야 것은 신학적 편견이다. 하지만 편견의 해는 2자에 그치지 않는다.

 

예수를 생명으로만 보는 것도 또한 많은 잘못에 빠지는 것이다. 종교는 확실히 사람과 하나님과의 심령적 교제이다.

 

최대의 위자, 최심, 환희는 심령의 범위에 있어서이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천국을 그의 심령 이외에서 구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는 거기서 아버지와 말하고,

친구와 사귀며, 하늘의 향연에 참여하려 한다.

 

그리스도교는 특히 심령의 종교이다.

하지만 하늘의 향연에 참여함만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길은 아니다.

과식은 육체에 있을 아니라 영혼에도 해가 있다.

 

생명 떡도 다만 이것을 먹을 뿐이고 이것을 소화시키지 못하면,

영혼을 살리지 못하고 도리어 이것을 죽이기에 이른다.

 

그리고 생명의 소화란 실행이다.

선을 자신에 얻고,

그런 후에 이것을 남에게 베푸는 일이다.

 

생명은 은총의 단비(beneficial rain)같다.

 

다만 이것을 잡아만 두면 도리어 부패를 가져온다.

이것을 마른 땅에 , 꽃은 피고 열매는 맺는 것이다.

 

선행 생명의 방산이다.

 

이에 의해 자기도 남도 구원되는 것이다.

 

신앙을 양성한다고 하여 기도 단식(금식) 일삼은 것은,

드디어는 신앙의 부패를 가져와 자기도 멸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른 사원적 종교라는 것은 위험은 여기에 있다.

종교를 사용에 바치는 결과,

타인도 구하지 못하고 자신도 멸망하기에 이른다.

 

생명의 빵이라고 해도 혼자 무한하게 이것을 먹으려 해서는 된다.

심령적 생명을 중히 여기는 자는 종종 자유공구를 배척한다.

그들은 학문은 위험하다고 한다.

성서는 문자대로 이것을 믿으라고 강박한다.

그들은 이성을 속박하여 이것을 전연 신앙의 노예로 삼으려고 한다.


그들은 학리에 호소하는 자를 무신론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직각(直覺)적으로 그리스도를 느끼는 외에 철학적으로 그를 이해하기를 기뻐하지 않는다.

그들은 종교는 주로서 감정이라고 보고,

냉철한 이성에 의해 이것이 해부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른 신앙가의 종교가 미신에 빠지기 쉬운 것은 때문이다.

때대로 도리의 광선을 가운데 주사하여 병적 미균(bacillus) 제거치 않기 때문이다.

 

도리 만약 냉정하다면, 그것과 동시에 건조하다.

도리는 심령계에 있어서의 최선의 살균제이다.

도리에 의해서만 종교는 미신의 해독에서 면할 수가 있다.

 

예수를 생명으로서만 보고 진리로서 보지 않는 자는 마침내 그를 미신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예수,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도리요, 생명이다, 사람이 만약 나로 말미암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없다'.

 

예수는 실제적 도덕이시다.

철학적 진리이시다.

심령적 생명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교훈을 몸에 있어서 행하고,

그의 특성(품성 인격 character) 지식적으로 알며,

그의 생명을 마음에 받는 것이 아니면 그를 완전히 없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드디어 구원되어 아버지의 천국에 없다.

 

우리들은 실행, 지식, 신앙의 방면에서 완전하신

구원의 주를 우러러 보고,

그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게 되도록 하리로다.

 

*내촌감삼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