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거듭난 삶 2019. 9. 7.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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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

 

요한복음 14 15 :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3 34-35 :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제자인 알리라.

 

빌립보서 2 1-4 :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요한복음에 기록된 최후의 만찬에 있어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결별사의 1절에 이르기를

 

'너희가 만약 나를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라'(14:15).

 

이것은 매우 간단한 말씀이지만, 의미는 해득하기에 어려운 있다.

 

만약 이것을 문자대로 해석한다면 복음이 복음이 되게 된다.

만약 예수를 사랑한다면 먼저 그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계명이란 산상수훈에 교시된 같은 것으로서,

이는 지키기에는 아주 어렵고, 범인(凡人)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마태복음 5:48) 것이 심수이다.

 

그리고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운 계명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이매,

사람은 누구나 도저히 예수를 사랑할 없다는 것으로 된다.

 

예수는

 

'저희가 만약 나를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라' 명하시어 실은 불가능을 명하신 것이다.

 

그것보다도 명백하게

 

'너희는 도저히 나를 사랑할 없다' 하신 편이 간단명료할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있어서, 일절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해가 시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는, 본문에 약간의 오전(誤傳)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스어(헬라어) teresate라고 있음은 teresete 오전인 것으로서, A E 바꾸어 읽으면 의미가 명백하게 되는 것이다.

 

'너희가 만약 나를 사랑한다면 계명을 지키게 되리라'이다.

 

계명을 지켜서 예수를 사랑하기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그를 사랑함의 결과로서 계명을 지킬 있기에 이르리라는 것이다.

 

사랑이 먼저이고 행함은 후이다.

행함이 오르지 않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해석하면, 1절도 역시 커다란 복음으로 되는 것으로서 우리들은 이것을 듣고 안심하고, 다만 전심으로 보다 강하게 주를 사랑할 있기를 기도하기에 이른다.

 

개역성서는 의미를 붙여서 1절을 역하고 있다.

 

'너희가 만약 나를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리라'.

 

개정영역성서도 구역을 바꾸어, '지키라' '지키리라' 역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구역을 꺼리는 이유는 '계명'이라는 문자를 꺼리기 때문이다.

 

'계명' '계율'(경계)로서 '싫어 꺼리게 한다' 뜻이라고 한다.

 

훈계는 엄주가 자식에게 향하여 또는 엄사가

제자에게 향하여, 발하는 명령으로서,

이것은 싫은 , 두려운 , 피해야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엄한 도덕의 교사로 , 계명이 두려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어(헬라어) entole´로서 전해진 그리스도의 말씀은


반드시 '계명'으로 역해야 것은 아니다.

이것을 '가르침'(훈유)으로 역해도 조금도 차질 없는 것이다.

 

훈계는 훈유(admonition)이다.

이것을 어떻게 역하는 가는 역자의 마음의 상태여하에 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여기서 '훈계' 발하시지 않은 것은 다른 곳을 보아도 알게 된다.

가령 훈계는 계명이란대도, 어떠한 계명인지를 안다면,

이것은 결코 언짢아 계명이 아님을 있다.

 

같은 요한복음 15 12절에 말씀하시기를

 

' 계명은 이것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같이 너희 서로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3 34절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 너희 서로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이것이다'

 

이에 의해 예수의 계명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그의 제자요 종자(從者) 자는 서로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것을 마음에 두고서 14 15절을 읽는다면, 다음과 같이 되는 것이다.

 

'너희가 만약 나를 사랑한다면, 서로가 서로 사랑하라'.

 

이것을 부연(enlargement)하여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는가?

나는, 아주 이것을 기뻐한다.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라.

나는 내가 너희에게 사랑 받는 것보다도,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일을 기뻐한다.

 

너희 서로에 있어서 나를 보라.

그리고 내게 대하여 표시해야 사랑은 이것을 서로에 대하여 나타내라.

너희가 서로 상애하는 것은 나를 사랑함임을 것이다'라고.

 

이렇게 일절을 해석하여, 흠모(adoration) 친근히 말씀임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계명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분부(설유)이다. 절망(切望, earnest desire)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가렴에 있어서 아들에게 남기는 가르침이다.

 

너희가 내게 다하고자 하는 효는 이것을 서로에 대하여 다하라고.

 

예수는 여기서 스승이 제자들 사모하는 진정을 나타내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을 꺼리거나 또는 두려워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사람의 스승으로 자는 누구라 해도 예수의 마음을 추정(conjecture) 수가 있다.

 

자기는 사랑 받지 않아도 좋다.

제자들이 서로 사랑해 주었으면 한다.

스승 자의 기쁨으로서 제자 서로 사랑해 주었으면 한다.

스승 자의 기쁨으로서 제자 서로가 서로 사랑하는 것보다 나은 기쁨은 없다.

 

예수는 정을 여기서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신자는 서로가 서로 사랑하여 주의 뜻에 부응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이는 우리들의 의무이면서 이익이다.

 

신자가 주께 맺어지는 것만으로 단독으로 신앙을 유지하는 일은, 매우 곤란하다.

물론 때로는 그러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단독을 불가피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는 예외이지 통례는 아니다.

우리들은 각자 주와 연결되는 동시에 서로 연합되어 신앙타락의 위기를 면할 수가 있다.

 

우리의 친구가 우리의 신앙을 돕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우리들은 혼자 없는 입장에 수인 서로가 조력하여 설수가 있다.

신자에게 공동일치의 필요함은 이것 때문이다.

선한 신앙의 친구를 가지는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가지는 것에 이에 필요하다.

 

자신의 실험이 그러했다.

나는 나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얼마만큼 나의 친구(소수라고는 하지만)에게서 도움 받았는지 측량해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금세에 있어서 내게 주신 최대의 선물은 소수의 크리스천 프렌드(Chistian friend)였다.

 

예수께서 제자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의 말씀을,

바울이 제자들에게 보내어 말했다.

 

빌립보서 2 1-4절은 다음과 같이 역해해야 것으로 생각한다.

'만약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힘을 나누고자 한다면,

너희의 사랑에서 나온 위로를 내게 주려 한다면,

나와 함께 성령의 교제에 들어가려 한다면,

혹은 내게 보낼 자애와 동정이 있다면,

나는 너희에게 청한다.

너희가 서로 생각을 같이 하고, 사랑을 같이하고, 일치하여 생각하는 바를 하나로 하라.

그리고 그렇게 하여 기쁨을 채우라'.

 

만약 너희가 내게 대한 호의와 동정이 있다면,

이것을 서로에 대하여 나타내어 기쁨을 채우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는 바울에게 있었던 당연한 마음으로서,

그저 보통의 교사와 다른 점은 그의 심정이 보통 이상으로 심각 열렬했음에 있다.

 

같은 것을 말한 바가 요한3 4절에 있어서의 요한의 말씀이다.

 

' 아들들(제자들을 가리켜 말함) 진리( 경우에 있어서는 사랑을 의미한다) 산다는 것을 듣는 것보다 나은 커다란 기쁨을 내게 없다'.

 

예수에게 있어서도, 바울에 있어서도, 요한에 있어서도,

우리들 사람의 교사로서 자들에게 있어서도,

제자를 생각하고 그들에게 바라는 바에 있어서 다름없다.

 

그리고 예수는 여기서 모든 교사를 대표하여 간결하게 강렬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가 만약 나를 사랑한다면 계명을 지키라.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서 서로를 사랑하라'.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떠나심에 있어서 발하신 말씀으로서 지대한 무게가 있다.

 

하지만 어찌하여 계명이 새로운 계명인가? 그것이 문제이다.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것이란 구약의 계명으로서, 이것에 무슨 새로운 바는 없지 않은가?

 

레위기 19 18절에 이르기를

 

' 원수를 갚지 말라. 동포에 향하여 원망을 품지 말라. 자기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도 역시 계명, 자기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묵은 계명 있음을 아셨다.

 

(마태복음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그렇다면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 그것이 새로운가, 그것이 문제이다.

새로운 이유는 예수가 이것을 1, 근본적인 계명으로 하신 점에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언제나 새로운 있다.

특히 이것을 최대의 것으로 여기는 점에 있어서 새로운 있다.

 

물론 사랑의 필요를 부르짖는 것은 새롭지 않으나,

이것을 철저히 행함은 새로운 있다.

 

그리스도 승천 1900 후의 오늘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계명의 새로움을 누구도 느끼지 않을 없다.

 

불신자 아니라,

신자라 해도,

그리스도의 계명만은 지키지 않는다.

 

그들은 침례, 만찬식을 지키는데 엄격하다.

그들은 말한다. 이는 주의 제정하신 의식으로서 이것을 지키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 신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며 그들의 의식 때문에 다투고,

때문에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를 미워도 하는가 하면 배척도 한다.

 

오인이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교회에 신앙은 있을 것이나 사랑은 없다.

 

가령 있대도, 극히 소량이다.

교회는 특히 다른 교회를 미워한다.

불신자보다도, 자기와 신앙을 달리하는 신자를 미워한다.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는 사랑의 역사가 아니라 반대를 미움(증오) 역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저장소로서 자임하는 그리스도 교회에 있어서도,

 

'너희 서로가 서로 사랑하라' 것은 계명이다.

 

지금부터 불과 10 전에,

이른 그리스도교국 전체가 '증오의 세계' 화하여,

그리스도 신자가 서로를 도륙(slaughter)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해득했다고 믿고,

널리 선교사를 이교국에 보내어 교화 중에 종사했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교의 초보도 알지 못했다.

 

우리들 동양인을 이교도라 부른 영미인이 독오인을 미워하는 상태를 목격하고 우리들은 이교도는 우리가 아니라, 그들 영미인 자신임을 마음속으로 알아 차렸다.

 

지금 이들 구미의 그리스도교를 앞에 두고서,

특히 교회의 감독, 목사, 선교사들을 앞에 두고서,

다음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는다면 알고도 남는 있으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 너희도 또한 서로 사랑하라. 이는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만약 서로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가 제자인줄 것이다'

 

이는 오늘의 그리스도교도에게 있어서 실로 ' 계명'이다.

 

그들은 구주의 다른 계명은 모두 지켰다고 해도 계명만은 지키지 않았다.

그들의 전도라는 것이 공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들의 행위를 보고, 특히 그들이 국자적으로 하는 행위를 보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님은 무엇보다도 분명하다.

 

예수 자신이 그들을 자기 제자로서 인정하지 않으신다.

그들이 그의 최대 제일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지키려고도 않고,

지키지 않는대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새로운' 까닭을 달리 찾으려고 한다면 찾을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언제나 희소하고 언제나 새로운 있는데 예수가 제자를 사랑하신 사랑은 이는 그때까지는 아직껏 세상에 있었던 일없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내가 새로운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내가 너희를 사랑한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있어서 새로움이 해득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 특별한 사랑으로서,

예수께 있어서 이것을 구하지 않고서 달리 이것을 얻을 없는 사랑이다.

 

이것은 사랑임에 틀림이 없으나,

죄의 세상에서는 달리 없는 사랑이다.

 

부모 자식의 사랑보다도,

부부의 사랑보다도,

세상의 어떠한 사랑보다도,

깊고, 깨끗한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전연 새로운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으로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새로운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으로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새로운 계명이 아닐 없다.

 

그리고 새롭고 진기한 사랑은 얼마나마 세상에 나타났다.

물론 이른 그리스도교국에 의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회에 의해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소수의 그리스도 신자에 의해 나타났다.

그리고 사랑에 의해 세계와 인류는 일변했다.

사랑이 없었더라면 세계는 지금만큼이라도 없었다.

 

지금의 세계에 있는 최선최대의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결실된 것이다.

 

한마디로 사랑이라고 해서는 모른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자신이 이에 접하지 않고서는 모르는 사랑이다.

하지만 일단 이에 접하여, 영원히 잊을 없는 사랑이다.

예수의 분부(말씀) 하심은 이것이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서 서로가 사랑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상이 너무나 높아 실행하기 어렵다고 하여 실행을 피해서는 된다.

 

가령 불완전하다 해도 사랑의 실현을 우리의 노력의 1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된다.

 

달리 무엇이 있대도 사랑 없는 곳에 그리스도는 계시지 않는다.

 

'가령 내가 불사른 되기 위해 몸을 준대도, 만약 사랑이 없으면 내게 유익 없다'(고린도전서13:3)이다.

 

신앙도, 지식도, 성결도, 제도도, 의식도, 이것을 사랑 앞에 수는 없다.

 

먼저 사랑 있고서의 신앙 또는 교회이다.

 

상호를 미워하면서, 배척, 배신을 계속하면서,

() 위해 그렇듯 진력한다는 것은,

이것을 모순의 극이라 하지 않을 없다.

 

그리스도는 끝에 임하여 말씀하셨다.

 

'너희가 만약 나를 사랑한다면, 사랑을 제자에게 표시하라'.

 

' 사랑을 제자에게 표시해 달라' 그는 제자들에게 간망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 만약 지금 세상에 계신다면, 나는 가서 그에게 쓰이리라' 자여,

 

그는 실로 오늘 세상에 계신다.

 

네가 날마다 접촉하는 형제자매,

그들의 그리스도이시다.

그들을 사랑하여,

우리 주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