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거듭난 삶 2019. 9. 17. 00:07
728x90

 

보혜사 성령의 의무

 

: [ 16:5-10]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 16: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지금 - 예수가 7:33에서 '조금 있다가'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아직 하던 일이 남아 있고 일이 끝날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음을 암시한다.

 

(7: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그러나 여기서 예수는 '지금'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사역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제자들에게 암시적으로 가르쳐 주신다.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 여기서 '가다' 해당하는 헬라어 '휘파고' 14:2에서 '가다' 번역된 '포류오마이'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문자 그대로

 

'떠나가다'라는 의미가 강조된다.

 

그런데 예수는 목적지가 없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 아버지 ' 향해 가시는 것으로,

 

(14:2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본절에서는 자신을 '보내신 ' 아버지에게로 간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보내신 '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 자신이 땅에 사명을 받고 오셨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간다'라는 표현은 사명을 이루시고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감을 가리킨다.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 말은 13:36에서

 

(13: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말한 베드로의 질문과 14:5에서

 

(14:5 도마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저희가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한 도마의 질문과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순처럼 보이는 표현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요한은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예수가 말씀하고 계신 시점을 강조한다.

 

예수는 자신의 교훈에 대한 제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 16:6] 도리어 내가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

14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책망하신다.

 

책망은 제자들의 영적 무분별과 관련이 있다.

예수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간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자신의 기쁨을 제자들과 공유하기를 원했으나,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제자들이 기쁨이 충만하기는 커녕 오히려 근심이 가득 찼다.

 

그들이 예수가 떠나시는 목적과 의도를 명백하게 이해했다면

슬픔에 잠기지 않았을 것이다.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 '실상'이란 말은 단순히 거짓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사실 자체만을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 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그러나 말은 예수께서 유대인들과의 논쟁 속에서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8:45)라고 책망하실 사용하신

 

'진리' 같은 용어이다.

 

따라서 구절은 '실상'보다 '진리' 번역함이 타당하며 따라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진리를 펼쳐 보이시겠다는 강화된 의미로 보는 것이 좋다.

 

한편 예수의 떠나심은 세상에 오심과 같은 유익을 제자들에게 준다.

 

여기서 '유익하다' 말은

 

(1) 유익의 근거와

(2) 유익하게 되는 대상 없이는 매우 막연한 의미에 불과하다.

 

그래서 예수는 본절 하반절에서 가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셨다.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 '보혜사' 제자들에게 있어서 유익의 근거이며

 

'너희' 유익하게 되는 대상을 지칭한다.

 

보혜사는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과 더불어 부활의 영광을 얻기 전에는 오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은 예수의 구속 사역을 더욱 영광스럽게 하며

더욱 풍성하게 드러내며 그것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기 위해 오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은 예수께서 부활의 영광을 나타내신 성부께 가기 전에는 결코 오시지 않는다.

 

 

 

[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본절에서 부터 예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설명하신다.

 

14:26에서는 성령의 가르치며 생각나게 하시는 사역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본절부터는 세상을 책망하시는 사역에 대해 말씀하신다.

 

(14:26 보혜사 아버지께서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리고 14:26 대상은 제자들이지만 본절에서의 대상은 세상이다.

 

세상은 메시야이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으므로 성령에 의해 책망을 받게 된다.

 

여기서 '책망하시리라' 번역된 '엘렝크세이' '엘렝코' 미래형이다.

 

'엘렝코' '훈계하다', '죄를 깨닫게 하다', '잘못을 꾸짖다'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각도에서 이해될 있다.

 

(1) 2:36, 37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이 마음에 찔림을 받은 것과 같이 '죄에 대해 깨닫게 하는 '(convict) 의미한다.

 

( 2:36-37 그런즉 이스라엘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2) '어떤 잘못에 대해 꾸짖는 '(reprove) 의미한다(KJV).

 

(3) '세상의 잘못됐음을 증명하는 ' 의미한다(J. Knox).

 

(4) '허물을 드러내는 '(NIV 난외주) 또는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드러내는 '(Jerusalem Bible) 의미한다.

 

이처럼 제자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사역을 수행하시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세상의 잘못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러한 성령의 드러내는 사역에 의해 세상 중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있다.

 

세상에 대한 성령의 판단은 단호하다.

그러나 성령의 단호함이 세상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판단하시는 역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성령은 세상의 죄를 폭로함으로, 그리스도의 없음을 증거하고,

세상의 거짓된 의를 드러냄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의를 선포하며,

세상이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이미 심판에 처해졌음을 드러내신다.

 

 

 

[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 ''(하마르티아) '빗나감', '악행', '위법' 등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원래는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간 것을 가리킬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용어는 예수에 대한 불신앙으로 국한되고 있다.

 

성령께서 불신앙을 책망하시는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가지이다.

 

(1)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한 것이다.

이는 15:22, 24에서 예수에 의하여 명백히 선포되었다.

 

(15: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죄를 핑계할 없느니라,

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아버지를 보았고 미워하였도다)

 

그들은 직접 예수의 말씀을 들었으나 믿지 않았으며,

예수를 보았지만 메시야로 영접 하기는 커녕 오히려 미워했다.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결국 자기들의 메시야를 아무런 연고 없이 미워하고 핍박하여 십자가에 죽게 했다.

 

(15:25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이러한 그들의 죄를 성령이 드러내신다.

이는 15:26에서 말씀하신 성령의 증거 사역과 일맥상통한다.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 예수를 보지 못한 세상의 죄에 대한 것이다.

성령 강림 복음이 세계 각처에 전파되는데 성령은 복음을 믿지 않은 자들도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죄인임을 드러내신다.

 

예수는 자신을 영접하는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지만

 

(1:12 영접하는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아들에게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리라(3:18) 말씀하셨다.

 

(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8:24에서는 '너희가 만일 내가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의 가운데서 죽으리라' 말씀하셨다.

 

성령은 믿지 않는 자의 죄와 그에 따른 사망에 대해 세상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 왜냐하면 세상은 어두움 속에 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어두움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사람의 양심에 빛을 비추심으로 그들의 죄가 드러나게 하셔서

죄에서 돌아서게 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도우신다.

 

이것이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 ''(디카이오쉬네) 본서에서 본절 외에 8절에서만 사용되었으며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본문에서 개념은 '' 반대되는 것으로 사용되었고(C.K. Barrett),

 

'심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1) '' 9절의 죄와 문맥상 상관관계에 의하여 나온 말로 예수의 무죄를 의미한다.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2) 세상의 의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런 의미의 의는 공의의 심판자되신 하나님의 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따라서 예수의 무죄를 증명하는 '' 하나님의 본성에 속하는 ''로서,

 

가운데 있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공의' 되기도 한다.

 

세상은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오히려 의의 성취자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달았다.

 

이처럼 세상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를 영접하지 않은 죄로

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의의 심판은 세상에 의해 죽임을 당한 예수가

부활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심으로 더욱 확증된다.

 

한편 예수께서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신 것은 '하나님의 '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이 도저히 도달할 없는 '완전한 '(Perfect Righteousness)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성령은 인간 스스로 세워놓은 의의 규범이 불완전함을

세상에 드러내심으로 사람들이 완전한 의를 따라 살도록 책망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