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거듭난 삶 2019. 9. 21.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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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의문

 

: [ 16:16-18]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8)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 16: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조금 있으면 - 16절과 19 사이에서만 '조금 있으면'이란 단어가 일곱 번이나 반복 사용되었다.

 

'조금' 본장에서는 시간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1) 일차적으로 단어는 매우 짧은 시간을 의미한다.

 

(2) 상징적으로는 시간의 개념으로도 이해될 있다.

예를 들면 예수는 자기의 공생애 기간이 3 정도 였지만 자신이 땅에 있는 기간을 '잠시'라고 말씀하셨다.

 

(12: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에 따라 후반절에 나오는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표현은 일차적으로 부활하신 후에서 승천까지의 말씀으로 이해될 있으나 상징적으로는 재림의 때를 의미할 수도 있다.

 

예수는 사역 초기에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2:4;7:6, 8, 30;8:20)라고

말씀하시면서 작정된 '' 아직 남았음을 암시하셨다.

 

그러나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바로 전후에는

여러 '때가 왔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 임박성을 드러내셨다.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6:32 보라 너희가 각각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17:1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따라서 잡히시는 밤에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이후에 있을 부활 사건의 임박성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사실 7:33에서도 '조금'이라는 말이 언급되었지만 '에티'라는 부사가 첨가되어 보다 긴박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나를 보지 못하겠고 - 말은 제자들이 앞으로는 이상 예수를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말은 다시 보게 된다는 하반절과 모순을 일으키는 표현이 된다.

 

그러나 표현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잠시 제자들의 곁을 떠나심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예수는 여러 세상을 떠나심을 시사했다.

 

(8:21-22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13:3 저녁 먹는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14:4-5 내가 어디로 가는지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16: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그리고 지금이 바로 시점이므로 제자들이 예수 자신을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를 보리라 - '보리라' 헬라어 '와세스데' 본서에서 '영적인 실재'들을 보는 것으로 사용된 적이 있다.

 

(1:51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동사는 다른 곳에서는 가시적인 것을 본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L. Morris).

 

그런데 본절에서 다시 보게 되는 것이 '영적인 실재' 의미하는지 가시적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영적인 실재로서 제자들이 예수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이라면

성령은 만나게 됨을 가리키지만 가시적으로 보는 것이라면 부활하신 예수를

보게 됨을 가리킨다.

 

예수는 앞부분까지 성령 강림 그의 사역에 대해 자세하게 가르치셨으므로

본절이 성령과 전혀 관계없는 설명이라고 단정 지을 없다.

 

따라서 본절에서 '다시 본다'라는 표현은 예수의 부활과 성령의 오심 가지

모두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가지 사건은 앞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제자들이 눈으로 목도하고 체험해야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제자들이 다시 보게 되는 내용에서 어느 하나도 제외될 없다.

 

 

 

[ 16: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 예수가 7:33에서 자기를 땅에 보내신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7: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유대인들은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의문을 가진 있다.

 

(7: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아직 영적 무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도 그들과 조금도 다를 없다.

 

제자들이 예수가 세상을 떠나 가신다는 말씀을 반복해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인간의 영적 무지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예수의 말씀 자체가 난해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난해함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유대적 메시야관, 메시야가 오시면

영원히 그들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기에 예수가 떠나신다고

반복해서 말씀하실지라도 그들은 이해할 없었던 것이다.

 

한편 제자들은 난해한 문제 앞에서 스승이신 예수에게 묻지 못하고

서로에게 물음으로써 해결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무지로 인해 심각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를 실망시키지

않으려 했든지 아니면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자신들의 무지를

스승에게 드러내지 않으려 했든지,

그들의 행위는 매우 어리석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가 소경과 같은 상태에 있으므로 서로 의논한다고

이해할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16:18]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본절과 17절의 의문은 내용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

 

17절은 16절에서 언급된 예수의 말씀 전부와 연관이 있지만 본절은 내용

 

'조금 있으면'이라는 표현에 국한되어 있다.

 

여기서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은 16절에서 반복된 것을 가리키는데 제자들은 결코 이해할 없었다.

 

알지 못하노라 - '알다' 뜻하는 헬라어 '오이다' 경험적 지식을 의미하는 '기노스코'와는 달리 직관적인 지식을 나타낼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요한은 동사를 특별히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였으므로 본절에서 의미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