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거듭난 삶 2019. 9. 24.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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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 16:31-3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각각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16: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 예수는 제자들의 믿는다는 고백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같지만 구절은 앞뒤 문맥에 따라서 조심스럽게 상고(詳考)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는다는 고백과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예수를 떠나게 되는 배신 사이에 본절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32 보라 너희가 각각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학자들은 본절에 대하여 크게 가지의 견해를 제시한다.

 

(1) 혹자는 의문문이 아니라 서술문으로 이해하여 '이제는 너희가 믿는도다' 재번역한다(Bernard, Godet, Meyer).

이러한 해석은 예수가 제자들의 믿음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탄하는 의미로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다(McClymont) 것으로 지금까지 무지했던 그들의 믿음이 정도라도 고백할 있다는 사실이 예수에게 기특하게 여겨졌다는 뜻이다.

 

(2) 예수의 말씀을 의문문으로 받아들여 반어적(反語的)으로 해석하는 것이다(Calvin). 본절은 '너희에게 믿음이 굳게 섰다고 지금 자랑하는 거냐 ?'라는 의미가 된다.

 

예수는 제자들의 연약성을 지적하고 그들의 신앙적 한계를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절을 이와 유사한 13:38 비교해 필요가 있다.

 

(13: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13:38에서 예수의 질문은 반어법으로서 베드로가 예수를 위해 죽을 없음을 강조한 의미였다. 그리고 본절은 32절에 비춰볼 분명히 반어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를 사랑했으나 아직 자기 목숨을 버릴 만큼 완전한 사랑에 이르지 못한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으나 그들의 믿음은 지극히 불완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가 반어법을 사용하신 것은 베드로의 사랑을 무시했거나 제자들의 믿음을 무시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아직까지 그들의 사랑과 믿음이 불완전 상태에 있음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말은 성령 강림 때까지 온전한 믿음을 갖기 위해 기다리라는 권고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 16:32] 보라 너희가 각각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너희가 각각 곳으로 흩어지고 - '흩어지고' 원래 '뿌려 버리다' 뜻하는데 10:12에서는 이리에 의하여 흩어지는 양떼를 묘사할 사용되었다.

 

(10: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헤치느니라)

 

본절에서 예수는 13:7 언급된 예언을 인용하셔서 제자들에게 적용시키셨다.

 

( 13: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목자,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손을 드리우리라)

 

흩어짐은 이리떼 같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예수의 예언대로 제자들이 흩어진 것은 예수의 신성을 입증하는 증거 중에 하나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방금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밤에 모두 예수 곁을 떠나 각각 자기의 길로 도망해 버렸다.

 

( 26:56 그러나 이렇게 것은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끝까지 주를 따르겠다고 말하던 베드로조차도 번씩이나 주를 부인하는 연약함을 보였다.

 

( 26:33-34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그래서 예수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홀로 남게 되시는 고독과 더불어 고통의 십자가도 지셔야 했다.

예수는 인간들의 철저한 배신과 사랑하는 자들의 흩어짐 속에서 고통의 절정에 이르신 승리를 얻으셨고 승리를 통해 교회가 출발되었다.

 

무엇보다 그토록 연약했던 제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출발하였다는 사실은 출발의 궁극적인 기원이 제자들의 용기와 지혜에 있지 않음을 증거 한다.

 

 

 

[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 표현은 고별 설교에서 여러 반복되었다.

 

그런데 표현과 관련된 내용은 각기 조금씩 차이가 있다.

 

(1) 예수의 말씀하신 것들이 이루어질 때에 제자들이 믿게 하기 위함

 

(13: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14:29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2) 제자들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위함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3) 환난 때에 예수의 말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

 

(14: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4) 본절에서는 평안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것' 지칭하는 바를 고별 설교(13-16) 국한시키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 이제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조차 제다들이 소유해야 모든 것을 갖도록 하시기 위해 수고하신다.

 

예수가 주시는 평안은 세상적인 것과는 결코 비교할 없이 월등한 것이다.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평안은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지만 마음으로 누리는 기쁨에서 비롯된다.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그리고 또한 성령의 열매인

 

(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평안을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얻을 있었다.

 

담대하라 - 제자들이 담대(膽大)해야 대상은 세상에서 당하게 되는 환난이다.

 

환난은 상반절에서 언급된 평안과 대조되는 용어이면서 동시에 둘이 나오게 출발점 역시 대조된다.

 

환난은 세상에서 나오며 평안은 예수 안에서 나온다.

그러나 예수가 세상을 이기심같이 평안도 환난을 이긴다는 약속이 보장된다.

 

이런 이유로 제자들에게 예수는 담대하라고 권면하셨던 것이다.

 

(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여기서 세상은 바로 앞에서 언급된 세상과 약간 구별되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된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서 인간들이 생활하는 영역을 지칭하지만 구절에서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모든 대적자들과 사단의 무리 세력을 가리킨다.

 

(12:31 이제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14:30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예수가 싸우는 대상은 전자의 의미를 지닌 세상의 통치자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세상에 오신 목적은 정치적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이기었노라' 표현은 본서 외에 요한의 서신서에서도 영적 승리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요일 2:13-14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5:4-5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예수는 세상으로부터의 승리를 묘사함에 있어서 동사의 완료형으로 말씀하신다. 완료형은 본절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는 아직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으므로 아직 부활의 승리 역시 거두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료형의 동사를 사용하신 것은 승리가 미래의 일이지만 완전히 확보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는 '부활'로써 사망의 노릇하는 자들로부터 승리를 거두셨으며

 

( 5:12 그러므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딤후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세상을 정복하셨다.

 

이러한 승리에 대한 완료 시제는 승리의 영속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승리는 그리스도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그와 연합한 모든 자들에게 동일한 의미로 적용된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나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 8:37) 고백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