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엘리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산기가 가까웠더니

거듭난 삶 2021. 1. 17.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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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느하스 아내의 죽음

(사무엘 상 4:19-22) 그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산기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 빼앗긴 것과 그 시부와 남편의 죽은 소문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20) 죽어갈 때에 곁에 섰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지도 아니하며 관념치도 아니하고

21)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 시부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며

22)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하나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것은 엘리의 집이 처량해지는 이야기이며,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소식이 몰고온 슬픈 느낌이었다.

 

또 그 이야기는 비느하스의 아내와 관련된 이야기인데,

비느하스는 이 모든 재난을 이스라엘에 몰고 오게 한 장본인들인 엘리의 아들들 중의 하나이다.

그녀는 젊은 나이지만, 나이가 많은 그의 시아버지 엘리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생명을 바치게 되었다.

검은 머리도 흰 머리를 가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슬픔에 젖어 무덤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을 가져왔다.

여기에 나타난 기록에 의해 미루어 보면 그녀는 다음과 같은 여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 그녀는 매우 연약한 심령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녀의 마지막 때가 가까이 이르게 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4:19)라고

말씀하신 바 계시다.

 

그것이 비록 사내 아이라 할지라도 그 출산이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은

"수태 못하는 이가 복이 있다" (23:29)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행한 시기에 놀라운 소식이 전달되었다.

그 소식은 다른 커다란 공포와 또 슬픈 격정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주었다.

그녀가 존경하던 시아버지의 죽음과

또 아무리 나쁜 남편이라도 그녀가 사랑했던 남편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

더우기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부려 해산하였다."

 

(19그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산기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 빼앗긴 것과 그 시부와 남편의 죽은 소문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그녀에게는 온갖 도와주는 힘이 모두 필요한 때였는데,

오히려 그 소식은 그녀의 심령마저 약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능히 스스로의 힘으로 아이를 낳을 힘이 있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듣자 맥이 빠지고 죽어 가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의 생을 위로한 크신 위로를 잃어 버린 마당에

도무지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이처럼 괴로움에 처한 사람들은

은혜로우신 언약으로부터 위로를 받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슬픔만이 아니라

그들이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갑작스럽고도 매우 위급한 비탄에 처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때에 신앙은 그를 연약하지 않게 하여 준다.

 

(27:13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 그녀는 비록 악한 남편과 짝을 맺게는 되었어도, 매우 은혜가 충만한 여인이었다.

 

"남편과 시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가졌던 그녀의 관심은

단지 그녀의 본능적인 정서의 발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고 할 때에 나타내었던 그녀의 커다란 관심은

하나님과 거룩한 것들에 대해 품었던 그녀의 경건하고 고귀한 정서를 나타낸 것이었다."

 

전자는 그녀의 출산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후자는 그녀의 심령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유언에 의해 밝혀졌다.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고 그녀는 말했다(22).

 

그녀는 자기가 속한 자기 가족의 멸족보다도

하나님의 궤가 빼앗기게 됨으로써 당하는 이스라엘 온 민족의 침울한 운명을

더욱 안타깝게 한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슬픔이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

 

1 . 그 슬픔이 그녀로 하여금 자기의 자식을 잘 돌보지 않게 만들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아마 그 성읍의 귀부인들이었을 여인들이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여인들은 그녀의 관심이

전적으로 아이를 출산하는 데서 오는 고통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아이가 출생하자 이렇게 그녀에게 말했던 것이다.

 

"두려워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즉 이제 어려운 때는 지나갔다는 것이었다(아마 그 아이는 그녀의 첫 아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지도 아니하며, 관념치도 아니하였다."

 

만일 그녀에게 다른 근심이 없었다면,

그 출산 때문에 오는 괴로움은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다시 기억지 아니" 하게 되었을 것이다.

 

(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1) 하지만 그녀 자신이 죽어가는데 그 기쁨이 무슨 소용이 된단 말인가?

 

그때는 영적이며, 하나님께서 오는 기쁨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

죽음은 너무나 심각한 것이기에

세상에 속한 기쁨을 맛보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

죽음은 쓸쓸하고 거칠은 것이다.

 

(2) 또 하나님의 궤가 빼앗긴 것을 애통해 하는 사람에게 그 기쁨이 무슨 소용이 된단 말인가?

 

실로에 있던 하나님의 궤를 잃어 버리고,

그것이 블레셋 땅에 노획되어 갔는데,

이스라엘에 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하여도 그것이 그녀에게 조금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우리가 더욱 바라고 있다면

세상적이며 물질적인 쾌락에서 우리는 기쁨을 얻지 못한다.

더우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와 사랑의 돌보심에서 위로를 얻고자 하면 더욱 그렇다.

 

그처럼 "무거운 마음" 을 가진 자에게는

"노래를 불러 준다는 것"

마치 "신김치에 초를 치는 것" 과 같은 것이다.

 

2. 그 슬픔은 그녀로 하여금 자기 아이의 이름을 그 침울함을 기억할 수 있는 이름으로 짓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지마는

사실 그 아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단지 "이가봇" 이라고 부르라고만 하였다.

 

그것은 "어디에 영광이 있단 말인가?"

또는 "아이고 영광이여!" 또는 "영광이 떠났다" 는 뜻이다.

 

(21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 시부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며)

 

그것은 그녀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자 하는 매말라가는 마지막 입술에서 새어나온 말이다.

 

(22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그 아이는 명예롭지 못한 아이이니만큼

그 아이의 이름도 명예롭지 못하게 지어서 불러라.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은 갔다.

이제 다시 그것을 회복할 희망도 없다.

 

이제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이, 더우기 제사장들의 이름이 영광스러운 이름이 될 수 없구나."

 

(1)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임재의 감시와 하나님의 많은 계명이

그들의 부요와 이익보다도 더욱 그들의 영광이 되었다.

 

(2)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런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와

하나님의 계명이 없어질 때, 그것은 곧 그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떠나시면 영광도 떠나고 모든 선한 것도 함께 사라진다.

하나님이 떠나가시면 우리는 저주를 받으리로다!

 

*메튜헨리의 주석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