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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와 그 시대

거듭난 삶 2021. 12. 28.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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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와 그 시대

 

이사야서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3015: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이사야는 유대인이었고, 이스라엘인은 아니었다.

즉 유다, 베냐민의 2지파로 이룩된 남방 유다왕국에 속한 사람이었고,

기타의 10지파로 이룩된 북방 이스라엘 왕국에 속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 점에 있어서, 호세아와 달랐다.

호세아는 북방 이스라엘 왕국에 파송된 예언자였다.

이사야는 유대인이었고, 예루살렘의 시민이었다.

수도 예루살렘이 그의 활동의 땅(고장)이었다.

그는 도시인이었다. 예언자 아모스가 농부였던 것과는 전연 달랐다.

 

아모스의 소리는 지방 농민의 소리였는데 대하여,

이사야의 소리는, 중앙 수도인의 소리였다.

수도(서울)사람에게 그 특유의 권위가 있었다.

이사야의 소리는 그 점에 있어서,

아모스 기타의 소예언자의 음성(소리) 이상이었다.

 

이사야는,

유다왕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때에 예언했다고 한다.

그가 선지자(예언자)로 부르심을 입은 것은,

웃시야왕의 죽던 해라고 있고 보면,

 

(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그때 아마도 그는 20세 전후의 청년이었을 것이므로,

그는 아마도 기원전(B.C) 760년 전후에 태어났으리라.

그리고 그 활동이 히스기야 왕이 죽기까지 계속되었다고 보면,

그는 63~64로서,

기원전 700년에서 2, 3년 후에 죽었으리라.

 

여하간 퍽 긴 활동기였음을 알 수 있다.

바로 내(작자, 내촌감삼 1861-1930)

메이지덴노(명치천황 무쯔히또 목인 1852-1912 좌위 1868-1912)

메이지 12(명치십이년, 1879)에 전도를 시작하여,

다이쇼덴노(대정천황 1879-1926 재위 1912-26)4(1915)까지

계속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나(저자 내촌)는 다시 쇼우와 2(1927)인 오늘까지,

즉 이사야보다도 12년이나 더 오래 전도했다고 생각하면,

그 오랜 데에 비하여 한 일()은 너무 적음을 생각하고,

실로 부끄럽기(참괴) 그지없다.

 

즉 예언자 이사야는 기원전 700년의 사람으로 보아 틀림없다.

701년에는 앗시리아(앗수르)왕 세나케립(산혜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유다왕 히스기야는 이것을 수호,

이사야의 말에 따라 항복을 면했던 것은, 역사상 명백한 사실이다.

 

이사야는 기원전 700년의 사람이었다.

즉 짐무덴노(신무천황-158p ) 즉위에서 다시 반백 년 전에,

활동했던 사람이었다.

공자보다도 150년가량 오래고, 오래고 오랜 옛날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발한 말이 20세기의 오늘날 또한

인류의 사상을 인도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기이하다.

진리의 불멸성은 이것으로도 알 수 있다.

사람은 진리를 주장하여, 그 이름은 불후하게 전해지는 것이다.

 

이사야가 발한 불후의 말은 허다하지만,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3015절이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이렇게 말씀하셨도다

너는 돌이켜 고요히 하면 구원을 얻고 조용히 하여 의지하면 힘을 얻으리라'(일역)

 

이것은 루-터 특애의 성어로써,

그로써 일어난 프로테스탄트교의 근본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자세한 해석은 후일로 미루기로 하고,

그 어느 때, 어떤 경우에 발해졌던 말인지,

그것을 아는 일은 이사야시대를 아는데 좋은 길이다.

 

이것은 기원전 735년경에, 발해진 말이라고 보아 틀림없다.

그 때 유다왕은 아하스였고, 앗수르 왕은 디글랏 빌레셀 ()

이집트(이집트) 왕은 샤바카()였다.

당시의 이대강국은 앗슈리야(앗수르)와 이집트(애굽)로써,

전자는 신흥국, 후자는 노대국이었는데,

그 사이에 개재(끼어 있는) 한 소국에게 있어서,

국시상(국가시정의 근본방침)의 대 문제는,

신구 어느 강대국에 부종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다국은 앗수르(앗시리아)에 붙으려는 데 대하여,

주위의 소국은 이집트에 따르려했다.

특히 그 중에서 비교적으로 강대했던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이 방침을 취했다.

 

즉 이집트에 의지하여 앗시리아에 적대하려고 했다.

이 외교적 태도의 차이에서 유다 대 시리아 및 이스라엘의 반목이 생기고,

마침내 유다왕 아하스는,

시리아의 레진(한글 역:르신) 및 이스라엘 왕 베가를

적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이 되었다.

 

여기서 시리아(다메석을 수도로 하는 아람) 및 이스라엘의 연합군은,

유다군에 대항하기에 이르고,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은 위험에 빠졌다.

 

이 위기에 처하여,

유다왕 아하스는 선지자(예언자) 이사야의 의견을 듣고자 하다,

뜻 밖에 교외 '세탁자의 밭 큰길(빨래 말리는 들의 대로)'에서 그를 만났는데,

그때 선지자(예언자)의 발한 말이 이것이었다.

 

(7:3이하,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9절의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한글 개역)고 있음은,

 

3015절의 말씀을 줄인 것으로서,

예언자가 이 때에 발한 말은,

내가 전에 인용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이리하여 지금 인류의 표어로 된 이 말의 기원이 명백해진 것이다.

이것은 유다왕 아하스가

주위의 사정에 대하여 거취에 헤매던 때에,

그에게 정도를 보이려고 함에서 이사야가 한 말이다.

 

,

앗시리야의 연합군을 두려워 할 바 없다.

다만 주되시는 여호와께로 돌아가라.

마음을 조용히 하여, 그에게만 의지하라.

그리하면 구원과 힘(능력)을 얻으리라는 것이었다.

 

즉 외교술을 농할 것 없고,

하나님을 믿고 혼자서 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하스는 이에 따르지 않고,

앗시리야 왕에게 원조를 구하여,

연합군을 깨칠 수 있었다 해도,

 

이것이 앗시리야가 유다의 정치에 간섭하는 기인이 되고,

마침내 150년 후에 유다는

앗시리야의 후계국인 바벨론에게 멸망당하는 바로 되었다.

 

 

*내촌감삼의 (19281'성서지연구')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