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engol 2

이사야의 이름에 대하여

거듭난 삶 2021. 12. 29.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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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이름에 대하여

 

이사야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97: 그의 정권과 화평이 번창하여 끝이 없으며 그가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군림하여 그것을 정비하고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공의와 정의로 그것을 굳게 세우리라. 만군의 주의 열심이 이것을 이루리라.

 

5916: 참으로 진리가 없어지므로 악에서 떠나는 자가 자기를 탈취물로 만들매 주께서 그것을 보시고 공의가 없음을 기뻐하지 아니하셨도다.

 

* 참조 : 63

 

 

히브리인(내촌 5359p)의 이름은,

모두 신앙적으로 뜻깊은 이름이었다.

 

한나는 그녀가 낳은 아들을 사무엘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 (일역)’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사무엘상 120절 한글 개역)는 뜻이었다.

 

기도에 의해 얻은 아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바친 것이다.

 

천사는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

그 아내 마리아가 낳을 아들을 예수라 이름하라고 했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태복음 1:21)고 있다.

 

그리스어(헬라어)의 예수는,

히르브리어의 '이에슈아' 또는 '요슈아(한글역:여호수아)'로서,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뜻이다.

 

이사야의 이름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사야'는 히브리어의 에샤이야(예사이야)를 그리스어로 고친 것이다.

그리고 에샤이야는 에샤이야후(Yeshyahu)의 약어로서,

'여호와(Yahu) 구원을 베푸셨다'는 뜻이리라(델리치-내촌4권 주역 29p 참조).

 

그러므로 예수라든가, 이사야라든가,

그 의미는 거의 마찬가지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신앙 두터운 히브리인은 그 이름으로 자기 천직을 읽었던 것이다.

 

서양 속담에 Nomen est omen(이름은 마음의 표시다)라는 것이 있는데,

히브리인은 그것 이상으로 자기 이름에 자기 사명을 썼다.

 

이사야, 에샤이야후, 여호와께서 베푸셨도다,

 

예언자(선지자 이사야)는 수없이 그 아버지 아모스가 자기에게 붙인

이 이름의 의미에 대하여 묵상했으리라.

그리고 이것이 드디어 그가 전파하려는 복음의 표어로 되었다.

 

여호와께서 구원을 베푸신다.

그 의미는 심원무궁하다.

 

구원, 도우심, 죄의 속박에서 구출되는 일,

인생, 실은 이것보다도 소망스러운 것은 없다.

 

행복이라고 해서, 새롭게 행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서의 가르치심에 따르면,

사람은 행복하게 창조된 자로서,

새로이 행복을 구함의 필요는 없다.

 

어떤 것이 행복을 빼앗은 것이다.

그리고 만약 - '어떤 것'을 제거할 수 있다면,

혹은 그 어떤 것의 속박에서 인류를 석방 시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인류는 행복해 지는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성서의 견해는,

근대인의 견해와 다르다.

근대인은 행복증진의 필요조건으로서

진보를 요구하지만,

성서는 구원을 요구한다.

 

이사야 591-2절에 이르고 있다.

 

'여호와의 손은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 아니다.

그 귀는 둔하여 듣지 못하시는 것 아니다.

오직 너희 사악한 짓(), 너희들과 너희들의 하나님과의 사이를 멀게 하고

또 너희들의 죄,

그 얼굴을 가리워서 들리지 않게 했도다. (일역)'

 

은혜의 하나님은 영원토록 계시다.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은혜를 입을 수 없게끔 하는 것은,

그들의 죄이다.

 

그러므로 죄가 제거될 것인가,

그는 지금 곧 하나님의 은혜,

즉 최상의 행복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이사야 기타의 성서기자가, 힘주어 말하는 바이다.

 

그리고 개인도 국가도 사회도 인류도 그렇게 하여 구원되는 것이다.

진보는 결코 행복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가 명시하는 바이다.

증기도, 전기도, 라디오도,

인류를 행복하게 못했다.

 

날마다의 신문지가 분명히 그것을 보여준다.

참된 행복은, 죄에서 구원됨으로써 온다.

참된 행복은 문명의 이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차 없고, 전기 없고, 가스 없는 곳에서도 참된 행복을 본다.

 

사람이 죄의 속박에서 해방된 곳에 찬미 소리가 오른다.

진보는 아니다. 문화는 아니다.

구원이다. 석방이다.

 

예수는 그 의미에 있어서 세상의 구주였다.

이사야는 그 의미에 있어서 석방의 복음의 선지자였다.

 

그렇다면 구원은 누구로 말미암은 것인가?

정치가일까, 학자일까, 철학자일까, 종교가일까?

 

아니라고 이사야는 대답하는 것이다.

여호와 자신 스스로가 이것을 베푸신다는 것이다.

 

'에샤이야후'이다. 야후, 여호와,

그가 구원을 베푸신다고 한다.

 

거기에 또한 성서의 가르침의 특질이 있다.

성서는,

국가 또는 사회의 구제(구원),

개인 또는 단체의 운동 노력에 의해 행해진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다'고 하여,

구원은 하나님 특유의 대권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사야는 수 없이 되풀이 하여 이것을 말한다.

 

공평과 정의는 완전하게 세계에 행해질 것이라고 하여,

만국 평화회의에 의해 행해질 것이라 않고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9:7 한글개역)고 한다.

 

5916절에 이르고 있다.

 

'여호와는 사람 없음을 보시고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도다.

그래 그 팔로 스스로도우시고 그 의로서 스스로 떠받으셨도다'(일역)

 

유명한 631-6절이, 이 진리의 유력한 창도이다.

사람인 구조자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 구원을 베푸신다고.

 

만약 '이사야교'라는 것이 있다고 하면,

그 말하는 중심적 진리는 이것이다.

 

'이사야' '여호와 구원을 베푸신다',

'예수' '여호와는 구원이시라

하나님 자신이 인류의 구원을 주장하신다.

 

그렇다, 그 자신이 구원이시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린도 전서 1:30 한글 개역)라고

있는 그대로이다.

 

그리스도 신자의 실험이 모두 이것의 참됨을 보인다.

세계의 역사도, 또한 복음의 이 진리를 증명한다.

 

자기의 힘에 의해 구원된다고 생각하는 신자는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 자신이 구원을 베푸시는 까닭에 구원은 귀한 것이다.

자기가 아니다. 타인도 아니다.

 

하나님 자신,

그가 우리를 긍휼히 여겨 구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형언할 수 없는 감사이다.

그리고 사회국가의 구원에 대해서도,

그에게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도의 필요는 여기에 있다.

근대인이 운동에 의해 하려는데 대하여

그리스도 신자는 기도에 의거하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19281'성서지연구')를 참조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