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이상
이사야서 1장 1절 :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상 계시라.
*참조 : (요한계시록 1장)
이사야는 예언자 중 최대자이며, 또 모범적인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사야를 아는 것은 예언자를 아는데 가까운 길이다.
예언을 읽어서 글자 그대로
'미리 말하는 것'이다.
'사전에 말하는 것'이다.
영어의 Prophesy에 이 의미가 있다.
pro는 '전이고, phanai는 '말하다'이다.
foretell이라고 함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예언자는,
실로 '사전에(앞서서) 말하는 자'이다.
예언자는 또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자'이다.
pro에 '을 위해' 또는 '대신하여'의 의미가 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자',
그것이 프로피트(프로펫), 예언자(선지자)이다.
히브리어로 예언자를 나비(nabi)라고 한다.
'비등하는 자', 또는 '분출하는 자'의 뜻이라고 한다.
예레미야서 20장 9절이 이것을 보여준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한글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내 마음에 임하여
나는 끓는 (비등하는, ~) 솔같이 됨으로써,
끊는 물(열탕)을 튕기어 낸다는 것이다.
혹은 여호와의 열심이 나를 몰라,
나로 하여금 화산이 불을 토함 같이,
그의 말씀을 뿜어내게 한다고.
침묵하기에 견디어 내지 못하여 말한다는 뜻이다.
나-없기 때문에 말하는 자이다.
하지만, 예언자가 무엇인지는,
정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를 앎으로써 알게 된다.
우리들은 먼저 예언자에 관한 오해를 제거할 필요가 있다.
예언자라고 하면,
정의를 부르짖고, 죄를 책하는 자로만 생각함은 오해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자이므로,
그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을 말함과 동시에,
그 은혜와 사면을 전한다고 한다.
하나님은 예언자를 써서 우리들의 죄를 책하고,
그리스도로써 이것을 사하셨다고 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사람의 죄를 책하셨다.
예언자도 또한 많은 경우에, 죄의 사면의 복음을 전했다.
예언자는 두려운 자,
예수님은 상냥한 분이시라고 하는 것은,
예언자도 예수님도 모르는 자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로마서 11:22 한글 개역)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예언자에게 인자와 엄숙의 양면이 있다.
우리들은 이사야서 1장에 있어서 이미 죄사함의 복음을 분명하게 읽는 것이다.
이르기를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 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1:18 한글 개역)고.
예언자는 말하는 자일뿐 아니라 또 보는 자이다.
예언자는 선견자이다.
제 1장 1절이 그것을 보여준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본 이상이라'고 있다.
이사야는 이상을 보고,
이것을 세상에 전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 붙좇아 사상을 얻어,
이것을 전파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또는 고지에 접하여 이것을 알렸다는 것 아니다.
이상을 계시 받아,
이것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상이란 꿈이다. 환영이다. 그림이다. 활화이다.
신기루 같은 것이다.
예언자는 사상을 전승한 자가 아니다.
환영을 묵시 받은 자이다.
그 점에 있어서 시인이나 철학자들과 다르다.
(나훔서 제 1장 1절에 '엘고스 사람 나훔의 이상의 글'이라고 있음을 참조하라.)
예언자(선지자)가 본 이상(묵시;계시)이 무엇인지는,
이것을 신약성서에 있어서 알 수가 있다.
다메석 도상에서 바울이 본 것은,
그리스도의 이상이었다.
그는 거기서 부활하신 영광의 주의 이상을 본 것이다.
그는 또 제 3의 하늘(삼충천-신약역주)에 이끌려 올라가,
거기서 사람이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고린도 후서 12:1-4 자랑하는 것이 물론 내게 유익하지 아니하나 내가 주의 환상들과 계시들로 나아가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 (몸 안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며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러한 사람을 알았노니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채여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는데 사람이 그것들을 말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느니라.(한글킹제임스 흠정역).
그리하여 사도 바울도 역시
이사야, 나훔과 한가지로 예언자였다.
특히 신약 최후의 글인 요한 묵시록은 순연한 예언서이다.
묵시록(계시록)은 견상록이다.
1장 9절 이하에 이르기를,
'나 요한은.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몸을)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있음을 보았노라). '고 있다.
기타, 제 6장 기록된
'네 말'의 이상 같은 것
(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회색 말-한글역은 청황색 말의 이상)
모두 이런 것이다.
구약에 있어서도,
신약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그 하시려고 하시는 것을,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이상,
즉 활화로써 보여 주시는 것이다.
성서가 근대인에게 난해 되는 이유는, 이에 있다.
근대인은 구주인에게 배워가지고서,
만사를 이지적으로, 즉 사상으로서 풀려고 한다.
이에 반하여,
성서기자는 생각하려 않고서 보려고(체험하려)했다.
그들은 생각한 결과,
즉 사상을 전하려 하지 않고서,
본 일, 즉 이상을 보여주려 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 '이라고
요한 제 1서 1장 1절(-3절까지)에 말한다.
하나님의 묵시는, 원래 실물적이었다.
그러므로 분명했었다.
애매모호 한 데가 조금도 없었다.
그러므로 예언자의 말은 절로 간결했다. 강견했다.
러스킨이 말한 바 있다.
'인생 최대의 사업은,
어떤 것을 보고, 본 것을 문자로써 전하는데 있다'고.
그리고 예언자는 모두 이 사업을 수행한 자이다.
하나님은 그 뜻을 사람에게 전하심에 있어서
이상으로써 하시고, 사상으로써 하지 않는다.
*내촌감삼의 (1928년 1월 '성서지연구')를 참조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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