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실현의 꿈
이사야서 2장 1-4절 :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말씀이라.
2) 마지막 날들에 주의 집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세워지며 작은 산들 위로 높여지리니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흘러들리라.
3) 많은 백성들이 가며 이르기를, 너희는 오라. 우리가 주의 산에 오르고 야곱의 하나님의 집에 이르자. 그분께서 자신의 길들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터인즉 우리가 그분의 길들로 걸으리라, 하리니 이는 법이 시온에서부터 나가며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갈 것이기 때문이라.
4) 그가 민족들 가운데서 심판하며 많은 백성들을 꾸짖으리니 그들이 자기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자기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이 민족을 치려고 칼을 들지 아니하고 그들이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아니하리라.(한글 KJV)
*참고 : 미가서 4장 1-4절 : 그러나 마지막 날들에 주의 집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세워지며 작은 산들 위로 높여지리니 백성들이 그리로 흘러들리라.
2) 많은 민족들이 오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주의 산에 오르고 야곱의 하나님의 집에 이르자. 그분께서 자신의 길들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터인즉 우리가 그분의 길들로 걸으리라, 하리니 이는 법이 시온에서부터 나가며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갈 것이기 때문이라.
3) 그가 많은 백성들 가운데서 심판하며 멀리 있는 강한 민족들을 꾸짖으리니 그들이 자기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자기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이 민족을 치려고 칼을 들지 아니하며 그들이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아니하고
4) 오직 각 사람이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밑에 앉으리라. 아무도 그들을 두렵게 하지 아니하리니 만군의 주의 입이 그것을 말하였느니라.(한글 KJV)
이사야서 제 2장으로서 새로운 예언이 시작된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본 바의 말씀은 이것이라’(2:1-일역)고 있다.
본 바의 말씀이라고 한다.
말씀은 듣는 것이지, 보는 것은 아니다.
어찌하여 본 바의 말씀이라고 하는가?
예언자(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지 않고서, 보았다고 한다.
1로는,
이를 이상으로 본 것이리라.
마치 활동사진에서 본 것처럼,
그림에 의해 계시에 접한 것이리라.
2로는,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묵시로서 전해 졌으리라.
그 어떠한 형태로써였는지. 지금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생생하고 분명한 형태로써 전해 진 것은 확실하다.
만약 우리들의 경험에 있어서도, 이와 비슷한 것을 알고자하면,
시인의 사상, 또는 예술가의 이상 같은 것임에 틀림없다.
소위 천래의 사상인 것으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는 질의 것이다.
홀연히 나타나, 깊이 뇌리에 인상 주어진다.
악마(마귀)들렸다는 것처럼, 사상에 잡히는 것이다.
전래의 사상의 포촉하는 바로 된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어 말하는 것이다.
만약 비슷한 것을 구한다면,
예언자(선지자)는 시인 또는 작곡가류이다.
그리고 시인 단테(1권 4p주)와
또는 작곡가 베토벤(1권, 250p 주)은 대 예언자였다.
말씀을 보는 자,
하나님의 뜻을 생생한 사실로써 본 자,
그것이 예언자(선지자)이다.
그리고 이사야는 여기서,
그가 사랑하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아름다운 꿈을 계시 받았다.
그것은 ‘말일이 이르려는 때에’사실로 되어 나타나리라는 것이다.
2절 이하 4절까지의 말씀이 그것이다.
실로 아름다운 말씀이다.
예언 그것이 절대의 시이다.
누구나 이것을 읽고서 종생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4절의 말씀이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하리라’(2:4 한글 개역)고.
실로 아름다운 위대한 꿈이다.
이러한 꿈이라면 누구나 보고 싶다.
치인(癡人)은 꿈을 말한다지만,
이것은 지혜자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꿈이다.
일찍이 어떤 유명한 라비(유대교의 교사)가 어떤 평화회의 석상에서 말한 일이 있다.
‘그리스도 강세 700년 전에 이사야가 이 예언을 한 이래,
평화회의는 여러 회 실패했지만,
인류는 이 예언을 사로 잡혀,
세계적 평화의 실현가능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 평화실현의 그때까지 평화회의를 열어 말지 않으리라’고.
참으로 사실이다.
병기의 진보, 병비의 충실,
일찍이 오늘 같은 일 없다 해도,
병비철폐의 소리는 더욱 더 높다.
소국인 덴마크는, 이미 이를 실행하고,
공산주의의 노국은 그것이 세계적으로 실행될 것을 제창했다.
그리고 이것을 어리석은 자(치인(癡人))의 꿈으로서 조소한 것은
성공회의 본국인 영국이다.
또, 한편 평화를 고창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군함건조를 서둘고 있는 미국이다.
천치(치인)의 꿈이라고 하다.
그러나 성서가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보여주신 이상이다.
선교사를 이교국에 보내고,
성서의 채용을 촉구하고 있는,
영국과 미국의 양국이,
세계적 평화의 실현을 천치(치인)의 꿈으로서 조소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과 같은 예언을 예언자 미가가 했다.
미가서 4장 1-4절이 그것이다.
전에 이미 말한 대로, 미가는 이사야와 동시대의 예언자였다.
그러므로 미가가 이사야의 말을 대용했는지,
혹은 또 이사야가 미가의 말을 대용(채용)했는지, 알 수 없다.
혹은 이것은 그 시대의 예언자 모두의 공통사상이었다.
그것들은 최후의 일구였다.
‘모두 그 포도나무 아래에 앉고 그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으리라
이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미가서 4:4)고.
즉 세계적 평화 도래의 때에는,
사람은 각자 소지주로 되어,
자기 손으로 지은 작물을 먹고,
자기가 세운 집에서 안주하리라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즉, ‘하나님은 농촌을 만들고, 사람은 도시를 만들었다’고.
그리고 소위 문명은 도회문명이다.
사람이 집합하여 서로 돕고
최대한도로 지상의 생명을 즐기려고 하는 노력이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 가지 환난을 낳고,
경쟁을 일으키며 전쟁을 낳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의지함 없이
하나님께 의뢰하는 때 그는 절로 독립하게 된다.
곧 천연을 통하여 천연(자연)의 하나님께 가까이 하려는 신앙의 사람은
스스로 도회를 떠나, 시골에 거하려 한다.
자기 포도나무 아래에 앉고,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음은 그의 이상이다.
세계적 평화는, 자작농업의 발달을 촉구한다.
말일에 하나님 나라가 지상에, 건설되는 때에는,
도쿄, 오사까, 나고야라고 하는 것 같은 인간의 집합지는 자취를 끊고,
이에 대신하여 전국에 미치는 소지주의 자작농업의 번영을 보게 되리라.
그리고 지상에 아직 시베리아, 브라질, 캐나다 등
같은 광대한 경지가 미간지로 있음은,
예언자의 이상의 실현을 기다리기 위해서리라.
그때 사회문제 없고,
사람은 모두 자족하여,
평화는 물이 대양을 덮음 같이,
전 세계에 넘치리라.
*내촌감삼의 (1928년 3월 ‘성서지연구’)를 참조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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