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engol 2

오 야곱의 집이여, 너희는 오라. 우리가 주의 빛 안에서 걷자

거듭난 삶 2022. 1. 15.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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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그치는 때

 

이사야서 21-5절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말씀이라.

2) 마지막 날들에 주의 집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세워지며 작은 산들 위로 높여지리니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흘러들리라.

3) 많은 백성들이 가며 이르기를, 너희는 오라. 우리가 주의 산에 오르고 야곱의 하나님의 집에 이르자. 그분께서 자신의 길들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터인즉 우리가 그분의 길들로 걸으리라, 하리니 이는 법이 시온에서부터 나가며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갈 것이기 때문이라.

4) 그가 민족들 가운데서 심판하며 많은 백성들을 꾸짖으리니 그들이 자기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자기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이 민족을 치려고 칼을 들지 아니하고 그들이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아니하리라.

5) 오 야곱의 집이여, 너희는 오라. 우리가 주의 빛 안에서 걷자.(한글 KJV)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 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하리라

5)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이사야 2:1-5 한글 개역)

 

전쟁폐지는 인류의 이상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 이상을 전한 것은 예언자 이사야이다.

그는 지금부터 2600년 전의 옛날,

완력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한 유일한 능력()으로 인정되던 때에,

이 이상을 전한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허다한 대전쟁은 행해져서,

전쟁 폐지 같은 것은, 치인의 꿈으로서 취급된 일,

그 몇 회인지를 알 수 없다 해도,

그러나 이 이상은,

지금도 역시 인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하리라.

 

옳다. 성상 그 위에 삼천년,

나라는 흥하고, 나라는 망한대도,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여호와에 의해 계시 받아 전한 이 이상은

마침내 사실로 되어 실현 되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주의하여 읽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예언자에 의해 전해진 전쟁폐지의 필요조건이다.

이사야는 단지 전쟁폐지의 이상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그저 다만 인류의 진보에 의해

전쟁이 폐지될 것이라든가,

평화는 임할 것이라든가를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어느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의 전쟁폐지를 선전한 것이다.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서,

이사야를 이해하는데 평화시인의 한 사람으로써 보며,

단지 인류의 이상을 말한 자로 보는 것은 그에 대한 커다란 오해이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란 말은,

그 전후의 관계를 떠나서,

단독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다.

 

이사야는 예언자였던 것이다.

다만 단순히 세계의 이상가였던 것은 아니다.

이것을 마음에 두는 일 없이,

예언자의 말을 해석할 수는 없다.

 

전쟁은 결국 그칠 것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언제, 어떤 경우에 그칠 것인가?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2:2 한글 개역)라고.

 

여호와께서 온 땅에 있어서 최상의 지위를 차지하시는 때라는 뜻이다.

인류 가운데 여호와보다 높은 이 없고

또 여호와와 위를 다툴 자 없고,

전 세계가 여호와의 배하에 속하고,

그가 최상의 자리로 드높여지는 때에

만국평화의 이상이 사실로 되어 나타나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 강세 후 1900년의 오늘일지라도 결코 그렇지 않음은 분명하다.

즉 오늘날이라 해도 여호와는

인류 간에 있어서 최상의 위치를 차지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오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세력을 다투는 자는 수많이 있는 것이다.

 

철학이 있다. 예술이 있다. 정치가 있다. 식산이 있다.

이는 모두 헤매는 인류에 의해,

여호와와 동등의 것이 아니면,

여호와보다도 더 우세한 것으로 인정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 자칭 그리스도교국에 있어서도,

여호와의 집의 산은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여호와의 전()의 산보다도 높은 산이 많이 있는 것이다.

아니 많은 자칭 문명인사는,

여호와의 존재마저 인정치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아래서,

전쟁폐지의 실행을 볼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세상의 소위 문명진보의 결과로서는

전쟁폐지를 부르짖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런 배리를 말할, 그런 천견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전쟁 폐지의 필요적전제로서,

여호와를 앎의 지식이,

물이 대양을 뒤덮음같이 온 땅을 뒤덮고,

여호와의 집의 산이 모든 봉우리보다 높이 치솟는 것으로써 한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2:2 한글 개역).

 

이는 전쟁폐지의 필요조건의 제이이다.

여호와께서 인류 사이에 최상의 위지를 차지하고,

모든 율법이 여호와께서 좌정 하시는 예루살렘과 시온에서 나오는 때에,

그때에, 전쟁폐지는 사실로 되어, 나타나리라는 것이다.

 

예루살렘과 시온이라고 함은,

무어 세계의 미래의 수부는 팔레스틴(1299 역주)

예루살렘에 옮겨지리라는 것은 아니다.

예루살렘은 어디에 있어도 좋은 것이다.

현금의 도쿄이라도, 런던이라도 좋은 것이다.

 

다만 여호와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 까닭에,

참된 예루살렘이 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참된 율법이 나오기에 이르면 그것으로 일은 되는 것이다.

 

세계의 수부를 터키령 수리아의 예루살렘에 옮겼다고 해서,

그것으로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예언자의 말은 단지 지리학적으로 해석해서는 알지 못한다.

 

심령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율법이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예루살렘과 시온에서 나오기에 이르는 때에

만국평화는 행해질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20세기의 오늘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지금 율법은 여호와를 모르는 의원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의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만 일본국의 의회에 한하지 않는 것이다.

영국에 있어서도, 미국에 있어서도, 불국에 있어서도,

독일에 있어서도, 그들이 의회라고 칭하는 것은

결코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시온의 성산은 아닌 것이다.

 

무신론자, 사회주의자, 기타,

여호와를 안다고 해도,

실은 무신론자보다도 여호와의 일에 대하여 어두운(모르는)

승려당 또는 교회류의 사람들이 의석을 차지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율법이 나와서

그 결과로서 전쟁이 마침내 그치기에 이르리라고,

그런 터무니없는(무계한) 것을 예언자 이사야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사야는 명백하게 말한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는 때,

그때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들고 라고.

 

이사야는 의원제도의 진보에 의해,

전쟁은 마침내 그칠 것이라고 하는,

그러한 평범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오인은 이사야의 평화사상이

많은 근세사상과 그 근본을 달리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민주정치의 진보에 의해 전쟁은 드디어 폐지되리라는 것은,

철학자 칸트(455 역주)가 처음으로 부르짖은 것으로서,

지금도 이세상의 많은 식자가 말하는 것이다.

 

오늘의 미국의 평화주의자의 다수는

저 그리스도신자라고 일컫는 자 까지가,

이 설을 채택하는 것이다.

 

그들은 만약 구아의 제방이 북미합중국(미국)을 본받아,

순연한 민주정치를 행하기에 이른다면,

그때에는 전쟁을 그치고,

이사야의 예언이 사실로서 이 땅에 나타나리라고 한다.

 

하버드대학 전 총리 엘리오트 같은 이도,

이설을 부르짖은 이 중의 일인이다.

평화궁의 기부자인 카네기씨 같은 이도,

역시 이 민주제도 숭배의 1인이다.

기타, 고등 그리스도교 잡지로써 자부하는 뉴욕 인디펜던트같은 것도,

이 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아는 것이다.

전쟁의 폐지는 민주정치의 보급에 의해 오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잔학한 내국전쟁은,

민주정치의 본가인 미국에 있어서 전쟁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의원제도를 채용한 후에,

개벽이래의 대전쟁에 종사했던 것이다.

의원제도의 원조인 영국은 남아의 두공화국에 향해 선전포고하고,

이것을 압복하지 않고서는 마지않았던 것이다.

 

전쟁은 민주정치의 채용 및 보급에 의해 그치는 것이 아님의 증거는,

이 밖에는 얼마든지 있다.

 

칸트는 대철학자이고, 엘리오트는 대교육가인데,

그러나 전쟁폐지의 일에 대해서는,

그들이 진리를 가르치는 자라고는 오인은 믿지 않는다.

 

그리고 예언자 이사야도,

또한 그들이 주장한 것은 일을 주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민주정치의 보급에 의해 전쟁은 그치지 않는다.

이에 있어서 사회주의자는 일어나서 말한다.

 

사회주의가 널리 채용되기에 이르면, 전쟁은 즉시로 그칠 것이라고’.

 

사실 그럴까?

사회주의는 과연 비전의 정신일 것일까?

 

오인은 그렇게 믿을 수가 없다.

사회주의는 비국가주의이다.

그러므로 이에 의해 국제적 전쟁은 그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사랑의 정신은 아니다.

이것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하여 가지는(품는) 적개의 정신이다.

사회주의에 의해 나라와 나라는 서로 싸우지 않기에 이른대도,

계급과 계급과의 사이의 쟁토는 그치지 않는다.

사회주의에 의해 전쟁은, 그 구역을 바꿀 뿐이다.

그렇지만 전쟁 그것은 의연(여전)히 남는 것이다.

 

미술과 공예는, 평화의 대수단이라고 한다.

실로 미술과 공예는,

전술과 전함보다 나은 평화수단이다.

그러나 전쟁이 미술과 공예에 의해 그치리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인류의 전쟁욕은,

미술과 공예로써 억제하기에는 너무도 강한 데가 있다.

미술과 공예는, 국민을 여성화하여 연약하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에 의해 평화라는 남성적인 미덕은 오지 않는다.

 

그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주창한 전쟁폐지의 은혜는,

이상 어느 방법에 의해도 오지 않는 것이다.

이사야는 이 일에 관하여서도,

소위 현대인과 전연 소신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사야는 말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집()의 산이 모든 산봉우리 위에 높이 치솟는 때,

그리고 율법이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시온의 전에서 나오는 때에,

그리고 여호와께서 열방(모든 나라)사이에 판단하시고,

많은 백성 사이를 잔잔케 하실 때(판결하실 때),

여호와가,

그렇다,

여호와 자신이 전 인류의 입법부로 되고,

또 행정부로 되고,

또 국제적 최고 법원으로 되시는 때,

그 때에,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때라고 한 것이다.

 

예언자 이사야가 주창한 전쟁폐지의 행복은,

민주정치에 의해 오는 것은 아니다.

여호와의 정치에 의해 오는 것이다.

사회주의에 의해 오는 것은 아니다.

 

복음주의에 의해 오는 것이다.

미술, 공예에 의해 오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선전과 그 신앙에 의해 오는 것이다.

 

여호와, 여호와, 여호와라고.

여호와를 떠나 전쟁은 그치지 않는 것이다.

이사야는 현대의 사상가처럼,

여호와를 떠난 비전론이나, 평화주의를 주창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그런 것이었다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국을 심판(판단)하신다는 것은 실제로 있을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성서는 창세기에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있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에 관해서는,

이사야에 한하지 않는다.

예언자라는 예언자는 이구동음으로, ‘있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 자신도,

또 이것이 있음을 가르치시고,

그 사도들도 모두 이것을 말했던 것이다.

 

구약에 있어서는, ‘여호와의 강림이라하고

신약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재래(재림)’이라고 하는바,

이것을 제거하면 성서는 없는 것이다.

 

여호와의 통치,

하나님 나라의 건설,

성서가 주는 인류의 이상은,

이 한마디로써 다호 있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고 한다면, 성서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성서기자는, 그 모든 신용을 걸고 말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기필코 인류를 통치하실 것이라고.

 

그리고 인류의 이상도,

또 실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시인의 꿈이라든가, 미술가의 이상이라든가,

실은 이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최후에,

인류 사이에 오시어 이것을 통치하시지 않는다면,

인생은 절망인 것이다.

인류는 그의 능력에 의해 완전이 역에 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고요히 또는 진지하게 생각하는 때에,

아무리해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언제 어떠한 방법에 의할지, 그것은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어떤 방법에 의해서,

인류의 노력이 모두다 실패로 끝난 뒤,

하나님 자신이 인류의 이상을 사실로 나타내시리라는 것은

인류의 마음속 깊이 잠겨 있는 바의 이상이라고 오인은 믿는다.

 

2600년 전,

서방 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 유대의 한 예언자가 말한 만국 평화의 예언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서 전 인류의 이상으로서 주창되어온 것을 본대도,

이 이상이 인류고유의 것으로써,

결코 흔적 없는 꿈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전쟁의 폐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선전(전파)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칭양하는 것이다.

그의 집()의 산을 모든 산봉우리에 굳게 서도록 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사랑의 하나님께

최상의 권위와 영광을 드리는 일이다.

 

이것을 제외하고 달리 전쟁폐지의 실행을 보는 길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는 분명 이것을 예언했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 안 되는 정치가를 회두로 모시는,

평화협회의 운동에 의해 전쟁폐지가 이룩되리라고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여호와 자신이 그에게 거역(배역)한 인류에게 제공하신 화해의 복음,

그리스인에게는 미련한 것,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돌,

철학자가 조소하고,

종교가가 의심을 삽입하는 이 단순한 복음이야 말로

최후에 나라로 하여금 병비를 풀게 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며,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최대유일의 세력이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다시 이 세력을 찬미하여 말했던 것이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이사야서 52:7; 로마서 10:15 한글역)라고.

 

 

*내촌감삼의 (19151성서지연구’)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