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engol 2

너희는 오라. 우리가 주의 산에 오르고 야곱의 하나님의 집에 이르자. 그분께서 자신의 길들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터인즉

거듭난 삶 2022. 1. 14. 00:23
728x90

평화 실현의 길

 

이사야서 22~4절 마지막 날들에 주의 집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세워지며 작은 산들 위로 높여지리니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흘러들리라.

3) 많은 백성들이 가며 이르기를, 너희는 오라. 우리가 주의 산에 오르고 야곱의 하나님의 집에 이르자. 그분께서 자신의 길들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터인즉 우리가 그분의 길들로 걸으리라, 하리니 이는 법이 시온에서부터 나가며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갈 것이기 때문이라.

4) 그가 민족들 가운데서 심판하며 많은 백성들을 꾸짖으리니 그들이 자기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자기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이 민족을 치려고 칼을 들지 아니하고 그들이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아니하리라.(한글 KJV)

 

 

111~9절 이새의 줄기에서 한 막대기가 나며 그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자랄 것이요,

2) 주의 영 곧 지혜와 명철의 영이요, 계략과 능력의 영이요, 지식과 주의 두려움의 영께서 그 위에 머무시며

3) 그로 하여금 주를 두려워하는 가운데 속히 깨닫게 하시리니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책망하지 아니하며

4) 오직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의롭게 재판하고 땅의 온유한 자를 위해 공평하게 꾸짖으며 자기 입의 막대기로 땅을 치고 자기 입술의 호흡으로 사악한 자를 죽이며

5) 의로 자기 허리의 띠를 삼고 신실함으로 자기 콩팥 주위의 띠를 삼으리라.

6) 이리도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염소 새끼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젊은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인도하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들이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으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놀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로되

9) 그것들이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상하게 하거나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물들이 바다를 덮는 것 같이 주를 아는 지식이 땅에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니라.(한글 KJV)

 

 

같은 이사야서 중에,

평화 실현의 꿈은 둘이 있다.

2장과 제 11장에 있다.

 

11장은 제 2장보다도 유명하다.

이자를 합치면, 꿈은 완전한 것으로 된다.

 

2장은 평화 실현의 시기를 보여주고,

11장은 그 인물을 보여준다.

 

언제 평화는 실현될 것인가 하는 것과,

누구에 의해 되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또 첫째의 꿈은 소극적인데 대하여,

둘째의 꿈은 적극적이다.

 

첫째의 꿈은 결말지어 말한다.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하리라’(2:4 한글 개역).

 

즉 전쟁 종식의 꿈이다.

둘째의 꿈은 결말지어 말한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11:9 한글 개역).

 

즉 평화 충실의 꿈이다.

그리고 평화는 말일에,

이새(내촌 3권 역주 참조)의 줄기(뿌리)에 의해 실현한다는 것이다.

 

만일 말일이다.

언제나가 아니다.

또 이새의 뿌리에 의해서이다.

누구에 의해서도 아니다.

 

평화 실현에 하나님의 정하신 때와 사람이 있다.

때는 말일이다.

인간이 그 노력을 다 시도한 뒤이다.

또 온 땅에 평화 실현의 준비가 이룩된 후이다.

예수는 그때에 대하여 알려 주셨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태복음 24:14 한글 개역) .

 

그리고 지금은 아직 그 때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또 그 때에는,

 

여호와의 집의 산은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서고,

모든 봉우리보다도 높이 솟으며’(2:2 일역)라고 있는데,

 

지금은 아직 그때가 아닌 것도 분명하다.

세상의 말기는 그 난숙의 때이다.

 

천사가 추수의 낫을 인류의 밭에 대는(넣는) 때이다.

천사가 추수의 낫을 인류의 밭에 대는(넣는) 때이다.

그때에 하나님의 적은 모두 멸망하여,

나라는 나라에 대하여 칼을 들지 않고,

다시는 전투를 연습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아직 그때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리고 세계의 평화를 가져오는데 다만 한 분의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이새의 줄기(뿌리)라는 것이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였으매,

이 평화의 임금으로 일컬어질 사람은 다윗의 후예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요셉의 아들로서 태어난

나사렛의 예수가 아니어서는 안 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분명하다.

 

간단히 말하면,

세계 평화는 정치가의 책동에 의해 오지 않고,

이새의 줄기(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가 잘 그것을 증명한다.

 

평화는 평화회의에 의해서 오지 않는다.

우리들은 올해도 제네바에 있어서의 영··일의 군축회의를 보았다.

그것이 완전히 실패로 끝나,

그 결과로서 미국해군이 대 확장되고,

사람은 제 2세계대전이 멀지 않음을 예상하기에 이르렀다.

 

전쟁을 폐지하기 위한 전쟁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그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베르사이유 회의(2338p 참조)는 전쟁 발생을 위한 많은 씨를 뿌렸다.

고 윌슨 대통령 (2337 참조),

끌레망소(2338 역주),

로이드 죠지(2228),

우리 사이온지 공작도,

사이또우총독도,

세계평화를 초래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하다.

 

이를 성취하는데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특별한 사람이 있다.

이사야는 그 사람을 가리켜 말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그리고 이 사람에 의해,

이리는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라고.

 

그런데 예언자의 이 언명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전 대통령 우드로 윌슨(2337p 윌슨 역주 참조)에 의해,

세계는 민주화되어 평화는 지상에 임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리스도 교회의 어리석음이여!

 

평화는 임하지 않고서,

사람에 의뢰했던 교회가,

세계대전 이래 함께 쇠약해진 것은,

당연한 결과라 일컫지 않을 수 없다.

 

평화는 온다. 반드시 온다.

하지만 사람에 의해 오지 않는다.

세론에 의해 오지 않는다.

하나님에 의해 온다.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9:27)고 있다.

 

세계의 평화는

하나님의 대능에 의하지 않고서는 이룩될 수 없는 사업이다.

그런데 베르사이유(2권말 역주 수록의 세계대전 참조) 회의에 있어서,

1회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을 듣지 못한다.

다만 제강국 대표의 상담에 의해

평화는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한 20세기의 정치가들의 어리석음은,

바벨탑(창세기 10:10)을 쌓아,

제민족의 일치를 꾀(도모)

고대 정치가들의 어리석음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다.

 

실로 소위 바벨의 혼란은,

세계 최초의 평화회의이다.

 

이새의 줄기(후예)인 평화의 임금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치 않는 평화회의는,

가령 파리, 워싱턴, 또는 칼빈의 성읍인 제네바에 있어서 열린대도,

모두 바벨의 회의로서,

혼란으로 끝남은 명백하다.

 

그리고 이 명백한 사실을 분별치 못하는

소위 그리스도교국의 행위는 의아스럽기 짝이 없다.

 

평화는 외부의 압박에서 오지 않는다.

내심의 조화에서 온다.

무기의 정교, 경제의 핍박에 의해,

인류는 전쟁을 그치지 않는다.

 

그 마음에 환희가 차는 때에,

사람은 쟁투를 싫어하기에 이른다.

 

전쟁을 악사로 알아서,

이것을 그치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 싫어짐으로써 이것을 전연 폐지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일본 무사의 혼에 예수의 영(성령)이 임한 때,

나는 전투를 싫어하는 평화 애호의 무사로 되었던 것이다.

 

인류가 전쟁을 그치는 길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죽음을 싫어하듯,

전쟁을 싫어하기에 이르는 때에,

세계에 평화는 임하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19283성서지연구’)를 참조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