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engol 2

그 율법은 시온에서 나오고 여호와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임으로라

거듭난 삶 2022. 1. 19.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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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실제

 

이사야서 2-4장의 대의(大意)

 

예언자는 일면에 있어서는, 여호와의 대언인이고,

다른 한 면에 있어서는, 이스라엘의 애국자이다.

 

그는 가장 고귀한 의미에 있어서의 애국자이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많은 애국자가 나타났지만,

이스라엘의 예언자와 같은 애국자는 이것을 볼 수가 없다.

 

예언자는 애국자의 모범이다.

애국을 예언자에게 배움으로써,

나라는 근본적으로 구원되고 백성은 철저하게 성결해졌다.

 

영미의 퓨리탄운동은,

밀튼, 크롬웰 등,

깊이 예언자의 정신을 따른 사람들에 의해 일으켜진 운동이다.

 

그리스(헬라), 로마, 일본의 애국자의 존귀는 말할 것도 없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의 예언자에 비하여 볼 때 아주 질이 다른 애국자이다.

 

나 자신이,

구약의 예언자를 읽기까지는 애국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아모스, 호세아등에게 배워,

나는 애국이 결코 좁고 비열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내가 지켜야할 마음이고,

또 행해야할 길임을 알았던 것이다.

 

예언자는 애국자로서 애국자 공통의 길을 걸어갔다.

그들이 보통의 애국자와 다른 것은,

하나님께 인도된 점에 있어서였다.

 

그리고 애국자는 그가 사랑하는 나라에 대하여 높은 이상을 가진 자이다.

이 이상 있음으로서,

그의 마음은 불타고,

그의 팔은 불끈거렸던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 이사야에게도, 이 이상이 있었다.

이것은 가장 아름다운 것,

장려비류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평화실현의 꿈이라고

제목하여 연구한 그의 말이 그것이었다.

 

여호와의 집의 산은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서고 모든 봉우리보다 높이 치솟으며 그리고 만국은 강 같이 이에 흘러들리라..’(2:2)는 것이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여호와의 집이란,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었다.

이사야에게 있어서는 그가 말하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나라 그 백성이,

모든 국민위에 서고,

만국은 강같이, 여기에 흘러 들어가리라는 것이었다.

 

보통 말로써 한다면,

이스라엘은 세계 제 1의 나라로 되어,

만국은 이에 귀복하기에 이르리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위력으로써 만국에 왕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로써 세계를 인도하는 것이다.

 

여호와 그 길()(거기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리라 우리는 그 길로 행할 것이라 그 율법은 시온에서 나오고 여호와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임으로라’(2:3 일역)고 있는 대로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라에 의해, 이렇게 인도되어,

전쟁은 그치고,

평화는 땅 끝까지 넘쳐 가득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자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이상에 자극되어 말했다.

 

아아 야곱의 집이여,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2:5).

(이스라엘, 야곱의 집, 유다와 예루살렘이 동의어 인데 주의하라).

 

이상이, 이사야가 자기나라에 대해 가진 이상이었다.

모름지기 그가 청년시대에 가졌던 이상인 것으로서,

그는 종생 이것을 버리지 않았다.

실로 장엄한, 광대무변한, 이상이었다.

 

이에 비해 볼 때,

우리나라 애국자가 품은 일본국에 대한 이상 같은 것은,

미치기에 너무나도 먼 바가 있다.

서양문명을 수입하고, 그의 무기를 얻어,

그를 지배하려는 유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다만 이에 의해서,

세계를 다스리고자 하는 것이다.

 

성일지 광일지.

하지만 예언자의 위대함이란,

그는 종생이 이상에 의해 살았다.

 

그는 여호와와 그 율법에 의해,

기타에 아무 위력을 쓰는 일 없이,

나라를 일으킬 수 있고,

세계 인류를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점에 있어서,

구미 오늘의 정치가라해도,

이스라엘의 예언자에게 도저히 미칠 것도 못된다.

 

만약 이사야가 오늘 영국 또는 미국의 의회에 서서,

그의 이 이상을 말한다면 어떠할까?

 

그는 곧 의장 밖으로 끌려 나가,

다시 민중의 돌에 맞는 바로 되리라.

이사야의 나라인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이상은 이상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는 어떤가?

이상이 분명하면 하느니만큼

실제는 분명하게 보이고,

높으면 높으니만큼

실제는 추하게 보인다.

 

이사야는 그가 품은 숭고한 이상을 가지고서 현실사회에 임하여,

 

여호와여, 주는 그 백성 야곱을 버리셨나이다’(2:6)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과 실제와의 현격이 너무나 많았다.

이에 있어서 일지,

그에게 감정의 격변이 일어났다.

그러한 백성에 대한 그러한 이상을 품었는가고 생각하여,

그는 자기의 각성마저 의심했었으리라.

 

이에 있어서랄까,

희망은 실망으로 변했다.

축복은 주저(저주)로 화했다.

은혜의 약속은 심판의 선고로 되었다.

 

이 천직을 가진 백성이, 이 상태에 있음을 생각하여,

그는 노하고, 울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이 심리적 상태에 우리를 둘 때,

26절 이하의 그의 말을 알 수가 있다.

 

그는 여기서 어느 이상가에게도 있는

소위 해산의 고통을 실험(체험)했던 것이다.

 

처음에 아름다운 이상의 꿈,

다음에 실제로 깬 때의 고통,

나중에 신앙에 의한 이자의 조화,

이사야도 또한 향상의 이 통로를 거친 것으로서,

그가 우리들의 친근한 형제인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19284성서지 연구’)를 참조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