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engol 2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 하기를 가르치며

거듭난 삶 2022. 10. 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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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백성에 대한 애가(哀歌)

 

성 경: [9:1-9]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2) 어찌하면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의 유할 곳을 얻을꼬 그렇게 되면 내 백성을 떠나 가리니 그들은 다 행음하는 자요 패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이 활을 당김 같이 그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아니하느니라

4) 너희는 각기 이웃을 삼가며 아무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온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니라

5)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 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수고하거늘

6) 네 처소는 궤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궤휼로 인하여 나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8) 그들의 혀는 죽이는 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중심에는 해를 도모하는도다

9) 내가 이 일들을 인하여 그들에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9: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

 

예루살렘 멸망의 상황이 너무나도 비참하여서 아무리 울어도 충분하지 않다.

즉 유다 백성의 죄와 파멸을 바라보자니

슬픔이 극에 달해 이미 눈물 근원이 말라버렸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또 다른 눈물 샘이 터지기를 바란다.

그러면 밤이고 낮이고 동포의 살육을 한탄하며 울 수가 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지금 이런 심정으로 노래하고 있다(Calvin).

 

 

 

[9:2] 어찌하면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의 유할 곳을 얻을꼬 그렇게 되면 내 백성을 떠나 가리니 그들은 다 행음하는 자요 패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그렇게 되면 내 백성을 떠나 가리니 - 고대 근동에는 여관이나 유숙하는 집이 없었다.

다만 대상들이 유숙하는 공공건물들이 더러 있었는데,

나그네들은 보통 여기서 유숙하였다.

 

그러나 그곳에는 가구나 음식 같은 것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때로는 지붕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막의 야수들의 침입 정도를 막아주는 벽만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예레미야는 지금 이처럼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면 거기로 피신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 백성에게 내릴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지 않아도 되리라는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이상과 같은 설명에서 보다시피

예레미야 선지자가 한탄조로 내뱉은 말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Clarke).

 

 

 

[9: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이 활을 당김 같이 그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아니하느니라

 

그들이 활을 당김같이 그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 활을 당긴다고 하는 것은

타인의 생명을 해하기 위함이다.

그들의 거짓말이 여기에 비유되고 있다.

 

혀는 타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본절은 참으로 적절한 비유이다.

 

(64:3 그들은 칼같이 자기들의 혀를 갈며 활을 당겨 독한 말들의 화살들을 쏘나니).

 

 

거짓 선지자들은 수없이 심판이나

파멸이 있지 않을 것이라고 혀를 잘못 놀려왔다.

백성들은 그들의 거짓을 참인 줄로 착각하고 그들을 믿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칼이 그들에게 임하였으며 그들을 모조리 파괴하였던 것이다.

 

 

 

[9:4] 너희는 각기 이웃을 삼가며 아무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온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니라

 

이웃을 삼가며 아무 형제든지 믿지 말라 - 이웃을 믿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들이 속이기 때문이다.

 

속인다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진리(에메트)가 없다는 것이며

또한 거짓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당시 유다 사회에 만연되었던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불신 풍조를 반영해 준다.

 

 

 

[9:5]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 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수고하거늘 -

 

혀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웃을 격려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나,

그들은 거짓을 가르치고 타인을 모함하는 일에 사용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야기시켰다.

 

또한, 그들은 파멸을 얻고 지옥에 가기 위해 악착같이 애쓰고 노력하고 있다.

 

 

 

[9:6] 네 처소는 궤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궤휼로 인하여 나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네 처소는 궤휼 가운데 있도다 - 인간의 마음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보시며

 

(삼상 16:7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그들의 악을 지적하신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의 처소가 궤휼 가운데 있다고 한 것은

그들이 악한 자들과 함께 악을 공공연히 자행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척하는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9: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여기서는

이전에 사용되었던 예화로 다시 되돌아가고 있다.

 

이미 유다인들은 제련되지 않는 불량 금속에 비유된 바 있다.

 

(6:27-30 내가 너를 내 백성 가운데 망대와 요새로 세웠으니 이것은 네가 그들의 길을 알고 시험하게 하려 함이라.

28) 그들은 다 심히 반역하는 자들이요, 비방하며 다니는 자들이며 그들은 놋과 쇠요, 다 부패시키는 자들이니라.

29) 풀무들이 불에 탔고 납이 불에 소멸되었도다. 주물공의 녹이는 일이 헛되니 사악한 자들이 뿌리 뽑히지 아니하였느니라.

30) 주가 그들을 거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버림받은 은이라 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그들을 다시 녹여서 유용하게 만들어 보시겠다는

하나님의 굳은 의지가 표명된다.

 

택한 백성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를 엿보게 한다.

 

 

 

[9:8] 그들의 혀는 죽이는 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중심에는 해를 도모하는도다 -

 

그들의 혀는 치명적인 화살과 같고

그들의 입은 속임과 사기로 가득 차 있다.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이웃들에 대해 겉으로는 다정하게 인사하면서도

그 내심은 어떻게 하여야 그들을 해할꼬 하는 생각뿐이다.

 

'해를 도모하는도다'라는 표현 중 ''에 해당하는 원어 '아라브'

맹수가 먹이를 노리며 숨어있는 것,

혹은 복병이 상대의 접근을 기다리며 엎드려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9:9] 내가 이 일들을 인하여 그들에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

 

백성들의 이 같은 악행에 대해

여호와께서 이 백성들을 처벌할 것이며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이런 나라'(고이)에 보복하실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고이'란 용어로 지칭한 것은,

이 용어가 이방 나라를 가리킬 때 주로 쓰인 것이란 점을 감안하면,

매우 참혹하다.

 

, 그들은 지금 이방인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고아'의 복수형인 '고임'으로 지칭되는 이방 나라들은

언약과 상관없이 족속들로서, 하나님의 보호와 약속 밖에 있었다.

 

아마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런 용어를 선택한 것은

그 당시 유다인들이 표리부동하게도

여호와의 언약을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