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8장 4-22절
이 장을 일독하고서 느끼는 것은,
그 전체에 걸쳐, 실로 예레미야적인 어조와 사상으로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일언일구, 그의 심장에서 힘차게 용솟음쳐 나오는 말은,
깊이 우리의 마음을 치는 것이다.
실로, 그 중에는 아직 많이 성서를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진 두 셋의 유명한 말이 있다.
제 7절, 11절, 22절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8:7 한글 역)
이 말씀을 읽고서 누구나가 그 숭고한 애국의 정과
풍요한 시적정조를 감탄치 않을 수 없다.
또 11절에 있는 유명한 말은,
미국 독립전쟁에 있어서의 애국적 열변가 패트릭. 헨리의 인용에 의해,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평강이 없도다.
Peace, peace, when there is no peace'(8:11)
그의 의분은 백성을 미혹하는 거짓예언자에 향하여, 불타고 있는 것이다.
또 22절은, 5장 1절의 말씀과 아울러
가장 심각한 대예언자의 비탄을 토로한 말이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8:22 한글 역)
제8장은 대체로 전장의 계속이다.
국인의 죄를 노하고, 또 슬퍼하는 말,
회개를 촉구하는 소리, 거짓 교사를 분개하는 말,
허탄한 데로 달려가 자기 상처를 치료 받기를 구하지 않는
가련한 백성에 대한 무한한 우수이다.
그 말은 드디어 9장 1절에 이르러, 그 최고조에 달하는 것이다.
중복이라면, 중복이다.
그러나 말은 차츰 심각을 더한다.
지금 시험 삼아 4절 이하를 읽으면, 거기에는 다만 절망뿐이었다.
즉 그들은 본능적으로 죄를 변하는 것으로서,
마치 전장에 달려 들어가는 군마가 다만 전진하는 것만 알고,
돌아갈 줄 모르듯, 그들은 죄로 달리기만을 알고,
여호와께 돌아서기를 모르는 것이다.
공중의 학, 산비둘기, 제비 등은,
정한 시기에 돌아 갈 줄 안다 해도,
여호와의 율법으로 오는 것은 모른다.
그렇다. 그들은 죄를 자기 본성으로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이르러 이미 참 길로 돌아설 희망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예루살렘 백성은 그것을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도리어 이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상처가 치료되는 것마저 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가련한 상태를 보고서,
예레미야의 마음에는 노함과 슬픔이 홍수처럼 밀어 닥쳐오는 것이다.
이 말에 접하여 사람은 말하리라.
그것은 너무 감정적인 표현 방식이며, 너무도 비관적이고.
참으로 예레미야는 감정에 눌려 정당한 판단을 넘어서,
과격한 말을 발했던 것일까?
결코 그렇지는 않다.
사람은 유다인에 한하지 않는다.
모두 나면서부터의 죄의 자녀로서,
그가 좋아 하는 것은 악한 것,
그가 증오하는 것은 선이다.
사람은 생래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정의를 사랑하는 자라는 것은,
가령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사상이기는 해도,
결코 사실 위에 입각한 사실은 아니다.
위는 사실에 반대하여,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멀리 예를 유다에서 취할 것도 못된다.
오늘 우리나라에 있어서,
또 우리들 각자를 돌아다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우리 정치가와 실업가와 관리는 어떠한가?
그들은 정의를 행치 않고, 뇌무를 기뻐하는 것이 본능이 아닌가?
상인은 거짓말로써 상업의 상도로 삼아 조금도 부끄러워 않는 것 아닌가?
기타 서로 헐뜯고 서로 모함한다.
사회전반의 형편을 보면, 가령 그 중에 소수의 선인이 있음은,
이를 인정한다 해도,
전체로 볼 때, 선이 그들의 부자연성의 것이라고 하여,
조금도 틀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은 쉽게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악을 지적받고,
도리어 자기를 변호하여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전적으로 악에 향하고 있는 자라는 것은
너무나도 인생의 암흑면만 보는 말로서,
가령 사회에 많은 죄악 있대도,
사람의 성은 원래 선한 것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자녀 됨의 소질을 갖춘 것이요,
그 중에 다소의 흠점 있음은,
발달의 도정에 있는 불완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러나 문제는 사실 여하이다.
그들은 아무리 사람을 이상화해도,
악은 악인 것으로서 어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예레미야처럼 인생을 깊이 살펴 헤아릴 사람은,
모두 거기서 절망을 발견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결국 백성의 죄로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을 알고서, 그의 슬픔은 실로 무한했다.
그의 말이 절로 격렬해지고 비조를 띠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그의 말을,
젊은 감정가의 열정이라 평하리라.
그러나 그는 함부로, 자기의 감정에 달리고,
실망을 마음에 그리면서 대언장어하고,
또 비분강개를 좋아하는 자는 아니다.
그의 슬픔은,
그의 전심전 존재의 근저에 기초한 인류적인 탄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나이가 감에 따라서도,
결코 그 비통한 어조를 바꾸지 않았다.
그는 최후까지 이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절망인가?
그렇다. 모두가 실망이다.
오늘일지라도 마찬가지다.
희망은 어디도 없다. 도쿄에 없다. 오사까에 없다.
뉴욕에 없다. 파리에 없다. 런던에 없다.
이 예레미야의 말은 분명히 옛 예루살렘에 한하지 않는 것이다.
인류가 언제나 헛된 희망을 품고,
죄를 회개함 없이 세계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려 하는 때,
하나님은 몇 번이고, 예언자를 보내어,
그들이 의뢰하는 것을 그 근본에서 파괴하고,
또 서로의 파괴로서 이를 벌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죄악을 인정케 하는 것이다.
그의 말은 오늘 세계 만민에게 적용하여 조금도 그릇됨이 없는 것이다.
시험 삼아 10절 같은 것을 보라.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8:10 후반 한글 역)
작게는 소매상인에서,
크게는 대은행의 총재,
대회사의 중역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탐내는 자임은, 모두 분명한 일이다.
실업가라고 하면, 훌륭하지만,
그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면,
다만 ‘번다. 돈이 있으면 좋겠다’, 그것뿐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아사노도 미쯔비시도, 스미또모도, 야스다도 구별은 없다.
이욕을 떠나서의 그들은 생활은 없다.
그리고 이들 세상의 부호, 권력가의 집에 출입 하면서,
그들의 찬성을 구하고, 그 원조를 얻으려는 교사, 목사, 전도사,
그들은 모두 거짓 예언자, 제사장이 아닌가?
그들은 정의 위해 세상의 유력자의 죄사장이 아닌가?
그들은 정의 위해 세상의 유력자의 죄를 조금도 책망하지 않는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몸(일신)의 이익과 안전인 것으로서,
그 때문에는, 백성의 죄를 대강 치료하고,
건강 없음에도 건강, 건강하다고 한다.
아직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그 죄의 회개를 촉구한 일이 없는 것이다.
그렇듯, 우리들은 사회의 어디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가 없다.
정치가, 실업가, 의사, 교육가 모두 우리가 의뢰할 바 못된다.
정부, 사회, 그것이 그러하다.
그러면 무엇에 의뢰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 자신일가?
아니, 자신도 역시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사람이라는 사람, 개인도 사회도,
즉 인류 그것에 희망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인가, 우리들은 이내 인류 중에 희망을 구하기를 그치고,
아주 이것 이외에 희망을 구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 최대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하나님은 성서로써 구원의 길을 보여주신 것이다.
인류의 전적절망을 가르쳐 주는 것이,
하나님의 성서인 동시에,
그 절망에서 도피하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성서인 동시에,
그 절망에서 도피하는 길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것이 이 성서이다.
성서의 위대함은 전적으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죄인이며,
이대로는 전혀 절망임을 보여 주는 것이 구원의 제일보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자기와 이 세상에 의뢰하기를 그치고,
오로지 전능의 하나님께 의회하려 하기에 이른다.
더구나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 독자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어,
구원의 기초를 성취하신 것이다.
우리들과 또한 그와 함께 십자가에 자기 죄를 못 박고,
자기에 죽고 하나님으로 살기에 이른다.
여기서 비로소 새로운 조화가 행해지고,
죄는 이미 우리의 본능이 아니라,
도리어 의가 우리의 본능으로 화하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석원병영필기)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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