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engol 2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레미야에 대하여 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 말며 그가 네게 말하는 대로 행하라

거듭난 삶 2023. 1. 6.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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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와 에벳멜렉의 구원

 

성 경: [39:11-18]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레미야에 대하여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에게 명하여 가로되

12) 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 말며 그가 네게 말하는 대로 행하라

13) 이에 시위대장 느부사라단과 환관장 느부사스반과 박사장 네르갈사레셀과 바벨론 왕의 모든 장관이

14) 보내어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서 취하여 내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붙여서 그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매 그가 백성 중에 거하니라

15)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6) 너는 가서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이 성에 재앙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한 나의 말이 그 날에 네 목전에 이루리라

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붙이우지 아니하리라

18) 내가 단정코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 같이 되리니 이는 네가 나를 신뢰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9:11-12]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레미야에 대하여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에게 명하여 가로되

12) 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 말며 그가 네게 말하는 대로 행하라 -

 

바벨론 왕이 예레미야에 대해서 특별한 배려를 하고 있는 내용이 언급된다.

예레미야가 바벨론 정부에 어떻게 해서 알려지게 되었는지 그 경위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 예루살렘 멸망 전에 바벨론에 투항한

유대인들에 의해서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Thompson).

 

즉 느부갓네살은 그들로부터 이 선지자가 예루살렘 함락을

예언하였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또한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바벨론에 반역하지 말고

항복할 것을 권유하곤 했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다(Clarke).

 

 

 

[39:13-14] 이에 시위대장 느부사라단과 환관장 느부사스반과 박사장 네르갈사레셀과 바벨론 왕의 모든 장관이

14) 보내어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서 취하여 내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붙여서 그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매 그가 백성 중에 거하니라 -

 

여기에는 느부사라단과 환관장 느부사스반, 박사장 네르갈사레셀 등을 포함한

바벨론 왕의 주요 관리들이 시위대 뜰에서 예레미야를 데려다가

그를 그다랴에게 넘겨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사람은 '그달리야'라고도 불리우며 유다에 남은 자들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왕하 15:22-24 므나헴이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드니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니라.

23) 유다 왕 아사랴의 제오십년에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시작하여 이 년 동안 통치하며

24) 주의 눈앞에서 악한 것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한편 기자는 여기서 예레미야를 '집으로 데려 가게'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다소 불명확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의 집이라고 표현되지 않고 그냥 '그 집'(하바이트)

즉 정관사가 사용된 ''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 집'이라고 표현되는 것은 흔히 성전을 뜻할 때 쓰였으며,

때로는 왕궁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집은 예레미야의 집이나 또는 그다랴의 집인 것 같지도 않다.

 

어쩌면 이는 바벨론 군대가 사령부 건물로 사용하고 있는

새로운 정부 청사, 곧 그다랴 행정부 건물이나

또는 총독 관저 정도되는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이와 관련된 기사가 40:1-6에도 나오는데 그 내용이 다소 다르다.

 

(40:1-6 호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를 붙잡아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포로가 되어 끌려간 사람들 곧 바빌론으로 끌려간 모든 사람들 가운데 두고 사슬로 묶었다가 라마에서 풀어 준 뒤에 주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2) 호위대장이 예레미야를 데려다가 그에게 이르되, 주 네 하나님께서 이 재앙을 이곳에 선포하시고

3) 이제 주께서 그것을 가져오사 친히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주께 죄를 짓고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4) 이제, 보라, 내가 이 날 너를 네 손의 사슬에서 풀어 주노니 만일 네가 나와 함께 바빌론으로 가는 것을 좋게 여기거든 같이 가자. 내가 너를 잘 보살펴 주리라. 그러나 만일 네가 나와 함께 바빌론으로 가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거든 그만두라. 보라, 온 땅이 네 앞에 있나니 네가 가기에 좋게 여기며 편하게 여기는 곳으로 거기로 갈지니라, 하니라.

5) 이제 예레미야가 아직 돌아가기 전에 그가 이르되, 너는 또한 바빌론 왕이 유다의 도시들을 다스릴 총독으로 삼은 자 곧 사반의 손자요, 아히감의 아들인 그달리야에게 돌아가 그와 함께 백성 가운데 거하거나 혹은 어디든지 네가 가기에 편하게 여기는 곳으로 가라, 하고 이처럼 그 호위대장이 그에게 식량과 보상을 주어 가게 하니라.

6) 이에 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에게 이르러 그와 함께 그 땅에 남아 있던 백성 가운데 거하니라)

 

40장에는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8km 가량 떨어진

라마의 포로 행렬 중에서 예레미야를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느부사라단은 그를 포로의 사슬에서 풀어주고 솔직하게 담화하고 있다.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본장의 11-14절의 내용은 사건의 세부 사항을 생략한 채

그 결과만을 간단히 기록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아마 그는 1차 심문을 당한 후에 석방되었다가

그 후 다시 병사들에게 붙잡혀서 사슬에 묶이게 되었을 것이며,

그런 다음 리블라를 거쳐 바벨론으로 압송되기 위해

라마의 수용소로 보내졌을 것으로 추론된다.

 

 

 

[39:15-16]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6) 너는 가서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이 성에 재앙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한 나의 말이 그 날에 네 목전에 이루리라 -

 

앞으로 다가올 예루살렘 파멸에도 불구하고

에벳멜렉이 살아남게 되리라고 하는 약속이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38:13과 연결되는 내용이다.

 

(38:13 이에 그들이 밧줄로 예레미야를 끌어올려 지하 감옥에서 끌어내므로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머무니라)

 

아마 이 내용이 이곳에 기록된 이유는 예레미야 자신과 함께

예레미야를 구출한 에벳멜렉 역시 예루살렘 함락에서

살아 남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 같다(Nicholson).

 

 

 

[39: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붙이우지 아니하리라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 에벳멜렉이 두려워하는 자들이란

아마 38:1에 언급된 유다 고위층 인사들을 말하는 것 같다.

 

예레미야를 구출했던 자는 바로 이 에벳멜렉이었고

또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큰 죄를 저질렀다고

왕에게 고소하였던 자가 바로 이 용기 있는 에벳멜렉이었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유다 방백들의 위협에 늘 시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39:18] 내가 단정코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 같이 되리니 이는 네가 나를 신뢰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가 나를 신뢰함이니라 -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의 메시지에

공감을 표했던 사람이었음을 암시한다.

아마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믿었던 다른 관리들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결국 에벳멜렉의 목숨을 건 대담한 행위는

왕이나 방백들 보다 여호와를 더욱 두려워하는 신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그는 선지자의 편에 서서 중재하였고

그로 인해 여호와의 보호하심이 함께했던 것이다(Clar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