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흘린 발자취

미국의 교회사 3

거듭난 삶 2023. 3. 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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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있어서 신앙의 자유에 가장 큰 장애가 되었던 것은

(아마 이에 대해서는 온 세계가 다 그렇겠지만)

지나간 여러 세기를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라난 확신,

즉 종교라는 것은 정부의 지지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어떤 교파라 할지라도 교인들이 자진하여 바치는 헌금만으로는

유지되고 번성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버어지니아에서 영국교회의 폐지 문제를 에워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을 때나

또한 그 후 신앙의 자유가 의회에서 논의되었을 때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오랜 세월을 두고 침례교도들은 단독으로 이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오드 아일랜드는 1638년에 식민지가 성립되기 시작하였으나

1663년 까지는 합법적으로 인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이 바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게 된 최초의 주()가 되었다.

 

두 번째 곳은 버어지니아이며 이는 1786년에 이루어졌다.

의회는 17911215일 시행의 헌법 제1 수정조항을 선포하였다.

이는 곧 모든 국민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침례교도들은 국민들에게 이 축복을 가져오게 한

장본인으로서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초기 미국 의회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를 말해 보기로 하자.

 

미국은 하나의 국교를 가져야 할 것인가?

또는 여러 개의 국교를 가져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자유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몇 개의 법안이 제출되었으며

영국교회(성공회)를 국교로 추천하는 이도 있었고

또 회중교회를 추천하는 이도 있었으며

장로교회를 추천하는 이도 있었다.

 

당시 침례교도 중에는 의회의 의원이 한 사람도 없었으나

절대적인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열렬히 싸우고 있었다.

제임스 매디슨(후에 대통령이 됨)은 그들의 중요한 지지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패트릭 헨리가 일어나서 타협안을 제출하였다.

그것은 하나의 국교 대신에

네 개의 국가교회(혹은 교파)로 하자는 것이었는데

이는 영국교회 즉 성공회와 회중교회,

그리고 장로교회와 침례교회였다.

 

그중 어느 것으로도 유일한 국가교회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각각 헨리의 타협안을 받아들기로 동의하였다.

(이 타협안이란 세금을 바치는 모든 사람은 누구든지 이 교파 중

어느 곳에나 자기 들의 세금을 바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침례교도들은 이러한 모든 것에 반대하는 싸움을 계속하였다.

교회와 국가가 결합한다는 것은

침례교회의 근본적인 교리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므로

그것이 표결에 붙여져도 그들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헨리는 침례교도들에게 간청하기를

자기는 그들을 도우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존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이에 항거하였다.

투표를 하자 거의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법안이 되기 위해서는 세 번이나 더 투표해야 했다.

 

매디슨과 침례교도들은 싸움을 계속하였다.

 

두 번째 투표 결과

역시 헨리의 능란한 연설에 힘입어 거의 이의 없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다시 세 번째의 투표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나타났다.

헨리가 버지니아의 주지사로 임명되어 의회를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세 번째의 투표를 할 때에는

헨리와 같은 대항하기 어려운 연설이 없었으므로

그 투표는 무효가 되어 버렸다.

 

이리하여 침례교회는 그들 자신의 가장 엄숙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법으로 제정한 국가교회의 한 종파가 될 뻔하였다.

이것은 침례교회가 국법으로서 인정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국가교회의 회원이 될 뻔한 기회였던 것이다.

 

그 후 오래지 않아 영국교회는 완전히 미국에서 폐지되었고

중앙 정부에 의하여 유지되는 교파는 하나도 없게 되었다.

(아직 몇 주에서는 주립교파가 있다).

 

전 미국에 관한 한 국가와 교회는 완전히 분리되어졌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

이 둘은 그 외 다른 곳에서는 적어도 1500년 동안 (A.D. 313년 이래)

불순한 결합을 하여 왔던 것이다.

신앙의 자유는 최소한 미국에서는 부활하게 되었으며

다시는 멸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야 신앙의 자유가 점차적으로 온 세상에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개념은 청산되지 못한 채

신앙의 자유가 미국의 헌법에 채택된 이후에도

국가교회는 몇몇 주에서는 오랫동안 존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미국에서 국가교회라는 개념을 가장 먼저 시도하던

매사츄세츠 주에서도 결국 이 개념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개념은 두 세기 반이나 그곳에 존속하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최초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이를 사랑하였던

위대한 나라의 체면을 더럽힌 최후의 장소는 유타주였다.

정부가 단 하나의 특별한 종파를 지지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참되고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종종 밥티스트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때때로 받은 일이 있다.

만약 어떤 국가(國家)나 주()가 침례교회를 한 교파로서

법률에 의하여 국교로 제정하여 주겠다는 제안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그러한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또 만약 그들이 그러한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가톨릭이나 성공회,

또는 루터교회나 장로교회, 회중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다른 교파의 사람들을 박해할 것인가?

 

아마 이러한 의문을 조금 생각해 보는 것도 그릇된 일은 아닐 것이다.

사실 침례교도들이 그러한 기회를 가져 본 일이 있었던가? 물론이다.

 

한때 네덜란드의 국왕이

(그 당시 네덜란드는 노르웨이, 스웨덴, 벨기에, 홀랜드, 및 덴마크를 포함한 나라였다.)

국교가 있어야 하겠다는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을 하였다는 것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 왕국은 국가교회를 가지고 있었던 국가와 정부가 사방으로 둘러 싸고있었다.

즉 그러한 종교가 정부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네덜란드의 국왕은 한 위원회를 지정하여 당시 존재하고 있었던

모든 교회들과 교파들의 주의 주장을 조사하여

어떤 것이 신약성경적인 교회로서 가장 올바른 교리들을 가지고 있는가를

조사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위원회는 침례교회가 신약의 가르침에 합당한 대표적인 것이라고 보고 하였다.

 

그리하여 국왕은 침례교회를

그 왕국의 국가교회 또는 교파로 만들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침례교도들은 그에게 진심으로 사의를 표하였다.

그러한 제안은 그들의 근본적인 교리와 확신에

배치되는 것이라 말하며 이를 거절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침례교회가 한 국민의 국가교회가 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는 아니었다.

로드아일랜드의 식민지가 지정되었을 때에도

그러한 기회가 확실히 있었던 것이다.

 

다른 교파를 박해한다는 것,

그것은 아마 그들이 침례교도로 존속하고 있는 한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원래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실로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신앙의 근본 신조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들은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교회와 국가의 결합이라는 문제에 대한

침례교들의 확신은 대단히 견고한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언제나 국가에서 제안한 모든 원조를 다 거절하였다.

 

여기서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그 하나가 텍사스의 감리교회인데

빈약한 학교를 경영하고 있던 그들은 국가의 원조를 받아들였다.

결국 그 학교는 국가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또 하나는 멕시코에서의 경우이다.

 

W.D 파우웰이 멕시코에서 침례교회의 선교사로 있었을 때의 일이다.

그의 선교사업은 코아윌라 주의 총독 마데로에게 침례교회에 대한

대단히 좋은 인상을 주었다.

 

마데로는 만약 침례교회가 멕시코의 코아윌라 주에

훌륭한 학교를 설립하기를 원한다면

국가에서 상당한 원조를 하겠노라고 제의하였다.

이 일은 파우웰에 의해 선교부에 넘겨졌다.

그러나 이 기금은 국가에서의 원조라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후에 마데로는 개인적으로 막대한 금액을 기증하였다.

그 기금은 받아들여졌고 마데로 학원이 설립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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