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흘린 발자취

17,18,19 세기의 교회사

거듭난 삶 2023. 2. 25.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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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17,18,19 세기의 교회사

 

 

 

1. 이 강의는 17세기 (AD 1601)의 초엽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이 중요한 교회들의 역사를 너무 바삐 지나 버린 감이 있지만,

이는 부득이한 사정이었다.

 

 

2. A.D.17-19의 삼세기에 동안에 전혀 새로운 교파가 설립되었다.

어떤 교회사가들이 회중교회(처음에는 독립파라 불렀음)의 시작된 연대를

1602년 이라 말하고 있음은 정확한 것이다.

 

그러나 쉐프 - 헬조그는 그들이 저술한 백과사전에서 회중교회의 기원을

그보다 훨씬 앞서 16세기, 즉 루터교회나 장로교회와 같은 시대로 잡고 있다.

종교개혁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카톨릭을 떠났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루터나 칼빈이 주도하였던 종교개혁의 범주에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던 사람들로서 성직자가 교회를 다스린다는 관념을 버렸으며,

콘스탄틴의 교권제도에 가담하기를 거부하였던 사람들로

15세기 동안에나 지켜 내려온 신약성경의 자치적인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결정하였던 것이다.

 

 

 

3. 이 특수한 개혁을 요구하는 이 새로운 단체의 확고한 주장은

그들의 머리 위에 카톨릭이나 루터교회 그리고 장로교회와 영국교회 등,

모든 기성교회로부터 가혹한 핍박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교파들 역시 가톨릭이 범한 수많은 과오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는데,

유아세례나 침수례 대신에 물뿌림 세례를 베푸는 것과,

나중에는 극단적인 국가교회의 관념을 채택하여 이를 실시한 것 등이다.

 

따라서 그들이 신앙을 지키기위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후에는

그들 자신이 또한 가혹한 핍박자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4. 독립파 혹은 오늘날 회중교회라 불리는 이 교회의 명칭은

그들이 만든 교회의 운영 제도에서 온 것이다.

쉐프 헬조그의 백과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영국 회중교회의 특수한 주장

몇 가지를 들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그 유일한 법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들은 순수한 신앙적 목적하에 이 세상에서 분리된

경건한 사람들의 특수한 단체이며 이 세상과 섞여서는 안 된다.

 

분리된 이러한 교회는 그들 자신의 직원을 선정하며

규율을 유지해 갈 수 있는 충분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교회 운영에 있어서 모든 교회는 독립이며

동시에 국가의 관리를 받지 않는다.

 

 

 

5. 이러한 주장은 가톨릭은 물론이요, 루터교나 장로교 그리고

영국교회의 감독주의와는 전혀 상이하다.

반면에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회와 그리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기본 가르침과 완전히 동일하다.

 

 

 

6. 1611년에는 킹 제임스 판의 영어 성경이 출간되었다,

이때까지는 성경이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주어진 일이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일반에게 전파되기 시작함에 따라

교황의 권력은 갑자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적어도 여러 세기만에 처음으로 신앙의 자유라는 관념이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7. 1648년에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평화조약의 결과로써 나타난 여러 가지 중에는

큰 교파간에 삼자 협정이라는 것이 있는데

즉 이것은 가톨릭, 루터교회, 장로교회가 서로 더 이상 박해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교파 사이의 박해는 곧 그 교파를 지지하고 있었던 정부와

전쟁하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성도들 특히 아나-밥티스트 교도들은

이러한 교파의 사람들로부터 예전과 다름없는 가혹한 대우와

처참한 핍박을 계속 받아야만 했다.

 

 

 

8. 17세기 동안에는 왈덴스, 아나-밥티스트,

및 밥티스트(어떤 곳에서는 아나라는 말이 떨어져 버렸음)들에 대한

치명적인 박해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영국에서는 존 번역과 그외 여러 사람들이 증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영국교회가, 독일에서는 루터교회가, 스코틀랜드에서는 스코틀랜드 교회(장로교),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고 교황의 제도가 권력을 잡고 있었던 모든 곳에서는

가톨릭교인들이 그들을 핍박하고 있었다.

 

이제 어떠한 교회와도 타협을 하지 않았던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곳에서나 결코 편안함이 없었던 것이다.

 

 

 

9. 이미 4세기에 옛날에 교권제도에 가입하기를 거절하였고,

유아 때 받았던 세례를 부인하며, 침례에 의한 중생의 교리를 부인하였고,

또한 교권 제도하에 있었던 사람들 중,

그들에게로 온 사람들에게 재침례를 요구하였던 이러한 사람들이

아나 밥티스트(Ana-Baptist) 라고 불리웠던 것은 의미 깊은 일이다.

 

그러나 그때 그들에게 어떠한 명칭을 붙이었든지 상관할 것 없다.

그들은 항상 아나 밥티스트라 불리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6세기의 초엽에는 아나가 떨어지고 그저 밥티스트(침례교도)라는

단순한 이름으로 되었으며 그 후에는 차츰 다른 이름으로는 불리지 않았다.

 

만약 존 번연(John Bunyan)이 좀 더 이전 시대에 살고 있었더라면

그 제자들은 번연니스트(Bunyanist), 혹은 아나 밥티스트라 불리웠을 것이다.

번연 이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두 가지 이름으로 불려졌을 것이다.

 

 

10. 밥티스트(Baptist)라는 명칭은 별명이며,

이는 그 반대자들이 그들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만약 명칭이 주님께서 요한을 밥티스트라 부르셨을 때와 같이

구세주 자신이 그들에게 주신 것이라면 바로 적합한 것이 되었을른 지도 모른다).

 

이때까지는 어떤 단체의 침례교도들이라도 이 이름을

공식적으로 채택한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름은 확정되었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또한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사실 그 이름은 꼭 알맞은 명칭이었다.

 

이는 오늘날 침례교회가 지키고 있는 교리를 처음으로 가르쳤던

그리스도의 뛰어난 선구자의 칭호였던 것이다.

 

 

 

11. 다음은 쉐프 헬조그의 백과사전 1p.210 에 있는

유럽의 침례교회사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몇 마디를 인용한 것이다.

 

 

밥티스트가 스위스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523년경 인데,

거기서 그들은 쯔빙글리와 로마 가톨릭의 박해를 받았었다.

그들은 1525년에서 1530년 사이에 남부 독일과 티롤,

그리고 중부 독일에서 크고 충실한 교회들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곳에서도 박해는

그들의 생활을 참혹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 이것은 모두 개신교 곧 루터교회가 성립되기 이전의 일이다.)

 

계속하여 좀 더 인용하기로 하자.

 

 

모라비아는 크나큰 자유를 약속하는 곳으로 보였기 때문에 침례교도들은

그곳으로 이주해 갔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기만당하였을 뿐이었다.

그들은 1534년 이후에는 그 수효가 늘어 갔으며

북부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윌룬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들은 그 저지대 나라의 알바의 지배하에서도 그 수효가 증가되어 갔으며

놀랄 만한 선교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 - 선교열,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완고한 사람들이 초기의 침례교도라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침례교도는 어디서 온 것일까?

그들은 종교개혁 시절에 가톨릭에서 나온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들은 종교개혁 이전에도 큰 교회들을 가지고 있었다.

 

 

12. 여러 세기가 지나감에 따라 영국에 종교적 변화가 있었다.

복음을 영국으로 전파한 것은 사도들의 손이었지만,

영국의 교회들은 제 4세기 초엽 교권제도가 확립되기까지

또 그 후 1세기 이상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교회는 마침내 가톨릭적인 교회처럼 급속도로 발전되어

교권제도의 권력하에 놓이게 되었다.

헨리 8세의 통치하인 1534년에서 1535년까지 일어났던 분열 때까지

그것은 영국의 국교가 되어 있었고,

영국교회(성공회)라는 명칭을 받게 되었다.

 

18년 후 곧 1553년에서 1555년까지

여왕 메리(피의 메리)가 통치하는 동안에 영국은

카톨릭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는데,

피의 5년간이란 바로 이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메리의 이복동생 즉,

앤 블레인의 딸 엘리자베스가 1558년 왕위에 오르자

다시 가톨릭을 내몰고, 영국교회가 재차 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그 후 다음 한 세기 동안 모든 것이 그대로 계속되다가

짧은 기간이나마 장로교회가 우세하게 되어 마치 장로교회가

스코틀랜드에서와 같이 영국의 국교가 된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올리버 크롬웰 시대에 뒤이어 영국교회는

본래의 위치에 돌아오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영국의 국교로써 존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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