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거듭난 삶 2023. 12. 9.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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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전도 여행 시작

[구브로 전도]

 

성 경:[13:6-12]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 이 박수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13: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 바나바와 사울의 일행은 살라미의 반대편, 즉 구브로섬의 서쪽 끝에 위치한 도시인 바보에 도착했다.

 

이 도시는 살라미로부터 약 180km의 거리에 있다.

본래 바보(Paphos)는 두 군데가 있었다.

 

즉 한 군데는 옛 베니게의 도시이고, 여기서 언급된 바보는 이곳으로부터 서북쪽 약 11km의 거리에 있는 로마령의 도시를 가리킨다.

 

바예수 - '예수의 아들' 혹은 '여호수아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유대식 이름이다. 바예수는 총독 관저에서 일하는 유대인으로 그의 신분은 '거짓 선지자 박수'였다.

 

박수는 당시 마술적 또는 주술적 치료 행위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에 거짓 선지자라고 덧붙여진 점으로 보아 자칭 하늘의 계시자로 행세하면서 동시에 주술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치료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인 그가 그 같은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활동을 지속했다는 사실은 그곳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그의 행동에 미혹되었거나 아니면 총독이 그를 보호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를 율법에 따라(20:6) 처벌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20:6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13: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총독 서기오 바울 - 서기오 바울에 대해서 성경의 다른 곳에 언급되어 있지 않아 더 이상 알 수 없다.

 

그가 글라우디오 황제 때 티베르강 관리자로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F.F. Bruce)도 있지만 정확한 인물 고증(考證)이 어렵다. 다만 누가의 묘사로 보아 지혜있고 유력한 통치자로 추측할 수 있다.

 

지혜 있는 사람 - '지혜있다'(쉬네토스)는 맡은 본래 신중하고 지성적이며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이 말은 총독의 통치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아마 누가는 총독으로서 서기오 바울이 공명정대(公明正大) 하면서 분별력이 있는 정치를 한 것을 이 한 단어로 묘사한 것 같다.

 

 

 

[13:8] 이 박수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엘루마 - 아람어 또는 아랍어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 단어는 6절에서 언급된 박수와 동의어다. 본래의 뜻은 요술장이 또는 마법사로 통한다. 그는 총독과 바나바 일행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반()기독교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에 따라 총독 서기오 바울의 지혜는 더욱 돋보이게 된다. 즉 측근의 불경건한 술수를 물리치고 바나바와 사울 일행을 만남으로써 지혜 있다는 누가의 묘사가 증명되는 셈이다.

 

 

 

[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 - 처음으로 바울(Paul)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었다. 이후로는 사울이 아니라 바울이라는 이름으로만 언급된다.

 

사울이라는 이름에서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 이유에 대해서 사울이 회개한 이후부터 새 사람된 표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Bengel, Olshausen, Meyer) 이는 주관적 추측에 불과하다.

 

오히려 바울이라는 이름을 본래부터 갖고 있었는데 서기오 바울을 만난 이후부터 저자가 사울을 로마식 이름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Zahn, Lightfoot, Ramsay, Knowling, Vincent).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유대식 이름 외에 로마식 이름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1:23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특히 사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사람이었으므로

 

(22:28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하니)

 

로마식 이름을 가졌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바울이라는 사울의 로마식 이름을 이제야 언급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제 비로소 사울이 이방 선교를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이방 지역에서는 로마식 이름으로 언급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여질 것이고 설교에도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성령이 충만하여 - 여기서 누가가 의도하는 바를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1) 모든 악령과의 싸움에서 승리로 이끄는 것은 성령의 역사임을 말한다.

(2) 거짓 선지자와 대결하는, 성령이 충만한 바울을 부각시킴으로써 이제까지 앞세웠던 바나바로부터 이야기의 초점이 바울로 옮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3:10]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 - 바울은 엘루마에 대한 일차적인 공격으로서 엘루마의 정체를 폭로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궤계'에 해당하는 헬라어 '돌로스''미끼로 잡다''델로'에서 유래된 단어로 '교활', '간교', 또는 '올무', '미끼' 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한마디로 사기꾼이라는 말이 될 수 있다.

 

6절에서 '거짓 선지자'라고 언급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악행'이라는 말은 본래 경솔하거나 무절제한 행위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부주의하고 반()신앙적 행위로 인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실족케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귀의 자식 - 이와 같은 저주는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의 저주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이 말은 엘루마에 대한 저주이면서 그의 악한 행실에 대한 폭로이다.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 엘루마의 행위가 '주님의 길을 훼방'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총독 서기오 바울과 바나바와 바울 일행의 만남이 주님의 뜻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13: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 저주 또는 축복에 대한 묘사로 주의 손이 본서에서 언급되는데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여기서는 성령의 일을 거스른 죄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함을 의미한다. 진노가 임한 결과 엘루마는 소경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징벌은 구약성경에서 범죄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묘사되었다.

 

(28:28-29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침과 눈멂과 경심증으로 치시리니

29) 소경이 어두운데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치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안개와 어두움 - 눈이 멀어진 상태를 점층적 표현으로 묘사한 듯하다. 즉 엘루마의 눈은 안개처럼 희미하다가 어두움처럼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 엘루마가 완전히 실명(失明)하여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음을 묘사하고 있다.

 

바울을 만나기 이전에는 자칭 선지자라 하여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갈 길을 지시해 주는 일을 했지만 지금은 혼자서 걸을 수도 없어 인도자를 찾는 엘루마의 모습은 거짓 선지자의 상징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13: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 본 구절은 총독 바울이 예수를 영접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에 대한 설명이다. 엘루마가 소경된 사건이 총독 바울의 회심(回心)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렇다고 회심을 유발시킨 전체 동기는 아니다.

 

즉 기적적인 사건이 총독 바울의 회심에 영향을 크게 준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여기에만 강조점을 둘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엘루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바울 일행을 만나고자 했다는 점은 바울의 가르침이나 그에 관한 이야기에 이미 호의적인 입장에서 관심을 두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엘루마가 소경된 사건은 그가 회심하는 데 외형적 동기 부여의 기능을 갖고 있다.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 여기서 '주의 가르치심'은 총독 바울이 엘루마의 저주를 목격하면서 받은 교훈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주의 일을 훼방하고 사기와 악행을 일삼아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의 비참한 말로(末路)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함과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을 것이다.